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27104519-0508aesopAesop Rock – Labor Days – Definitive Jux, 2001

 

 

따스하고 경쾌한 지성

US Line의 본문 글에서 잠시 언급된 것이지만, ‘지적이고 추상적인’ 힙합을 하는 뮤지션들에게 흑인들이 ‘백팩커(backpacker, 등에 가방을 멘 대학생 샌님)’라며 은은한 경멸을 표하는 데 부화뇌동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상당수의 백인 미디어에서 이 백팩커들을 힙합의 대안으로 부각하는 현상이 ‘음악 정치학적’ 관점에서 껄끄럽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렇다. 어쨌든 이들은 거리의 진실을 보여준다며 샘플 몇 개와 경쟁자에 대한 디스(diss), 그리고 ‘suck, dick, bitch’를 자산으로 자기증식하는 엠씨들도 아니고, 윌 스미스(Will Smith)나 피 디디(P. Diddy)처럼 뮤직비디오용 힙합 레코드를 만들지도 않는 것이다. 허나 ‘젠체’하는 것도 정도 문제이다. [Labor Days]와 같은 음반을 듣다 보면 솔직히 그런 생각이 좀 든다.

음반의 기본적인 사운드 제작 방식은 비트의 볼륨을 가급적 줄이면서(다만 그 날카로움과 견고함은 살려둔 채) 그로 인해 남는 공간에 가볍고 풍부한 사운드를 채워 넣는 것이다 ― 저 멀리서 ‘울어 예는(cooing)’ 여성보컬, 현악기의 스타카토, 플롯을 비롯한 목관악기, 베이스와 첼로, 스페인 풍의 기타 탄주(彈奏), 엷은 신서 효과음, 가벼운 스크래치, 오르골 등이 그 자리에 사뿐히 내려앉는데, 더하여 이솝 록의 매끈한 랩이 그 위를 지나간다. 때로는 “The Tugboat Complex Pt.3″처럼 ‘이국적인’ 코러스가 추가된다. 그리하여 데프 젹스의 다른 뮤지션들에 비해 비교적 따뜻하고 ‘전원적’인 소리가 탄생하며, 특히 엘피의 싸늘하고 도시적인 사운드와는 일종의 극에 위치한다. 설사 첫곡 “Labor”의 신서사이저 효과음에서 엘피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Save Yourself”를 이들의 방법론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곡이라 불러도 큰 무리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솝 록의 래핑은 카니발 옥스의 보둘 메길라처럼 기기묘묘하게 꼬이는 라이밍을 선호하며(“Battery”의 “And the vehicle is grandeur and it veered over the medium / The second my halo ran outta helium” 같은 부분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분명한 발음으로 신속하게 쏟아냄으로써 비트의 상대적인 부재로 생기는 그루브의 공백을 메꾼다. 이를테면 “No Regrets”의 중독성 강한 후렴구인 “1 2 3, That’s the speed of the seed / A B C, That’s the speed of the need / You can dream a little dream / Or you can live a little dream / I’d rather live it / Cuz dreamers always chase / But never get it”이 주는 그루브감은 막강하며,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솝 록의 랩이 흥미로운 점은 언어 유희에 능하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그 가사가 갖고 있는 ‘지적’인 면에 있다. 신화와 성서, 역사에서 취한 소재를 자유자재로 끌어들이며, 그는 직접적이라기보다는 (지적인 방식이 흔히 그렇듯) 간접적으로 힙합에 대해 논하는데, “Daylight”에서는 Life’s not a bitch life is a beautiful woman / Your only call her a bitch because she won’t let you get that pussy”라 읊으면서 힙합퍼들의 ‘비치’에 대한 경멸에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이는 동시에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담고 있기도 한 바, 그러한 관점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을 옥죄고 있는 환경에 굴하지 말고 존엄성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설파하는 “9-5ers Anthem”에서 절정에 달한다. ‘possible’과 ‘conceivable’을 반복하는 “Flashflood”는 또 어떤가. 더불어 종종 보이는 알쏭달쏭한 가사(“One Brick”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나는 벽돌 하나로 내 도시를 짓기 시작했지 / 그리고 또 벽돌 하나를 쌓았어 /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며 나는 타락한 천사들을 위한 집을 짓지 / 허나 난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냐, 이건 그저 게임이 진행되는 방식일 뿐”)들과 우화적인 내러티브(예술에 평생을 바친 슬럼가의 소녀를 찬미하는 “No Regrets”) 구사는 그의 가사를 추상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그런 연유로 누군가 이 음반을 ‘추상힙합’이라 부른다면 말릴 이유도 없겠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백팩커들의 말놀음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음반에 대개의 힙합 레코드에서 듣게 되는 살벌함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반의 서정성을 강조하자니 나스(Nas)의 [Illmatic](1994)과 같은 탁월한 작품이 떠올라 섣불리 손을 들기도 어렵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음반을 계속해서 돌려 듣고 있는 중이다. 힙합의 본토에서 벗어나 있는 청자에게, 이 음반은 매력적인 플로우와 라임을 가진 랩, 그리고 명쾌하고 산뜻한 그루브로 가득한 좋은 음반이다. 힙합의 ‘정치적 잠재력’이나 ‘패싸움의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하는 이라면 높이 사기가 어렵겠지만 듣고 즐기는 데 만족할 수 있는 청자라면 무척 흥미로운 음반이 될 것이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개인적으로 “9-5ers Anthem”에서 계속 들리는 구절인 “We are the American working population”이 계속 귀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 이건 이솝 록이 의도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음반의 소소한 정치적 잠재력 중 하나일 것이다. 20030425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8/10

수록곡
1. Labor
2. Daylight
3. Save Yourself
4. Flashflood
5. No Regrets
6. One Brick
7. The Tugboat Complex, Pt. 3
8. Coma
9. Battery
10. Boombox
11. Bent Life
12. The Yes and the Y’all
13. 9-5ers Anthem
14. Sh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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