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30063044-0508lovepeace_1st사랑과 평화 – 한동안 뜸했었지 – 서라벌(SRB 0009), 1978

 

 

생존자들이 부르는 승전가

25년 경력의 베테랑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평화가 정상의 위치에 군림했던 기간은 1978-1979년에 이르는 단 2년뿐이다. 그러나 이 2년은 한국 음악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영광의 2년이다. 당시의 한국 대중음악계는 산울림을 필두로 한 아마추어 대학 그룹들의 돌풍으로 대마초 사건 이후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사랑과 평화는 캠퍼스 그룹들의 전성기에 등장하여 미8군 무대 출신 프로페셔널 밴드의 자존심을 드높인 유일한 1세대 그룹이었다. 대마초 사건을 전후로 1세대 그룹사운드의 주역들이 대거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상황에서 이들은 끝까지 트로트로 전향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적 지조를 지킨 것이다. 그 결과는 산울림과 함께 정상의 자리를 겨루는 인기 밴드로의 등극이었다. 물론 사랑과 평화의 성공을 단순히 ‘지조론’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설명이다. 이들의 성공이 지닌 진정한 의미는 1970년대 초 한국의 청년문화를 양분했던 포크 전통과 그룹사운드 전통의 이상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찾아져야 한다.

1세대 그룹사운드의 아킬레스 건은 창작력이었다. 사랑과 평화도 이 점에서는 다른 그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배후에는 포크 진영 최고의 송라이터 중 하나인 이장희가 있었다. 이장희의 탁월한 센스와 작곡능력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예리한 편곡과 연주능력은 1970년대 초를 대표하는 두 음악적 전통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이었다. “한동안 뜸 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 “장미”,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등 이장희가 만든 곡들은 사랑과 평화가 스타덤에 진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작품들이다. 당시 그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규제된 탓에 작곡자의 이름이 가명으로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곡들에서 나타나는 톡톡 튀는 가사와 투박한 선율을 이장희 아닌 다른 사람의 것으로 오인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 곡들에 깃들어 있는 사랑과 평화의 입김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들의 세련되고 정교한 훵키 사운드는 이장희의 소박한 원곡을 화려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작품으로 뒤바꿔놓는다. 만약 “한동안 뜸 했었지”를 이장희와 동방의 빛이 불렀다면 단순한 컨트리 풍의 색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978년에 발표된 사랑과 평화의 데뷔 앨범 [한동안 뜸 했었지]는 한 해 전에 등장한 산울림의 데뷔 앨범과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지금까지도 널리 불려지는 이 앨범의 타이틀 트랙은 산울림의 “아니 벌써”에 이어 전국을 강타한 메가톤급 히트곡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곡이 처음부터 음악적 선진성이나 탁월한 연주력 등의 측면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이 곡의 히트는 오히려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명랑 쾌활한 분위기 등 ‘부차적인’ 요인들에 힙입은 바 크다. 여기에 최이철의 익살스러운 토크 박스 기타와 김명곤의 기상천외한 호루라기 연주(?)는 이 곡을 이색적이고 코믹한 분위기로까지 이끈다. 이는 진지한 아티스트로서 위험부담이 매우 큰 전략이다. 자칫 이들의 음악적 정체성이 ‘코믹’으로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러한 위험을 정면돌파할 수 있는 실력과 자신감이 있었다. 실제로 대중들이 목격한 이들의 모습은 “한동안 뜸 했었지”의 반짝 스타가 아니라 대단히 진중하고 심각한 뮤지션들이었다. 게다가 베토벤(L. V. Beethoven)과 림스키 코르사코프(N. Rimsky-Korsakov) 등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이들의 실력은 관객들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각색한 “운명”과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편곡한 “여왕벌의 행진”은 사랑과 평화가 공연무대나 TV 등에서 항상 연주하던 고정 레퍼토리들이다. 그런데 이 곡들은 사실 이들의 오리지널 편곡이 아니라 월터 머피 & 더 빅 애플 밴드(Walter Murphy & The Big Apple Band)의 디스코 편곡을 음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연주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풀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월터 머피에 비해 신디사이저로 모든 것을 처리한 사랑과 평화의 버전은 상대적으로 싸구려 냄새를 많이 풍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당시의 관객들에게는 ‘딴따라’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놀라운 광경이었을 따름이다. 어떤 점에서 사랑과 평화는 처음부터 이러한 충격을 의도했을 수도 있다.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의 이데올로기적 격차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져 있던 상황에서 이 곡들을 연주한다는 것은 ‘우리는 딴따라가 아니다’라는 자기 선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곡들이지만 이 두 곡은 이런 의미에서 이들이 ‘음악성 있는 그룹’으로 인정받는데 크게 기여했고 그로써 자기들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임을 다 했다.

[한동안 뜸 했었지] 앨범의 구성을 살펴보면 A면은 대중성에 B면은 음악성에 각각 치중한 흔적이 눈에 띈다. 이장희의 작품들이나 디스코화된 클래식 곡들처럼 세간의 화제를 모은 작품들은 모두 A면에 몰아져 있는 반면 B면에는 최이철 작편곡의 본격 훵크 넘버들로 채워져 있다. 이 앨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거의 A면에만 집중된 탓에 B면에 실린 곡들은 좀처럼 조명될 기회가 없었지만 사랑과 평화 음악의 진면목은 사실 A면 보다는 B면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B면의 오프닝 트랙 “저 바람”은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지향이 극명하게 표현된 숨은 걸작이다. 훵크의 이념을 따라 이 곡이 강조하는 것은 첫째도 리듬, 둘째도 리듬, 셋째도 리듬이다. 베이스와 키보드가 전면에 나서고 보컬이 후방에 배치된 사운드의 전경은 이 곡의 이러한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 보컬의 멜로디 역시 리듬에 대한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극소화된 형태만을 유지한다. 와와 베이스와 거친 신디사이저 톤은 [Head Hunters] 시기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의 영향을 암시하지만 긴 즉흥연주 대신 단발적인 기타와 키보드 솔로로 곡을 축조하는 방식은 허비 행콕의 음악과 구별되는 독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저 바람”이 사랑과 평화 음악의 뼈대를 보여준 작품이라면 이어지는 “달빛”은 그것에 살을 붙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에서는 보컬이 다시 전면으로 복귀하고 화려한 즉흥연주가 후반부에 덧붙여진다. 이렇게 충분히 갖춰진 음악적 구조물은 사랑과 평화식 훵크의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들의 훵크는 야성적이고 지저분한 훵크가 아니라 지적이고 정돈된 훵크다. 훵크의 기본 정서인 관능적 쾌락주의가 배제되어 있는 대신 진지하고 학구적인 면모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의 음악에서 연상되는 이름들이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아니라 허비 행콕이나 조지 듀크(George Duke)라는 사실은 훵크에 대한 이들의 접근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에게 훵크는 몸의 음악이라기보다는 머리의 음악이며 놀이라기보다는 탐구의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의 음악적 성향이 훵크보다 훵크 재즈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은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음악사에서 사랑과 평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수많은 굴절과 좌절로 얼룩진 한국 음악사의 여러 질문들은 이들의 존재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만약 대마초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1세대 그룹사운드들이 주류 가요계에 투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포크 진영의 유능한 송라이터들이 좀더 활발하게 그룹사운드와 결합했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과 평화는 단 하나 뿐이다. 그 수많은 굴절과 좌절을 견뎌 이겨낸 밴드가 오직 이들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과 평화는 진정한 의미의 생존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뜸 했었지]는 이들의 음악 인생이 절정에 올랐던 시기의 기록물이다. 이는 또한 한국 포크와 1세대 그룹사운드의 끈질긴 생명력과 저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제 남은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질 수 있도록 이 앨범이 새롭게 재발매되는 일이다. 한국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작품이 수십년 묵은 중고 LP로만 존재하는 현실은 그대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20030417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8/10

수록곡
Side A
1. 한동안 뜸 했었지
2. 노래여 퍼져라
3. 어머님의 자장가
4. 운명(경음악)
5. 여왕벌의 행진(경음악)
Side B
1. 저 바람
2. 달빛
3. 뭉게구름(경음악)
4. 아베 마리아(경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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