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27104210-0508cannibalCannibal Ox  – The Cold Vein – Definitive Jux, 2001

 

 

마침내 힙합을 엿먹이다

‘언디(undie: 언더그라운드 + 인디)’ 힙합 뮤지션은 어쩌면 도박하는 심정으로 음악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들 대부분은 ‘마초’, ‘갱스타’, ‘핌프’의 태도를 거부하는 ‘진지하고 긍정적인’ 태도에 기대기 마련인데, 의외로 싱거운 라임과 분석적인 가사를 취해 청자들을 맥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구태의연한 재즈와 훵크 고전 샘플을 마구잡이로 차용한다면 요즘 기준에선 최악의 힙합 음악으로 ‘찍히기’ 십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난해하고 추상적인 가사와 복합적이고 변칙적인 비트를 택한다면 백인 록 중심의 미디어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받을 순 있겠지만, 한편으로 주류 흑인 음악 담론으로부터 필연적인 소외와 외면을 각오해야 한다. 엘피(El-P)가 이끄는 데피니티브 젹스(Definitive Jux) 패거리는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물론 엘피 본인이나 이솝 록(Aesop Rock), RJD2 등은 이러한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 할렘 출신 흑인 듀오 카니발 옥스(Cannibal Ox)는 사정이 다르다. 흑인 힙합 공동체 탈퇴라는 막대한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에, 아마도 온갖 고민과 갈등 후에야 이들 ‘비흑인’ 뮤지션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으리라.

[The Cold Vein]은 아톰 패거리(Atoms Family) 출신 베스트 에어(Vast Aire)와 보둘 메길라(Vordul Megilah) 듀오로 구성된 카니발 옥스의 데뷔 앨범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엘피의 데피니티브 젹스 레이블에서 발매된 첫 정규 앨범이라는 점이다. 뉴욕 언디 힙합의 전설 컴퍼니 플로(Company Flow)의 해체와 새로운 패거리의 탄생을 동시에 알린 컴필레이션 [Def Jux Presents…](2001)에 뒤이어 발매된 이 앨범은 이후 엘피가 선도하는 ‘파괴적’이고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언디 힙합 프로덕션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는 [URB], [NME], [CMJ], [와이어(Wire)] 같은 영미권 ‘백인’ 음악 잡지들이 쏟아낸 찬사이니, 일방적이고 편중된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더욱이 미국 주류 흑인음악 담론을 주도하는 [소스(the Source)]지의 이 앨범에 대한 혹평을 상기한다면, 오히려 [The Cold Vein]은 힙합 앨범으로서 ‘걸작’이라기보다 ‘문제작’에 가깝다.

실제로 발매 당시 [The Cold Vein]에 담긴 사운드는 상당수의 언더그라운드 힙합 매니아들조차 당황할 정도로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오히려 백인 ‘인디 록’ 키드나 ‘레프트필드(leftfield)’ 일렉트로니카 팬들이 이 앨범에 더욱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운드를 하나씩 뜯어보면 이러한 반응들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The Cold Vein]에는 기본적으로 1980년대 올드 스쿨 일렉트로(electro)에 대한 노골적인 애정이 담겨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엘피는 1980년대 중반 샘플링을 지양하고 드럼머신 비트와 스크래치 중심으로 만든 힙합 사운드를 동경한다. 하지만 반복적이고 단순한 전자 음의 일렉트로 비트는 그의 손을 거치면서 보다 탈 규칙적이고 복합적으로 변모한다. 때론 1990년대 레이브 스타일의 신쓰 리프나 1970년대 하드 록의 소음까지 주저 없이 주입하는데,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비트를 주조하면서 일렉트로 리듬을 난해하게 뒤틀고 그 그루브를 싸늘하게 식힌다는 점이다. 간혹 오테커(Autechre)의 원형적인 IDM 사운드가 연상되는 것은 이런 연유다. 이는 의도적으로 디지털 사운드를 왜곡하고 드럼 프로그래밍을 ‘오용’한다는 점에서 글리치(glitch)를 시도한다고 볼 수도 있다. 결국 [The Cold Vein]을 통해 엘피는 기존 언디 랩의 태도를 진보적인 일렉트로니카와 과감히 수렴하고자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엘피 식의 사운드 프로덕션은 사실 자신의 솔로 앨범 [Fantastic Damage](2002) 이전에 카니발 옥스의 데뷔 앨범에서 이미 완벽하게 정립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The Cold Vein]은 엘피의 솔로 앨범이 아니기에, 엠씨인 카니발 옥스 듀오의 재능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베스트 에어와 보둘 메길라는 엘피가 주조한 ‘위압적인’ 사운드에 그다지 주눅 들지 않는 듯하다. 보둘 메길라는 주로 숨쉴 틈 없이 내뿜는 압운의 라이밍을 선호한다. 가령 “Painkillers”에서 “Stress got my chest a mess/breathless and vexed/trying to escape/from outa the depths of hell’s nest” 같은 대구(對句)는 툭툭 내뱉는 듯한 그의 플로우와 잘 맞아떨어지면서 묘한 그루브를 생성한다. 반면 베스트 에어의 엠씨잉은 “Stress Rap” 같은 트랙에서 잘 드러나듯이 똑똑한 발음을 바탕으로 보다 사색적이고 차분한 편이다. 기본적으로 두 엠씨는 갱스타 랩의 과장법이나 기만을 가차없이 까발리면서, 한편으로 어두운 우화를 통해 사회에서 개인이 처하는 불이익을 토로하고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Iron Galaxy”에서 드러나는 쇠락하는 도시에 대한 잔인한 풍자나, “Painkillers”에서 “I guess that’s why I was born/To recognize the beauty of a rose’s thorn”(“아마도 나는 장미 가시의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와 같은 베스트 에어의 의미심장한 라임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여기에 냉소적인 유머와 언어적 유희를 적절히 가미해 자칫 경직될 수 있는 분위기를 반전하는 재치까지 겸비하고 있다. 가령 “Raspberry Fields”의 전반부에서 베스트 에어는 “The sample’s the flesh and the beat’s the skeleton… I’ll put a hole in your skull and extract the skeleton”이라고 랩을 한 후 동일 단어를 반복하는 실수를 했다고 고백하면서 이 단락 전체를 다시 읊조리는데, 이번에는 두 번째 문장에서 ‘skeleton’을 ‘gelatin’으로 바꾸어 라임을 하는 식이다.

이쯤 되면 엘피가 주조한 밀도 높은 사운드와 두 엠씨의 절묘한 워드 플레이는 그 자체로 각기 탁월함이 분명하다. 그럼 양자간의 조합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아쉽게도 그 성과는 생각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다. 물론 꼼꼼히 따져 듣는다면 사운드 프로덕션과 엠씨잉이 결코 겉도는 것은 아니다. 가령 미래에 대한 암울한 서정시 “Vein”이나 샘플링과 보컬의 조화가 두드러진 “Raspberry Fields”, 근사한 초현실주의 훵크 “Battle For Asgard” 같은 트랙은 듣는 재미가 쏠쏠하며, 다소 힘을 뺀 래핑을 록의 감성과 결합시킨 “Real Earth”나 “A B-Boy’s Alpha”도 만만치 않다. 특히 마지막의 “Pigeon”과 “Scream Phoenix”(히든 트랙) 연작은 압권이다. 카니발 옥스 듀오는 전자의 곡에서 세상의 잡다한 번민들, 고통받는 미물에 대한 얘기를 한 뒤 후자의 곡을 통해 현실의 사슬을 벗어난 자유를 표현하고자 한다. 엘피는 거친 록 기타 음색, 아련한 관악, 불협화음의 코러스, 그리고 서정적인 블루스 기타 루프로 이어지는 치밀한 사운드 프로덕션을 통해 작은 비둘기가 화려한 불사조로 환골탈태하는 광란의 서사시를 완성한다.

하지만, 다수의 탁월한 트랙에도 불구하고, 70여분 이상 쉬지 않고 이 앨범의 엠씨잉과 사운드를 동시에 감상하는 것은 여전히 버거운 게 사실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어느 한쪽을 놓칠 수밖에 없다. 밀도 높은 사운드에 압도될 경우 카니발 옥스의 엠씨잉은 분명 들러리 신세로 전락할 것이고, 반면에 이들 듀오의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단어들에 집중할 경우 엘피가 주조한 음향 세계의 진수를 제대로 만끽하기 힘들 것이다. 이 딜레마는 [The Cold Vein]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 ‘엘피 식’ 프로듀싱 자체의 모순이자 고민거리다. 물론 기존 언디 힙합 사운드와 차별되는 엘피만의 장점이자 개성이라고 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엘피가 [The Cold Vein]과 [Fantastic Damage]의 인스트루멘틀 버전 앨범을 각기 별도로 발매한 것은, 자기 음악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원작에서 엠씨잉과 사운드 프로덕션 양자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한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백에 가깝다. 그렇다면 데피니티브 젹스 레이블은 차후에 이 두 앨범의 ‘아카펠라’ 버전 발매도 고려하고 있을까? 미련한 기대는 금물이다. 그보다는 엘피가 현재의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에는 균형 잡힌 힙합 음악을 만들지, 혹은 아예 대안적인 포스트 힙합을 위해 정진할지를 지켜보는 게 더욱 현명할 듯 하다. 20030403 | 양재영 cocto@hotmail.com

8/10

수록곡
1. Iron Galaxy
2. Ox Out The Cage
3. ATOM (with Alaska and Cryptic of Atoms)
4. A B-Boys Alpha
5. Raspberry Fields
6. Straight Off The D.I.C.
7. Vein
8. The F-Word
9. Stress Rap
10. Battle For Asgard (with L.I.F.E. Long & C-Rayz Walz Of Stronghold)
11. Real Earth
12. Ridiculoid (with El-P)
13. Painkillers
14. Pigeon
15. Scream Phoenix (hidden tr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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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Definitive Jux 레이블 혹은 패거리의 공식 페이지
http://www.definitiveju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