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27081358-0506choibyunggul78최병걸 외 – 난 정말 몰랐었네/그 사람 – 신세계(SO 7084), 19780205

 

 

먹고살기 위해 뽕짝을 불러야 했던 골든 보이스

음반이 발표된 1978년의 시점이면 1975년 말의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청년문화, 나아가 대중문화 일반이 훼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대마초 파동으로 가장 쑥밭이 된 분야는 대중음악계이고, 그 외의 분야에서는 타격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로 대표되는 여배우 트로이카가 전성기를 구가한 것이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점을 납득할 수 있다. 한 예로 [겨울여자]가 공전의 흥행을 기록한 시점이 1977년이니 말이다.

표지에 나와 있는 ‘청춘남녀’의 이름은 최병걸과 정소녀다. 요즘으로 치면 강타와 송혜교 정도라고 할까.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정상의 연예인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는 뜻이다. ‘신세계 레코드’라는 레이블과 ‘SO-7084’라는 일련번호도 이 음반이 어떤 인물에 의해 제작되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정보다. 즉, 이 음반은 대마초 파동 이후 음악계에서 청년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 가운데 하나다. 그 주인공은 당연히 최병걸이다.

사실 이 음반은 최병걸의 독집 앨범은 아니다. 직업적 가수가 아니라 탤런트인 정소녀가 두 곡에 듀엣으로 참여했다는 점은 그리 이상할 것 없는 점이지만 표지에 나온 두 인물 외에도 이숙, 유승엽, 이수만 등이 네 트랙을 차지하고 있다(유승엽은 두 트랙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땜빵으로 편집해서 발매한 음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병걸의 ‘불후의 히트곡’인 “난 정말 몰랐었네”가 수록된 음반으로 대중에게 널리 유통된 음반은 이 음반이므로 리뷰의 대상으로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불후의 히트곡’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어느 정도 비아냥을 동반하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이 곡은 이른바 ‘뽕짝 고고’의 대표곡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곡은 김훈, 최헌, 조용필이 선도했던 1976년 말 ~ 1978년 초의 트렌드에 ‘편승’한 곡일 것이다. 게다가 최병걸은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뽕짝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인물이고, 그는 TV나 기타 무대에서 이 곡을 지겹도록 불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룹 사운드 출신의 다른 가수들의 ‘뽕짝 고고’가 자신들의 자작곡이 아니라 기성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최병걸은 이 곡을 직접 작곡했다는 점이다. 물론 작사가는 기성 작사가인 김중순이었지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당시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들었을 때는 ‘최병걸이 가장 뽕짝 같았다’고 느껴졌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들을 때는 최병걸이 가장 뽕짝에서 거리가 멀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키보드 소리가 촌스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건 당시에 뽕짝이 아닌 다른 음반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악곡 형식이 ‘기-승-전-결’의 32마디의 구조로 이루어진 점은 영락없는 뽕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자 이래 뽕짝의 주요 코드였던 애조(哀調)나 비탄조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오동잎”이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경우 단조의 멜로디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일본 음계의 영향을 따질 수도 있지만, 이 곡은 장조의 멜로디라서 여기에도 해당사항이 없다. 부드러우면서도 씩씩한 최병걸 특유의 목소리는 뽕짝의 한 많고 애달픈 정서, 따라서 ‘비탄조’라든가 ‘왜색’이라는 혐의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한 곡을 제외한다면 다른 곡들은 ‘가요’보다는 ‘팝’에 가까운 곡들이다. 특히 뒷면의 타이틀곡인 “그 사람”은 ‘그때 어떻게 이런 노래가 나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완벽한 팝 감성으로 채색되어 있다. 연기가 본업인 정소녀가 이렇게 노래를 잘 할 줄은 몰랐다는 감탄은 메이저 세븐쓰 코드의 야한 느낌으로 시작하는 세련된 작곡과 관악기가 적절히 삽입된 완벽한 편곡에 대한 감탄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플루트를 비롯한 관악기의 대선율도 보컬의 화음과 완벽하게 어울린다(아마도 정성조가 개입했을 것이다). 이 곡은 최병걸이 걸출한 보컬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싱어송라이터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여건만 갖추어졌다면.

다른 곡들에서도 뽕짝과의 거리는 확연하다. 슬로우 록 스타일의 “사랑한다고 말해줘요”(지명길 작사, 김기웅 작곡)는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청춘 드라마’ 주제곡으로 어울릴 만한 곡이고, 번안곡인 “그 마음 하나뿐”은 최병걸이 ‘비지스의 노래를 잘 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준다. 뒷 면에 실린 “모래알”(정성조 작사·작곡)에서 고음의 열창은 가수가 뽕짝의 곡선적인 기교보다는 팝송의 직선적인 표현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건 아무도 모를거야”(정성조 작사·작곡)의 경우, 반박 늦게 나오는 싱코페이션에 이어 2박 3연음으로 마무리하는 후렴은 그때까지 한국 가요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경쾌함을 선사한다. 이상의 곡들은 앞에서 언급한 1970년대 후반의 청춘영화의 삽입되면 딱 어울릴 곡들이고, 실제로 “그건 아무도 모를 거야”는 [성난 능금]이라는 영화에 삽입된 바 있다. (당시 정성조의 왕성한 활동을 고려한다면 영화에 삽입된 곡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지나고 보니 정말 훌륭한 보컬리스트였다”라는 평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시스템이나 환경이 재능을 개화시키지 못하고 소진시켜버렸다는 말은 지극히 타당해도 여러번 반복하면 지루해지는 말이다. 최병걸이 망자(亡者)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음반에 대한 기억이 각별해진다. 주류로의 돌파라든가 대안의 제시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리저리 차이고 채이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재능과 ‘끼’를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20030320 | 신현준 homey@orgio.net

0/10

P.S.
1. 최병걸은 이 음반 이전에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ol. 2](유니버어살, 1971)에 “수지 큐”를 녹음하여 수록했고,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 Vol. 1: 4월과 5월 작품집](오아시스, 1972)에 안혜경과 듀엣으로 “모래 위를 맨발로”를 녹음하여 수록했다.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벌]의 Vol. 3과 Vol. 5에도 몇 트랙이 수록되어 있다. 이 곡들은 대체로 ‘통기타 포크’ 성향이다.
2. 최병걸은 이 음반 이후 서판석이 설립한 프로덕션인 서 프로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1980년대 초반 유명을 달리 한다. 서 프로에는 이정선과 선우혜경이 소속되어 있었다. 참고로 최병걸의 또 하나의 히트곡 “왔다가 그냥 갑니다”는 이정선의 곡이다. 서판석은 최근에는 ‘뽕짝 가수’ 김혜연의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는 후문이 들리고 있다. 이정선은 서판석을 ‘서뽕’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사석에서 말해준 바 있다.

수록곡
Side A
1. 난 정말 몰랐었네 – 최병걸
2.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 최병걸·정소녀
3. 그마음 하나뿐 – 최병걸
4. 슬픔이여 안녕 – 이숙
5. 고향 가는길 / 유승엽
Side B
1. 그 사람 – 최병걸·정소녀
2. 모래알 – 최병걸
3. 아무도 모를꺼야 – 최병걸
4. 다시 만날때까지 – 이수만
5. 슬픈 노래는 싫어요 – 유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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