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초기 크라우트 록 개괄 – 현대음악과 전자음악 그리고 탈 경계 정신으로 빚어낸, 예술로서의 급진적 록 음악 ‘크라우트(kraut)’는 독일식 양배추 절임을 뜻한다. 때문에 ‘크라우트 록’이라는 명칭은 우리네의 록 음악 일부를 ‘김치 록’이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크라우트 록은 독일의 록 음악 중에서도 특히 더 ‘독일적’인 록을 지칭한다. 그 ‘독일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전개될 글 속에서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실상 ‘크라우트 록’은 독일의 일부 그룹들이 영국에 진출하는 과정 중 그 곳 청자와 평론가들이 브리티시 록과 구별 짓기 위해 붙인 것이다. 때문에 이는 어떤 형식적 범주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다분히 차별적 의도나 감성적 분류에 근거한다. 따라서 크라우트 록의 특질에 대한 설명은 자연스럽게 영국의 록과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I. 60년대 저먼 언더그라운드 록 씬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마샬 정책 덕택에 일본과 함께 미국의 지원을 가장 전폭적으로 입은 나라에 속한다. 물론 그 이유는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방패막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경제적 지원과 함께 영미 군대의 주둔은 대중문화 유입의 간접적 토대가 되었다. 독일의 라디오에서 로큰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으며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젊은 밴드들의 음악은 영미 그룹들에 대한 모방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그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후 탠저린 드림의 리더가 되는 에드가 프뢰제(Edgar Froese)의 그룹 원(The One)은 롤링 스톤즈를 추종하는 듯한 곡들을 연주했고 심지어 캔(Can)의 홀거 추카이(Holger Czukay)조차도 제트라이너즈(Jetliners)라는 댄스 뮤직 그룹에서 기타와 아코디언을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시 라 템펠(Ash Ra Tempel)의 마누엘 괴트싱(Manuel Gottsching) 또한 블루 버즈(Blue Birds)와 밤 프룹스(The Bomb Proofs)라는 그룹에서 롤링 스톤즈, 비틀즈, 스몰 페이시즈의 곡들을 연주했으며 크림과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에 심취했다. 아몬 뒬 그런데 상황은 60년대 말이 되면서 급변한다. 갑자기 이들이 독창적이고 진지하며 급진적인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방금 언급한 탠저린 드림과 캔 그리고 애시 라 템펠은 물론 아몬 뒬(Amon Duul),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전신 그룹 오르가니자치온(Organisation), 애지테이션 프리(Agitation Free), 클러스터(Kluster), 쏠 캐러밴(Xhol Caravan) 같은 신생 그룹들의 데뷔 앨범은 대중 음악으로 여겨지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했다. 더구나 이들은 블루스 기반의 록 음악이나 비틀즈 류의 팝 음악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동시대 브리티시 록 그룹들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운 록 음악을 모색하긴 했지만 이들이 기존의 록 음악을 중심으로 확장과 변종을 도모한 반면, 앞서 언급된 독일 그룹들의 곡들은 대중음악 속에서 그 뿌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전통과 단절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음악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당시 현대음악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들 역시 자신의 음악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대접 받길 원했지만 독일 그룹들 만큼 노골적이진 않았다. 영국 그룹들에게 있어 창조의 자양분이 된 것이 사이키델릭 문화와 클래식의 전통이었다면 독일 그룹들은 20세기 현대음악과 새롭게 등장한 전자 악기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으며 프리 재즈의 즉흥성과 자유로움에 주목했다. 크라우트 록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사운드 메이킹과 텍스처의 독특함은 바로 이로부터 연유한다. 그리고 이는 브리티시 록과 크라우트 록의 특징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 결정적 요소 중 하나이다. Amon Duul – Phalus Dei 60년대 중반은 그들에게 있어 과도기이자 암중모색의 시기였다. 캔의 리더 홀거 추카이는 1962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로부터 더블 베이스를 사사 받았으며 다름쉬타트에서 칼하인츠 쉬톡하우젠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는 쉬톡하우젠의 아카데믹하고 관념적인 전위음악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상투적인 대중음악 작곡가나 연주인 역시 그가 갈 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추카이가 캔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들어간 것은 로큰롤의 대중 친화성과 현대음악의 예술적 성과를 한 데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후술한다; “나는 고전 음악 연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캔을 결성할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오늘날 나는 이 두 세계 사이에 접점과 연속성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비틀즈이다. 당시 그의 학생이었던 미카엘 카롤리(Michael Karoli, 후에 캔의 기타리스트가 됨)가 ‘I am The Walrus’ 같은 곡을 연주해주며 쉬톡하우젠의 곡보다 훨씬 흥미로운 음악이라며 권한 것. 이는 추카이에게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촉매제 구실을 한다. 결과적으로 캔은 현대음악적 방법론과 전자음향 그리고 팝적인 멜로디를 가미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탠저린 드림 독일 전자음악을 대표하는 탠저린 드림의 결성 당시 이야기도 흥미롭다. 전신 그룹인 원(The One) 시절 에드가 프뢰제에게 새로운 음악에 대한 결정적 영감을 준 이는 바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이다. 달리의 별장에서 연주한 것을 계기로 그와 접할 기회를 얻은 프뢰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것은 나의 음악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말과 생각하는 방식 속에서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나는 그가 그림에서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의 일을 음악 속에서 해내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통속적인 록 그룹에서 벗어나 보다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의 록 음악, 이른바 ‘프리 록’을 지향하는 그룹, 탠저린 드림을 결성한다(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참가했던 드러머가 랜스 햅사시(Lanse Hapsash)라는 점이다. 햅사시는 훗날 햅사시 앤 더 컬러드 코트(Hapsash And The Coloured Coat)를 결성해 사이키델릭 록의 걸작 [Featuring The Human Host & The Heavy Metal Kid]를 만들어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데뷔 앨범 전 탠저린 드림의 음악은 현재 어떠한 형태로도 남아 있지 않아 짐작키 어렵지만, 당시 연주를 지켜 본 이들에 따르면 그들이 다양한 장치와 증폭된 음향 그리고 기타와 건반을 이용한 실험적 사운드를 구사했으며, 요셉 보이스(Josef Beuys), 베른하르트 헤케(Bernhard Hoeke), 존 케이지(John Cage)와 같은 현대 예술가들의 파티에서 연주했다 한다. 몇 차례의 멤버 교체 후 심리학과 작곡을 공부하던 클라우스 슐체(Klaus Schultze) 그리고 슐체와 함께 전자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칠 콘라드 쉬니츨러(Conrad Schnitzler)가 가입한 탠저린 드림의 데뷔 앨범 [Electronic Meditation]이 발표된 것은 1970년이다. 평론가이자 록 음악가인 줄리안 코프(Julian Cope)가 언급한 것처럼 이 음악은 ‘전자적(electronic)’이지도 ‘명상적(meditation)’이지도 않았다. 심하게 말해 오히려 이는 ‘소음과 원시적 타악으로 표출해낸, 고뇌로 가득 찬 음악’이다. 그들은 음향 효과와 조작을 통해 소리를 시각적 이미지로 환원시킨다. 우리는 본 작에서 공간감과 명암의 대비를 느낄 수 있다. 달리가 붓으로 묘사한 초현실 세계를 그는 효과음과 타악기 그리고 증폭된 기타음으로 재현한 것이다. Tangerine Dream – Genesis 프리 재즈의 즉흥성과 야수성에 사이키델릭적 요소를 결합한, ‘전위 헤비 록 사운드’의 주역 구루구루(Guru Guru)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룹의 중추인 드러머 마니 노이마이어(Mani Neumeier)는 캔의 야키 리베차이트(Jaki Liebezeit)와 마찬가지로 프리 재즈 드러머로 활동했으며 이는 구루구루 음악의 즉흥성 그리고 치밀함과 연관되어 있다. 크라우트 록 그룹 중 구루구루와 가장 유사한 음악을 지향한 것은 아몬 듈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던 라이너 바우어(Rainer Bauer), 페터 레오폴트(Peter Leopold), 울리히 레오폴트(Ullrich Leopold)가 1967년 결성한 정치적 그룹 아몬 듈의 1969년 첫 앨범 [Psychedelic Underground]는 탠저린 드림의 [Electronic Meditation], 애시 라 템펠의 [Ash Ra Tempel] 그리고 구루구루의 [UFO]와 함께 초기 크라우트 록의 원형으로 꼽힌다. II. ‘우리 시대의 전자음악’ 음원 그 자체에 비중을 두고 그것을 다시 짜맞추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48년이다. 바로 파리의 한 방송국에서 피에르 쉐퍼(Pierre Schaeffer)라는 작곡가가 악보가 아니라 테이프에 담긴 작품을 선보인 것. 이것을 ‘구체음악(Musique Concrete)’이라 부른 것은 악보 상의 기호를 통해 ‘추상적’이고 ‘간접적’으로 음악을 기록한 기존 방식과 대비하기 위함이다(이후 영미권에선 이를 테이프 음악(Tape Music)이라 일컬었다). 구체음악의 의의는 음원의 확장과 변형 가능성에 있다. 의미 없는 일상의 소리가 아닌, 악기라는 정형화된 도구와 일정의 규칙을 통해 오락으로서, 종교로서, 윤리로서, 교육으로서 그리고 감정의 표현으로서 발전해온 음악사에 있어, 전기 도구인 테이프 리코더는 효과적 대안이자 현대 사상에 대한 전위로서의 예술을 가능케 할 하나의 돌파구였다. 테이프 리코더는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채취할 수 있었으며, 재생 속도의 변환이나 특정 부분의 반복 과 같은 인위적 조작을 통해 다양한 효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구체음악은 전자 장치를 통해 새로운 음향을 창출한다는 의미로서의 ‘전자음악’은 아니었지만, 통상적 악기 연주 대신 도구를 이용한 변형된 소리라는 점에서 이후 등장할 본격적인 전자음악의 방법적 토대가 된다. 이러한 짜집기 방법이 록 음악 속에서 가장 거친 형태로 드러난 예는 아몬 듈의 데뷔 앨범 [Psychedelic Underground]이다. 반복되는 찌그러진 기타음, 그 속에 아무 연관성 없이 삽입된 채집 음향은 얼기설기 얽혀진 조악한 콜라쥐를 연상케 한다. 이후 이 같은 방식은 노이!(Neu!) 같은 일군의 일렉트로닉스 그룹에 의해 보다 세련된 형태로 계승된다. 발진된 전기 신호를 가공하고 합성하는, 본격적인 ‘전자 악기’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초반이다. 허버트 벨라(Herbert Belar)와 해리 올슨(Harry Olsen)이 만든 RCA 신서사이저 마크 II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헝가리 작곡가 리게티(Gyorgy Ligeti)는 전통적인 악기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소리와 전자 악기로부터 발생되는 소리를 이용한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시도는 학술적 실험의 테두리 안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1964년 상업용 신서사이저가 시판되고 로버트 무그(Robert Moog) 박사에 의해 ‘무그 신서사이저’가 개발되면서 록과 같은 대중음악에도 전자 악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다. 영국 그룹의 키보드 주자들, 특히 키스 에머슨이나 릭 웨이크먼이 신서사이저 같은 전자 악기를 기존의 피아노나 오르간 등 건반 악기와 별 다를 바 없이 사용했음에 반해, 독일 그룹들은 연주 자체보다는 이를 통해 새로운 음향을 뽑아내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기존 악기의 소리를 재현하거나 보다 화려한 연주 기교를 보여주기보다는 그 반(反)자연적인 기계음을 오히려 부각시켰으며, 반복되는 리듬과 미세한 변화음으로 전통 악기나 방법론으로 얻어내지 못한, 새로운 음악 영역을 개척한다. 그 대표적인 그룹이 바로 크라프트베르크, 클러스터, 노이!이다. 이들에 비한다면 클라우스 슐체나 에드가 프뢰제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고전적 방법론에 여전히 의존한 편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은 노이!의 음악이다. 전자 악기보다는 오히려 기타와 드럼이 더 두드러지는 음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긴 예의 반복 비트와 미세한 변화 그리고 자유로운 소리의 조합은 오히려 슐체나 프뢰제의 순수 전자음악보다도 더 ‘기계적’이다. 이 같은 스타일은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다. 그들은 ‘단순함 속의 점증적이고 미묘한 변화’에 기반한 비트와 효과음으로 기존의 어떤 음악보다도 더 치밀한 인상주의적 묘사를 가능케 했으며, 기계 문명 속에서의 ‘인간’을 역설적 방법을 통해 환기하고 대비시킨다. 이들 독일 전자음악 그룹들은 전자 악기의 채용과 테이프 조작 등 현대음악의 방법론과 실험 정신으로부터 영향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술적 형식주의에 함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쇤베르크 학파의 수학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에 비해 인간의 지각과 감성을 그 상위에 올려 놓는, 또 다른 ‘인간 중심적’ 음악 미학을 제시한다. 요컨대 그들은 이 무미건조한 악기로부터 ‘새로운 감성의 매혹’을 이끌어낸다. 그 매혹은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육체적’, 아니, ‘몸적’이다. 브라이언 이노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의 음악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전자음악(electronic music of our time)’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III. 현대 예술로서의 록 음악 애시 라 템펠 초기 크라우트 록의 즉흥적 전기 기타 사운드와 원시적 타악음은 기계 문명에 역행하는 원초적인 그 무엇을 느끼게 한다. 이성주의 철학의 전통을 지닌 독일의 음악치고는 의외의 것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독일인은 두 차례의 대전 후 그 이성과 합리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집단적 광기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뼈저리게 경험한 국민이기도 하다. 문명에 대한 반성, 미국 문화의 주입, 타 문화에 대해 관심과 전위 예술에 대한 일반의 호응은 60년대 말 독일 젊은이들이 서양의 전통적 문화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대중예술을 만들어 내는 데 복합적으로 기여한다. 앞서 60년대 중반 독일 대중음악이 그저 영미의 모방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의 진보적 예술 문화 속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수 많은 전위적 록 그룹들이 동시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영미의 아티스트에 비해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더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탠저린 드림, 애시 라 템펠, 오르가니자치온, 파우스트 그리고 아몬 듈과 캔의 데뷔 앨범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대중음악’의 범주라기 보다는 하나의 ‘진지한’ 예술에 가깝다. 우리는 전통적인 로큰롤과 팝 음악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소리에의 탐닉과 상투성으로부터의 극단적 일탈을 느낄 수 있다. 이는 통상적 선율과 비트로부터의 일탈 그리고 팝과 로큰롤의 ‘달큰함’에 대한 거부이다. 이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MC5, 프랭크 자파와 같은 미국의 개러지, 실험파들의 의도와 일맥상통하며 현재의 젊은 록 아티스트들에게 여전히 영감의 원천을 제공한다. 파우스트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뷔메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그들의 데뷔 앨범은 노이즈와 전기 파열음으로 가득하며 곡의 흐름은 일반적 예상을 거스른다. 파우스트가 서양 음악의 한 극단적 형태라면, 아킴 라히켈(Achim Reichel)의 AR과 엠브리오(Embryo)는 중동과 인도 음악을 자신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혼융한다는 점에서 하이브리드를 지향한다. 크라우트 록은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나 예스 그리고 킹 크림즌 같은 영국 수퍼 그룹들이 제시한, 정교하고 견고한 음악적 구조로부터 동떨어져 있으며, 연주인들은 장인적 기예나 초절기교에 별 관심이 없거나 아예 위악적이다. 크라우트 록은 연주의 미학보다는 작곡의 미학을 지향하지만 작곡에서의 구조적 형식미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이들의 사운드는 흐트러져 있거나(아몬 듈의 초기 작품) 극단적으로 단순한 멜로디와 비트(라 뒤셀도르프, 노이!, 클러스터, 크라프트베르크)를 들려준다. 하지만 흐트러진 소리는 수용자의 머리 속에서 어느덧 꼼꼼히 재조합 되고, 단순함은 미묘한 변화 속에서 만화경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청자의 머리 속에 그려낸다. 지각과 의식의 흐름에 절묘하게 튜닝된 사운드와 비트의 앙상블, 바로 크라우트 록의 독특함과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국이 팝과 트래디셔널 포크, 이태리가 칸초네, 프랑스가 샹송, 미국이 블루스와 재즈의 전통 속에서 록 음악을 만들어 냈음에 반해 크라우트 록은 이러한 자국의 대중음악 전통으로부터 비교적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존 개념과 방법에의 도전을 주된 슬로건으로 내세운 20세기 현대 미학과 크라우트 록 음악 사이에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030409 | 전정기 sirio2222@hanmail.net 부연 설명 마이너 레이블들 독일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새로운 록 음악을 선보이며 크라우트 록 씬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던 현실적 토대는 바로 오르(Ohr), 필츠(Pilz), 코스미세 무지크(Kosmische Musik), 브레인(Brain) 같은 마이너 레이블이다. 오르와 필츠 레이블은 랄프 울리히 카이저(Ralf-Ulrich Kaiser)가 운영한 제작사 오르-필츠 프로덕션에서부터 출발한다. 오르-필츠 프로덕션은 1968년 에센 인터내셔널 록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 이 때 초청된 프랭크 자파와 같은 샌프란시스코 출신 뮤지션들은 독일 언더그라운드 그룹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특히 프랭크 자파의 영향은 이후 파우스트(Faust), 쏠 캐러반(Xhol Caravan), 플로 드 콜롱(Floh De Cologne) 같은 그룹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카이저는 이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작품을 발매할 레이블 ‘오르’를 설립한다. 오르는 탠저린 드림, 엠브리오, 구루구루, 애시 라 템펠, 플로 드 콜롱 같이 크라우트 록 중에서도 특히 독일적인 그룹들의 앨범을 제작했다. 필츠 레이블은 원래 오르와는 별도로 위르겐 쉬마이서(Jurgen Schmeisser)가 운영했으나 1972년부터 카이저에게 운영권이 넘어간다. 필츠 역시 한 장도 빼놓을 수 없는 총 19 장의 크라우트 록 명반을 남겼는데, 오르에 비한다면 사이키-포크 성향이 강하다. 특히 저먼 포크 록의 3대 명반으로 꼽히는 횔더린(Holderin)의 [Holderin’s Traum], 엠티디(Emtidi)의 [Saat], 브뢰셀마쉬네(Broselmaschine)의 [Broselmaschine]가 모두 필츠를 통해 발매되었다. 코스미세 무지크는 원래 역시 카이저에 의해 1972년에 설립된 코스미세 쿠리에르(Kosmische Kurierre) 레이블로 출발했다. 1973년 코스미세 무지크로 개명한 후 레이블은 전자음악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스페이스 뮤직’을 주로 선보였는데 탠저린 드림 출신의 전자음악가 클라우스 슐체(Klaus Schultze), 발렌쉬타인(Wallenstein)의 건반 주자 위르겐 도라제(Jurgen Dollase), 애시 라 템펠의 기타리스트 마뉘엘 괴트싱(Manuel Gottsching), 베이스 주자 하르트무트 엔케(Hartmut Enke) 등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그룹의 1974년 연작 [Galatic Supermarket], [Sci Fi Party], [Gilles Zeitschiff], [Planeten Sit In]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가장 많은 수의 저먼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 앨범을 제작한 레이블은 단연 브레인이다. 메트로노메(Metronome)의 산하 레이블로 설립된 브레인은 스콜피온즈(Scorpions)의 데뷔 앨범, 노이!의 전작, 클라우스 슐체의 초 중반기 앨범, 노발리스(Novalis)와 구루구루의 앨범 등 총 58매의 오리지널 크라우트 록 앨범과 영국 그룹 스파이로자이라(Spirogyra), 칸(Khan), 애토믹 루스터(Atomic Rooster), 캐러반(Caravan), 그린슬레이드(Greenslade), 핀란드 그룹인 타사발란 프레지덴티(Tasavallan Presidentti)와 동 그룹의 기타리스트 유카 톨로넨(Jukka Tolonen), 폴란드 그룹 로코모티브 GT(Locomotive GT) 등 외국 아티스트 앨범 총 24매를 발매하며 대중적 호응을 얻어냈다. 지역적 특성 베를린: 냉전 시대에 있어 베를린은 가장 독특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구 동독에 위치한 이 전전 시대 독일의 수도는 1961년 이후 동서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서독의 사람들은 이 곳에 다다르기 위해 동독의 고속도로를 통과해야만 했다. 60년대 말 서 베를린은 새로운 예술의 창조적 에너지로 가득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이 곳 출신 록 그룹들은 영미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비트 그룹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새롭게 대두된 전자악기의 효용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에스닉한 감성을 주입했는데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 애시 라 템펠(Ash Ra Tempel), 애지테이션 프리(Agitation Free)가 바로 베를린을 대표하는 그룹들이다. 뮌헨: 독일 남부에 위치한 뮌헨은 유럽에서도 재즈 음악이 가장 융성했던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몬 듈(Amon Duul), 엠브리오(Embryo), 포폴 부(Popol Vuh)로 대표되는 뮌헨의 록 그룹들은 재즈보다는 히피 문화와 중동 음악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물론 엠브리오의 경우는 재즈에도 많은 점을 빚지고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아몬 듈의 초기 네 작품 [Psychedelic Underground], [Collapssing : Singvogel Ruckwarts & Co.], [Paradieswartz Duul], [Disaster]에 담긴 곡들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연상케 하는 미니멀한 비트와 원시성 그리고 명상적인 요소들이 한 데 어우러지거나 교차하는 음악이다. 아몬 듈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아몬 듈 츠바이(Amon Duul II)의 데뷔 앨범 [Phallus Dei]는 이 같이 단순하고도 혼란스러운 음악에 짜임새와 역동성을 부여한 크라우트 록의 걸작이다. 뒤셀도르프: 뒤셀도르프는 산업 도시로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이른바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의 전자음악이 비교적 융성했다. 노이!, 라 뒤셀도르프, 크라프트베르크가 뒤셀도르프 출신이며 이들은 베를린 출신 그룹들, 예컨대 클러스트와 교류하곤 했다. 뒤셀도르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콜롱(Cologne)은 그룹 캔의 본거지이며 전위 음악과 실험적 재즈 음악 그룹들의 활약했던 도시이다. 또한 프랭크 자파로부터 영향 받았으며 정치적 그룹으로 분류되는 플로 드 콜롱(Floe De Cologne),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스타일의 키보드 록을 구사한 버스 컨트롤(Birth Control), 트리움비라트(Triumvirat) 역시 뒤셀도르프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다. 함부르크: 함부르크는 영국의 리버풀과 마찬가지로 항구 도시이며 비틀즈가 결성 초기에 이곳의 클럽에서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함부르크 출신 그룹들이 로큰롤과 팝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셀도르프나 뮌헨처럼 강한 지방색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 출신 그룹들은 크라우트 록의 여러 형태를 선보였다. 낭만적인 심포닉 록의 노발리스(Novalis), 에스닉한 사이키델릭 음악을 들려준 투모로우스 기프트(Tomorrow’s Gift)와 AR, 하드 록의 루시퍼즈 프렌드(Lucifer’s Friend), 프럼피(Frumpy), 슬랩 해피(Slapp Happy)의 다그마르 크라우제(Dagmar Krause)가 재적했던 보컬 그룹 시티 프리처스(City Preachers)가 함부르크 출신이다. 관련 글 Intro: 초기 크라우트 록 개괄 – vol.5/no.7 [20030401] Ash Ra Tempel [Ash Ra Tempel] 리뷰 – vol.5/no.10 [20030516] Guru Guru [UFO] / [Hinten] 리뷰 – vol.5/no.10 [20030516] Amon Duul [Phalus Dei] 리뷰 – vol.5/no.10 [20030516] Can [Monster Movie] 리뷰 – vol.5/no.11 [20030601] Kraftwerk [1] 리뷰 – vol.5/no.11 [20030601] Tangerine Dream [Atem] 리뷰 – vol.5/no.11 [20030601] Embryo [Opal] 리뷰 – vol.5/no.11 [2003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