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27110746-0508mrlifMr. Lif – I Phantom – Definitive Jux, 2002

 

 

‘프로그레시브’ 힙합, 환상적으로 체제를 논하다

우선 요약부터 해두자. 배스트 에어에게 총을 빌린 리프 씨는(“Bad Card”) 가게를 털다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A Glimpse At The Struggle”). 그는 다음 트랙에서 힙합 메시아로 화려하게 부활하여(“Return Of The B-Boy”) 노동 현장에 뛰어드나,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가 자신을 뼛속까지 갉아먹고 있음을 깨닫고는(“Live From The Plantation”) 거기서 도망치는 방법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 경제적 성공을 거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다(“New Man Theme”). 그리하여 고군분투 끝에 번듯한 사업가로 성공을 거두는 리프 씨(“Success”). 그러나 그의 가정 생활은 파탄 직전인데, 첫 번째 아내와는 오래 전에 이혼했고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식은 자신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에게 절망하며 자살한다(“Daddy Dearest”). 결국 경제적인 성공도 이 모순에 찬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남은 길은? 지구를 뭉개는 것 뿐이다(“Earthcrusher”). 그 묵시록적 상황의 끝자락에서는 리프 씨와 엘피가 쓸쓸한 바이올린 샘플에 맞춰 사후 세계를 논하고 있다(“Post Mortem”).

만약 미스터 리프의 이 음반을 ‘프로그레시브 힙합’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가능할 것이다. 첫째, 프로그레시브 성향의 록 밴드들이 애용하던 컨셉트 음반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 둘째, 힙합 비트 실험의 최전선에 서 있는 데프 젹스 레이블에서 나온 음반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거의 언제나 그렇듯, 엘피가 있다. 엘피 특유의 싸늘한 효과음과 묘하게 꼬인 비트, 현란한 스크래치가 터져나오는 “A Glimpse At The Struggle”는 이 음반의 사운드가 그의 주도하에 빚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본판은 다음 곡인 “Return Of The B-Boy”이다. 이 곡이 특히 귀를 끄는 이유는 엘피의 농익은 사운드 프로덕션 솜씨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대곡’같은 곡의 구성 때문이기도 하다. 평범한 힙합 다운비트와 고속 처리한 스캣, 트럼펫 샘플 등을 활용하며 무난하게 흘러가던 곡이 3분 51초 지점에서 갑자기 기어를 바꿔 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엘피의 전매 특허인 금속 풍선껌이 터지는 듯한 신서사이저 음과 자잘한 엇박 비트가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그 전환은 압도적이며, 청자의 주의는 온통 그 ‘쌈박한’ 그루브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두말할 것 없이 음반의 하일라이트이다.

엘피의 사운드 프로듀싱은 카니발 옥스나 자신의 솔로 음반과는 달리 엠씨의 래핑을 최대한 보장하는 한에서 이루어지며, 그래서 여전히 복잡하고 현란한 사운드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친근감있게 들린다. 이전 엘피의 사운드 실험에 광분했던 이들이라면 별 특징없는 프로듀싱으로 들릴 위험도 있으나, [Fantastic Damage]를 듣다 체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전자의 손을 들 것이다. 이 외에도 훵키하게 뒤뚱거리는 신서사이저 비트가 인상적인 “Status”, 찌그러진 현악 샘플을 배경으로 이솝 록과 함께하는 “Sucess”, 올드 스쿨의 향취를 풍기는 “Friends And Neighbors” 또한 맛깔나는 트랙이다. 리프의 래핑은 다소 평범하게 들리는 순간이 없지 않아 있으며, 그가 평소 열혈과격 랩 그룹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를 숭배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그의 래핑이 다소 ‘냉정하게’ 들린다는 사실 또한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Live From The Plantation”의 날카로운 라임과 매끈한 플로우는 그가 지닌 엠씨로서의 자질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갱스타(Gang Starr)의 구루(Guru) 이래 간만에 나온 보스턴 출신의 유능한 엠씨라는 사실 또한, “Iron Helix”에서 함께한 인사이트(Insight)의 존재와 더불어 보스턴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미래에 청신호를 비추어준다.

그러나 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뜬금없이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며 붕괴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묵시록적인 “Earthcrusher”로 넘어가는 음반의 구성은 순식간에 부활한 B-보이 리프 씨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당혹감을 안겨준다. 분명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독특한 것이며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도 분명하나, 이야기 자체의 환상적인 성격은 그가 수행하고자 했던 비판의 날을 무디게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척 디(Chuck D)와 더불어 라킴(Rakim)의 시적이고 환상적인 라임과 상상력을 경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속한 데프 젹스의 ‘추상적인’ 분위기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리라는 사실로 인해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음반의 약점이 수많은 컨셉트 음반들이 허우적거린 바 있는 함정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음반을 듣는 동안 계속 퀸스라이크(Queensryche)의 [Operation: Mindcrime](1988) 류의 음반들을 떠올렸던 것은 리프 씨에게는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런 음반들이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통속적 허무주의가 이 음반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다음 음반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재능있는 힙합 소설가를 하나 갖게 될 지도 모른다. 20030417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8/10

수록곡
1. Bad Card
2. A Glimpse At The Struggle
3. Return Of The B-Boy
4. Live From The Plantation
5. New Man Theme
6. Handouts
7. Status
8. Success
9. Daddy Dearest
10. The Now
11. Friends And Neighbors
12. Iron Helix
13. Earthcrusher
14. Post Mor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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