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The Breeze) – The Breeze – 아디드림미디어/대영AV, 2002 공허한 분노를 쏟아놓는 변방의 사이비 그런지 ‘포스트 그런지(post-grunge)’라는 신종 장르명은 정체불명일뿐더러 매우 상업적인 냄새를 풍긴다. 크리드(Creed), 니클벡(Nickelback) 등이 구사하는 둔중한 사운드는 1990년대 초 그런지 록(grunge rock)의 에토스와 독창성을 계승하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며 다소 거칠게 말해 그런지의 남은 단물을 빨아먹는 ‘사이비 그런지(pseudo grunge)’에 가깝다. 이토록 무딘 리프와 공허한 절규를 고집하면서도 모던록 챠트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주류 록 시장의 스타 밴드 결핍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내 록 필드에도 이렇게 구린 간판을 자신 있게 내건 밴드가 나타났다. 그런데, 브리즈(The Breeze)라는 이름의 신예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본토의 포스트 그런지와는 또 다른 변종으로 보인다. 강불새(보컬), 노주환(기타), 제영(베이스), 조한철(드럼), 이렇게 4인조로 구성된 브리즈는 그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스톤 템플 파이럿츠(Stone Temple Pilots)와 컬렉티브 소울(Collective Soul)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으나 정작 그런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앨범은 시끌벅적한 헤비 메탈에서 대중취향의 록 발라드까지 잔뜩 차려놓았을 뿐 젓가락 갈 데가 별로 없는 잔치상 같은 느낌이다. 앨범의 곳곳에는 전혀 그런지하지는 않은 다양한 스타일의 헤비 사운드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첫 곡 “잊지마.Com”과 이어지는 “그냥”에서 들려오는 전형적인 헤비 메탈 리프는 시원스럽지만 지나치게 힘만을 앞세우고 있다. 또한 “Youngster”와 “Babel”과 같은 곡의 전주 부분은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를 참고한 흔적이 역력하며, “Delay”는 보컬 강불새의 비꼬는 듯한 비음과 파괴적이면서도 그루브가 넘치는 기타 리프가 콘(Korn)을 떠올리게 하는 뉴 메탈(new metal) 넘버이다. 그렇다고 브리즈를 금속성 리프만을 고집하는 투박한 헤비 메탈 밴드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앨범에는 “군대간다”와 같이 전자음을 삽입한 발랄한 트랙뿐만 아니라 “넌 어디에”, “I Won’t Cry”, “You Know”, “니가 필요해”, “틈” 등 상업성을 의식한 관습적인 록 발라드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군대간다”는 이들의 곡 해설대로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와 현악 세션을 가미한 미드 템포의 소프트 록 넘버인데, ‘군대 가는 청년’이라는 소재가 상투적이긴 하지만 비교적 담백한 연주와 설득력 있는 가사가 조화를 이룬 곡이다. 첫 번째로 싱글 커트된 “넌 어디에”는 임재범을 의식한 남성적이면서도 감미로운 보컬, 감상적인 가사,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정제된 기타음, 예쁘게 뽑아내는 건반과 스트링 라인 등 통속적인 록 발라드의 요소를 충실히 답습하고 있는 트랙이다(이쯤 되면 포스트 그런지라는 말 따위는 아예 무시하는 것이 좋겠다). “You Know” 역시 첼로 선율까지 삽입되어 애절한 록 발라드의 느낌을 풍기고 있지만, 여기에 ‘니가 뭘 아느냐’라는 식의 시니컬한 가사를 붙여 괴상한 음악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앨범에서 가장 초보적인 냄새를 풍기는 부분은 주로 강불새가 쓴 가사이다. 실체가 모호한 대상에 대해 근거 없는 분노를 토로하고 전의를 다지는 “잊지마.Com”의 가사는 객기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있다. ‘잊지마.com이다 / 나 네게 배워주리 / 힘줄 다 끊겨도 말이야!’와 같은 구절이 담고 있는 비문과 논리비약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다. 이토록 공허한 분노와 전투성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되받는 “그냥”에 이르면 거부감은 실소로 변하게 된다. 더구나 아무 생각 없이 빈둥대는 젊은이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독설을 퍼붓는 “Youngster”의 훈계조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브리즈의 데뷔 앨범은 의욕으로 충만하여 다양한 스타일을 쏟아놓고 있다. 특히 보컬 강불새는 곡들마다 보이스 색채에 변화를 주고 있다. 재능 있는 보컬리스트임에는 틀림없지만 한국 남성 록 보컬의 상징인 임재범, 강산에, 윤도현 등의 창법과 차별성이 없다는 점, 또 몇몇 곡에서는 에디 베더(Eddie Vedder), 레인 스탤리(Layne Staley) 등 외국 그런지 록 보컬리스트들을 노골적으로 참고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무엇보다 브리즈의 첫 번째 앨범이 실망스러운 점은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그 어떤 뚜렷한 개성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포스트 그런지라는 공허한 수사가 무색할 만큼 이들의 사운드는 일관성이 없는 만물상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렇게 난잡한 앨범이 나오게 된 것은 뮤지션들의 의욕과잉도 이유이겠지만 투자가치를 뽑으려는 기획사의 얄팍한 상혼 덕이 크다. 2002년 연말쯤 인터넷 포탈 사이트를 통해 홍보된 ‘포스트 그런지 록의 새바람’이라는 카피문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브리즈가 대중에게 어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포스트 그런지라는 해괴한 간판만으로는 상업적 실패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앨범의 내용은 그저 그런 헤비 메탈과 나긋나긋한 록 발라드를 적당히 섞어두는 방식으로 채워진 것일 테지만. 어쨌든 내용물과 상관없이 해외의 록 트렌드에 편승하려는 솔직하지 못한 방식은 매우 씁쓸한 느낌을 갖게 한다. 화려한 앨범 외장이나 쌈넷에서 제작한 다소 오싹하지만 역시 아무런 감흥과 메시지가 없는 뮤직 비디오도 이를 보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20030330 | 장육 EVOL62@hanmail.net 2/10 수록곡 1. 잊지마.Com 2. 그냥 3. Youngster 4. 넌 어디에 5. 바보야 6. 군대간다 7. Delay 8. I Won’t Cry 9. You Know? 10. 니가 필요해 11. 틈 12. Babel 관련 사이트 The Breeze의 공식 사이트 http://www.thebreez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