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27104716-0508elpEl P – Fantastic Damage – Definitive Jux, 2002

 

 

불 속에서는 무엇이 나올까

컴패니 플로(Company Flow)의 래퍼/프로듀서, 카니발 옥스(Cannibal Ox)와 이솝 록(Aesop Rock)의 프로듀서, 그에 더하여 RJD2와 미스터 리프(Mr. Lif)가 소속된 데프 젹스(Def Jux) 레이블의 CEO. 언더그라운드 힙합 팬들을 밤새도록 들뜨게 만들 이러한 이름 뒤에 있는 것은 엘피(El-P)의 존재이다. 최근의 어번 리뉴얼 프로그램(Urban Renewal Program) 프로젝트(여기에는 데프 적스 소속 아티스트들과 모스 데프, 프레퓨즈 73(Prefuse 73), 소울스 오브 미스치프 등이 얼굴을 내밀었다)에서 영국의 간판 엠씨 마이크 래드(Mike Ladd)와의 프로젝트인 마제스티콘스(Majesticons)까지, 최근에도 그의 활동은 기세등등하다. 그런 연유로, 가히 힙합계의 짐 오루크라 해도 좋을 그가 ‘드디어’ 솔로 음반을 낸다는 소식은 2002년 힙합계의 가장 커다란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컴패니 플로의 [Funcrusher Plus](1997)가 보여준 음울하고 날카로운 사운드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몇 번의 발매 연기를 거쳐 나온 엘피의 대망의 솔로 음반 [Fantastic Damage]는, 그러나, 엘피가 자신의 후광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 같은 소리를 들려준다. 간단히 말해, 오버한다.

음반은 공격적이다. 사운드와 가사 양면에서 그렇다. 첫곡 “Fantastic Damage”는 IDM의 영향이 느껴지는 트랙으로, 스멀거리는 앰비언트 효과음이 흐르다가 파삭거리는 브레이크 비트가 폭발하면서 분노로 가득한 엘피의 랩이 터져나온다. 세상에 대한 혼란스럽고 격렬한 증오를 드러내는 가사는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듯 한 절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른 절을 시작한다. 비트는 엇나가고 소리는 지글거린다. 여전히 정치적이되, 좀더 급진적이고 추상적인 소리들로 그는 세상에 선전포고를 한다. 신서사이저 베이스가 붐붐거리는 “Squeegee Man Shooting”은 일그러진 코러스와 왜곡된 음향들이 서로 뒤엉킨채 한바탕 난장(亂場)을 펼친다(이 곡은 뉴욕에서 실제 벌어진, 장애인에 대한 경찰의 총격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첫 싱글 “Deep Space 9mm”은 꼬일대로 꼬인 리듬과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공격적 래핑이 청자를 압도한다. 그렇다, 좋건 싫건 여기는 엘피의 세계인 것이다.

비트의 해체-조합과 노이즈의 구축은 이 음반이 의도한 핵심적인 표현적 효과이다. 그것은 컴패니 플로 시절의 상대적으로 ‘검소한’ 시도들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났으나, 지금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때의 시도들을 본격적으로 확장하려 한다. “Dead Disnee”에서는 (뉴욕에 대한 알레고리인) 폐허가 된 디즈니랜드를 방문하는 ‘묵시적’ 가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청자를 공격하는 복잡한 비트와 노이즈가 사방에서 튀어나오며, 피칠갑을 한 미키마우스가 흥얼거리는 듯한 “dead disnee”라는 코러스가 계속해서 울려퍼진다. 록 기타의 리프를 갖다 쓴 “Truancy”,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Stepfather Factory”에서부터 친숙한 해먼드 오르간 소리가 곡을 받쳐주는 (또한 일말의 그루브를 감지할 수 있는) “Constellation Funk”와 듣느라 수고했으니 이젠 쉬라는 듯 ‘가족애’를 내세우며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마무리짓는 “Blood”까지, 그는 여기서 남김없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한다.

문제는 그 과시가 지나치다는 데 있다. 게스트로 초대된 데프 젹스의 래퍼들 – 이솝 록, 카니발 옥스의 배스트 에어, 미스터 리프 등 – 은 언제나 그렇듯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실험에 도취된 엘피의 사운드는 종종 그들의 매력적인 랩 스킬을 삼켜버리며, 더하여 (뜬금없는 섹스 랩인 “Dr. Hellno And The Praying Mantus”는 예외로 하더라도) ‘가족과 도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그의 의도마저 묻어버린다. 70분이 넘게 계속되는 엇박의 비트와 일그러진 노이즈는 완급에 대한 고려 없이 내내 청자를 압박한다. 그래서 그 축조 방식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듣기 버거우며, 다 듣고 나면 분노에 찬 외침과 형태없는 소리의 잔상만이 남는다. ‘한 곡 짜리 프로그레시브 록의 힙합 버전’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얼터너티브 힙합’이라는 매체(특히 백인 매체)의 평가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새롭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소리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음반은 실제로 흑인 청중에게는 거의 버림받지 않았던가.

분명 이 음반의 소리들은 독특하다. 텍스처는 정밀하며, 움직임은 거침없다. 현재의 음악 씬에서 나올 수 있는 첨단의 소리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배치되고 터지는 광경은 볼만하다. 그는 분명 초현실적인 음의 세계를 창조했으며, 그것은 외지의 한 평자에게는 “슬라이 스톤과 스톡하우젠이 만나도 못 만들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그는 힙합의 생동감을 제물로 바친듯 하며, 살기등등한 가사를 노이즈의 덤불 속에 매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대가로 얻은 소리조차도 영원성을 보장받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는 음악의 숲에서 나무를 모아온 다음 그것으로 제단을 지어 ‘미래의 힙합에 바친다’는 문구를 새긴 뒤 거기에 화려하게 불을 놓았다. 그 재 속에서 나온 것이 과연 불사조인지 새까맣게 탄 통닭인지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들으며 판단해보고 싶어도 음반이 너무 길다. 이 글만큼이나, 도시의 삶만큼이나. 20030329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7/10

수록곡
1. Fantastic Damage
2. Squeegee Man Shooting
3. Deep Space 9mm
4. Tuned Mass Damper
5. Dead Disnee
6. Delorean
7. Truancy
8. The Nang, The Front, The Bush And The Shit
9. Accidents Don’t Happen
10. Stepfather Factory
11. T.O.J.
12. Dr. Hellno And The Praying Mantus
13. Lazerfaces’ Warning
14. Innocent Leader
15. Constellation Funk
16. Blood

관련 글
컴퍼니 플로(Company Flow) vs. 데프 젹스(Def Jux)
Cannibal Ox [The Cold Vein] 리뷰 – vol.5/no.8 [20030416]
Aesop Rock [Labor Days] 리뷰 – vol.5/no.8 [20030416]
El-P [Fantastic Damage] 리뷰 – vol.5/no.8 [20030416]
RJD2 [Deadringer] 리뷰 – vol.5/no.8 [20030416]
Mr. Lif [I Phantom] 리뷰 – vol.5/no.8 [20030416]
Company Flow [Funcrusher Plus] 리뷰 – vol.3/no.9 [20010501]

관련 사이트
Definitive Jux 레이블 혹은 패거리의 공식 페이지
http://www.definitiveju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