작금의 ‘가요계’에서 훵키라는 음악은 유행의 하나다. 최신의 첨단 유행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지속되는 유행이다. 박진영과 김형석 같은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들이야 뭐 유행가를 만드는 것일 뿐이니까. 긱스(지금은 활동이 부진하지만)나 롤러코스터 같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밴드들, 불독맨션이나 스웨터처럼 ‘인디’라는 (쓸모 없는?) 꼬리표가 달린 밴드들,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이나 빛과소금처럼 이제는 베테랑급에 속하게 된 밴드들… 이렇게 이질적인 밴드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단어가 ‘훵키’다.

20030502081603-0508lovenpeace_series1이미지 출처: [그룹 사운드 히트 앨범](선성원 편, 세광출판사, 1989)

이런 훵키한 리듬과 사운드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거슬러 올라가면 사랑과평화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지금도 이들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국내 최장수 그룹’이라는 칭호를 쉽게 갖다 붙이지만 그런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과평화를 향한 행진이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니 사연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멤버도 수 차례 갈렸고, 그래서 지금 남은 ‘원년 멤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곤 보컬을 맡고 있는 이철호 한 명밖에 없다. 더구나 그마저도 사랑과평화가 처음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사정 상’ 대중매체에 등장하지 못했다. ‘사정’이란 ‘대자 마자 초자’를 말한다.

따지고 보면 ‘훵키’와는 또 다른 ‘퓨전’이라는 단어를 대중화시킨 최초의 주역도 사랑과평화다. 봄여름가을겨울이나 빛과소금처럼 사랑과평화로부터 직접 파생되었다는 사연, 그리고 ‘재즈’로 분류되어야 할 김광민이나 정원영이 1980년대 초에 사랑과평화를 잠시 거쳐갔다는 사연을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훵키나 퓨전이라는 음악이 한국의 음악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의 선구적 업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과평화의 음악은 훵키인가 퓨전인가, 록인가 재즈인가, 춤추기 위한 음악인가 감상용 음악인가. 답은 참 모호하다. 사랑과평화라는 존재는 참 특이한 존재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밤무대 그룹 사운드’ 계보에 속한다. 진지한 음악 애호가들이 경멸하거나 외면하는 ‘밤무대’에서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연주해 왔다. 최근까지 ‘현충일 하루만 쉬면서’ 춤추는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해 왔다. 이들이 경이로운 것은 이렇게 남들 춤추는 데서 풍악이나 울려대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에게서 정말 혁신적인 음악이 나왔다는 점이다.

20030502081603-0508lovenpeace_series21979년 디스코 클럽 ‘코파카바나’ 광고 사진 중. 이미지 제공: 코너뮤직(http://www.conermusic.com)

사람들이 처음 그들을 인식한 것은 아마도 1978년 “한동안 뜸했었지”라는 곡으로 정말 ‘한동안 뜸했던’ 그룹 사운드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을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룹 사운드 하면 연상했던 고고 리듬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엇다. 그때는 그게 훵키인지 뭔지 잘 몰랐을 때지만 그들은 그걸 진짜로 연주했다. 최이철의 기타는 날렵하면서도 질펀했고, 김명곤과 이근수의 트윈 키보드는 화려하면서도 정밀했다. 이들에 다소 가려 있었지만 김태흥의 드러밍은 당대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아, 참 이남이에서 송홍섭으로 이어지는 훵키한 베이스 연주를 빼놓으면 찐빵에 대해 말하면서 앙꼬를 말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렇게 뜨기 전 회현동에 있던 퍼시픽 호텔의 나이트클럽 무겐(Mugen)에 가 본 사람이었다면 실제 이들이 연주했던 것은 TV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쨉이 안 되는’ 것이었다. 미 8군의 클럽에서 흑인 병사들이 “원더풀!”을 외쳤다는 말은 본인들 증언 말고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아무튼 사랑과평화가 한참 잘 나갈 무렵에는 이남이도 송홍섭도 아니고 이탈리아인 사르보(Sarvo)가 베이스를 잡았다. 초퍼(chopper)와 슬랩(slap) 등 온갖 초절기교를 보여 주면서…

그래서 당시 무겐 나이트클럽에 춤추러 왔던 사람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춤을 추지 않고 넋이 나간 채 무대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넋이 나간 사람들 가운데 이장희, 송창식, 구창모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장희는 이들의 매니저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고, 송창식은 1980년대 이후 자신의 음반을 녹음할 때 최이철을 불렀다. 구창모는 1980년대 말 김명곤과 함께 큐직(Kj:uzik)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리기도 했다.

초기의 후원자는 단연 이장희였다. 다름 아니라 “한동안 뜸했었지”와 “어머님의 자장가”를 비롯한 사랑과평화의 초기 히트곡의 주인이 이장희였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사랑과평화의 사운드는 이른바 ‘포크’ 계열의 작곡과 ‘그룹 사운드’ 계열의 편곡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것이었다. 1년 뒤에도 이장희는 “장미”와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라는 곡을 주었고, 그래서 사랑과평화에게 ‘서포모어 징크스’ 같은 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다시 또 한동안 뜸했다. 이유는 1980년 여름의 이른바 ‘제 2차 대마초 파동’이었다. 1975년 겨울의 제 1차 대마초 파동에 비하면 조용히 넘어간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더욱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이른바 ‘제 5공화국 시대’, 달리 말해 ‘전두환 시대’에 이들은 조용했다. 3년 동안 사랑과평화의 모든 멤버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고 그래서 뿔뿔이 흩어졌다.

3년 뒤 김명곤은 나미를 통해 ‘한국 최초의 신쓰 팝’인 “빙글빙글”을 만든 이래 1980년대 가장 잘 나가는 작편곡가가 되어 ‘5,000곡을 편곡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송홍섭은 서울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세션맨으로 활발하게 활동했고 1990년부터는 자신의 스튜디오까지 차려서 음반 제작 일에 매달렸다(참고로 한영애(4집), 신윤철, 삐삐밴드, 유앤미블루가 이곳에서 나왔다). 이남이는 농사를 짓겠다고 시골로 내려가 버렸고, 이철호는 밤무대와 ‘그곳’을 전전했다. 설상가상으로 김태흥은 1984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정원영이, 김광민이, 유현상이 사랑과평화를 거쳐갔고 하덕규가 곡을 주어 [넋나래]라는 정체불명의 음반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홍보도 못하고 묻혀 버렸다. ‘마지막 프로페셔널 그룹 사운드’는 그냥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20030502081603-0508lovenpeace_series31980년대 말 사랑과 평화의 연주 모습. 왼쪽이 이남이(베이스), 오른쪽이 최이철(기타). 이미지 제공: 코너뮤직(http://www.conermusic.com)

그러다가 1988년 난데없이 “울고 싶어라”라는 곡이 TV와 라디오에서 울려 퍼졌다. 사랑과평화가 깨질 무렵 이남이가 만들어서 불렀던 곡이었다고 한다. “떠나 보면 알 거야”라는 가사는 이때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한때의 감정을 발가벗겨 표현한 이 곡은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노래여 퍼져라”라던 그들의 바람이 드디어 실현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들은 재기에 성공했다. 따져 보면 이렇게 재기에 성공한 ‘1세대 그룹 사운드’도 없다. 물론 이런 성공도 이남이가 솔로로 나서면서 단명하고 말았지만…

그 뒤 1990년대 이들의 활동은 ‘없는 듯 하면서도 어느 날 보면 문득 옆에 있는’ 것이었다. 1989년 “샴푸의 요정”을 담은 4집이, 1992년 “못 생겨도 좋아” 등을 담은 5집이, 1995년 “복고시대” 등을 담은 6집이 나왔다. 5집부터는 이철호가 정식으로 멤버로 가입하여 오랫동안 안정된 라인업으로 활동했다. 건국대학교 그룹 사운드 옥슨 출신의 이승수가 베이스와 작곡을 맡아서 ‘젊은 피의 수혈’도 성공한 것 같았다. 가끔씩 방송에도 얼굴을 드러냈고, 정식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1999년 최이철이 사랑과평화를 탈퇴했고, 2001년 김명곤이 사망했다. 두 사건의 이유는 아직 미궁이다. 무슨 배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이유야 어떻든 두 사건은 이제 사랑과 평화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 하나의 순환을 마무리하는 것을 상징한다. 남아 있는 멤버들은 사랑과평화의 ‘창립 이념(?)’인 훵키한 사운드를 들려줄 것이다. 올해 초 발표한 일곱번째 앨범을 들어 보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철호와 이병일이 젊은 감각을 가진 이승수, 이권희, 송기영과 함께 좋은 팀워크를 보여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에게 ‘최이철이 있을 때보다 못하다’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한국에서는, 25년이 넘어서도 이름이 남아있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중하다는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나머지 멤버들은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최이철은 ‘유라시아의 아침’이라는 프로젝트에서 그 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사운드에 ‘동양음악’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렇지만 ‘평생 서양음악만을 추구했던 사람이 동양음악에 주목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다’는 의견에도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또한 춘천에 내려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던 ‘로컬’ 음악인들과 함께 ‘철가방 프로젝트’를 만든 이남이의 활동도, 지독하게 중앙지향적인 한국의 음악문화에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랑과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증오와 전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이번 기획에서는 사랑과평화의 ‘일대기’를 다뤄 보기로 했다. 5월 5일부터 대학로 라이브 극장에서 공연을 갖는다고 하니 시의적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물론 ‘일대기’를 다루는 일은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의 전설적인 그룹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미 8군 패키지 쇼’ 시절을 제외한다고 해도 아이돌(스), 김 트리오, 앨리게이터, 영 에이스, 서울 나그네, 핫 록등의 ‘전설적’ 그룹들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이철호의 경우 파이오니아스, 검은 나비같은 당시의 ‘슈퍼그룹’들도 언급해야 한다.

뿐인가. 사랑과 평화의 주역들이 ‘레코딩 세션’을 해준 가수들에 대해 언급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이 필요할 것이다. 김준, 방은미, 장미화, 장욱조, 송창식, 강구원, 방미, 이예린 등등…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인터뷰에서 본인들의 증언에 맡기도록 하자. 우리로서는 음악 밖에 모르고 살아온 그들의 일대기에서 몇몇 흔적만을 추렸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분량이다. 이들의 오랜 발자취처럼… Peace!20030430 | 신현준 homey@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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