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모된 재능 3년 여 만에 컴백한 플라시보(Placebo)의 [Sleeping With Ghosts](2003)는, 화장을 지워버린 브라이언 몰코(Brian Molko: 보컬)의 얼굴만큼이나 초라하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의외의 연주곡 “Bulletproof Cupid”는 강렬한 자극을 안기며 이들의 신보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지만, 안타깝게도 앨범 전체를 통해 그 이상의 흥분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각각의 수록곡들이 더 이상 뒤돌아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형편없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English Summer Rain”과 “This Picture”는 플라시보의 주특기라 할, 절박한 듯 느슨한 기타 리프와 성긴 비음의 보컬이 결합된 뒤틀린 감상을 제공하지만, 전자는 “Pure Mourning”([Without You I’m Nothing](1998))이, 후자는 “You Don’t Care About Us”(동 앨범 수록)가 떠오르는 것을 막기 힘들다. 디제이 섀도(DJ Shadow)와 뷰욕(Bjork)등의 음반을 작업했던 짐 애비스(Jim Abbiss)를 프로듀서로 맞이하여 작업한 [Sleeping With Ghosts]는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친(親)-일렉트로닉 성향을 띄지는 않는다. 오히려 음반이 이전의 작업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은 좀 더 중저음에 집중했다는 브라이언 몰코의 보컬 톤과, 찌르기보다는 자르는 듯한 기타 사운드에 있는데, 이러한 사운드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플라시보의 음악에서 ‘공격성’을 제거하는 사태를 낳았다. “The Bitter End”와 “Plasticine” 같은 소란스런 넘버들도 어딘가 나태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은, 플라시보의 사운드가 벌써 매너리즘에 봉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례로 “Special Needs”에서 드러나는 무기력하면서도 매혹적인 사운드 메이킹은 ‘정말로 로맨틱한 곡을 만들고 싶었다’는 밴드의 소망이 가장 긍정적으로 구체화된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늘어지는 음반 안에서는 이 곡조차도 돌출되는 부분을 만드는 데 실패한 듯하다. 문제는, 어느덧 데뷔 7년이 지난 플라시보가 더 이상 브라이언 몰코의 도착적인 섹슈얼리티만으로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는 없다는 데에 있다. 이미 (실패한) 전작 [Black Market Music](2000)부터 브라이언 몰코에 대한 시선은 신비롭다기보다는 조롱 조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긍정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없는 밴드로서는 어떻게든 그런 것을 떠나서도 자신들이 흥미로울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음악’ 만으로 검증 받아야 하는 첫 관문에서 플라시보는 너무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쿨라 셰이커(Kula Shaker)나 맨선(Mansun) 등과 함께 포스트-브릿팝(post-BritPop)의 일원으로 분류되던 플라시보가 다른 두 밴드의 후속작이 데뷔작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Without You I’m Nothing]을 발매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움켜쥔 것은, 이들이 단지 시기를 잘 만나서 그랬다는 식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무언가를 가진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플라시보의 재능은 어느덧 세련됨을 가장한 평범함 속에 그 예리한 맛을 잃어버린 듯하고, 현실은 이들에게 단 한번의 실수(실패)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연 플라시보가 [Sleeping With Ghosts]의 실패를 딛고 재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모든 것을 세상 앞에 내어놓은 것만 같다. 20030331 | 김태서 uralalah@paran.com 4/10 수록곡 1. Bulletproof Cupid 2. English Summer Rain 3. This Picture 4. Sleeping With Ghosts 5. The Bitter End 6. Something Rotten 7. Plasticine 8. Special Needs 9. I’ll Be Yours 10. Second Sight 11. Protect Me From What I Want 12. Centrefolds 관련 글 Placebo [Without You I’m Nothing] 리뷰 – vol.2/no.22 [20001116] Placebo [Black Market Music] 리뷰 – vol.2/no.20 [20001016] 관련 사이트 플라시보 공식 사이트 www.placeboworld.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