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27081137-0506choibyunggul80최병걸 – Vol. 3(눈물 같은 비/떠나갈 사람) – 유니버어살(K Apple 891), 19800210

 

 

대중성과 음악성 사이에서

대중성과 음악성은 흔히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할 뿐이다. 굳이 비틀스(The Beatles)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신중현, 산울림, 들국화 등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을 바꿔놓은 거장들은 동시에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가 끊임없이 대립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음악산업 관계자들이 이러한 담론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중성과 음악성을 분리시키는 이유는 시장에서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함이다. 사실 음악성이 높다고 해서 대중이 좋아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대중성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인기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대중성 위주의 음악이란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시장에서 검증된 공식에 의거하여 만든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음악성 위주의 음악도 ‘예술적으로 수준 높은 음악’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영감과 재능에 의존하여 자유롭게 만든 음악’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신중현이나 산울림이나 들국화와 같은 능력을 타고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즉 자신의 음악을 타협하지 않고도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는 소수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대중성과 음악성의 문제가 다시금 고민의 주제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위에서 언급된 거장들의 재능에 미치지 못하는 음악인들에게는 대중성과 음악성이 부득이한 선택의 문제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최병걸 역시 이러한 거장들의 수준에는 다소 못 미치는 음악인이었다. 불후의 명곡 “그 사람”을 남기기는 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만한 수준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그가 처했던 여건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음악적 방향을 확실하게 정립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 탓에 록 음악을 하겠다는 그의 애당초 꿈은 단지 꿈으로만 머물렀고 현실에서는 그저 주변의 요구대로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대중성의 미명에 투항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비록 최고의 뮤지션은 아니었을 지라도 최병걸은 분명 최고의 가수였다. 그는 포크든 록이든 재즈든 트로트든 어떤 음악을 다뤄도 신빙성 있게 표현할 줄 아는 드문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능력은 그에게 언제나 유리하게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연말 10대 가수 가요제에 빠짐 없이 선발되고 잘 나가던 모델을 아내로 맞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삶은 화려했지만 최병걸은 기본적으로 팬이 없는 가수였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자신의 성격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최헌과 달리 최병걸은 노래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자신의 자취를 거의 남기지 않는 가수였다. 그의 이러한 익명성은 본격 트로트 넘버 “난 정말 몰랐었네”와 혁신적인 재즈 터치의 팝 “그 사람”을 동시에 히트시키는 분열적 상황을 가능케 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대중적 스타로서 확실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실패한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최병걸은 그가 부른 노래로서 기억될 뿐 대중의 스타로서는 좀처럼 기억되지 않는다.

비록 ‘3집’으로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1980년에 발표된 이 [Vol. 3(눈물 같은 비/떠나갈 사람)]이 그의 정확한 세 번째 앨범은 아니다. 이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최병걸의 이름으로 발표된 음반은 이보다는 훨씬 더 많다(그 정확한 숫자를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상당수는 이전에 다른 음반들을 통해 발표된 적이 있는 곡들이다. 이 점에서 ‘이 앨범을 통해 아티스트 최병걸의 음악적 발전을 살펴보고…’ 운운하는 것은 한낱 사치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단지 그의 작품집 중에서 이만큼 구성이 잘 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앨범은 나름대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앨범의 특징은 최병걸의 주된 작곡 파트너였던 정성조나 기타 주류 작곡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싱어 송라이터 이정선의 작품을 위주로 선곡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최병걸의 음반으로서는 드물게 이 앨범에 높은 수준과 일관된 음악성을 부여하는 이점으로 작용한다. 최병걸은 여기서 이정선의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판으로 주류 가요에 찌든 목소리의 먼지를 털어내고 오랜만에 음악다운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이미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무렵에 발표된 이 앨범은 불행히도 그의 음악인생에 어떠한 전환점도 되어주지 못했다.

이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의 하나는 편곡이다. 재즈 록의 명 그룹 정성조와 메신저스의 보컬로 활약한 최병걸의 이력은 이 앨범의 재즈적이고 훵키한 사운드에서 그 모습을 완연히 드러낸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사운드의 특성이 그의 악명 높은 트로트 히트곡 “난 정말 몰랐었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는 여기서 훵크를 넘어 록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한 사운드를 구사하는데, 이를 통해 오리지널 버전에 내재된 뽕짝의 느낌은 현저하게 제거되어 버린다. 반면 이 앨범에 재수록된 그의 또 다른 히트곡 “그 사람”은 세련미의 극치였던 원곡에 비해 다소 단조롭고 냉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원래 정소녀와의 혼성 듀엣으로 불려졌던 이 곡은 여기서 최병걸의 오버더빙을 이용한 남성 듀엣 버전으로 바뀌면서 특유의 화려한 색채를 많이 상실한 듯한 느낌이다. 오리지널 버전에 비해 빠른 템포를 채택하고 악기의 편성을 대폭 줄인 이 앨범의 편곡은 듣기에 따라서는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줄만큼 특징이 결여되어 있다. 아마 이 곡들은 우려먹기를 의도한 매니지먼트의 강요로 재수록된 것이 아닐까 보이는데, 최병걸이 이 곡들을 다루는 방식은 그에 대한 통쾌한 보복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물론 망자는 말이 없으니 이것은 단순히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다.

전형적인 트로트 넘버 “난 정말 몰랐었네”가 트로트의 색채를 크게 탈색함에 따라 이 앨범에 수록된 트로트 곡은 윤중호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왔다가 그냥 갑니다”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곡은 트로트와는 전혀 거리가 멀 것 같은 이정선의 작품이다. 작사자가 서판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정선 역시 이 곡을 자의에 의해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왕 만드는 김에 그는 이 곡을 트로트의 모든 클리셰를 집대성해 놓은 키치적 구성물로 만들어 놓았다. 비록 최병걸은 이 곡이 지닌 날카로운 유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성실한 보컬은 이 곡의 감상을 상당히 만족스러운 경험으로 만든다. 이 앨범에서 감지되는 이정선의 존재는 단순한 조력자의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 같은 밤”이나 “사랑의 바람” 등의 편곡은 그가 이광조에게 해준 것과 완전히 똑같고, “노랑나비”는 “구름, 들꽃, 돌, 연인”과 “봄”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정선 식 폴카다. 심지어 “님의 편지” 전주에 나오는 블루지한 기타까지도 이정선의 자취를 확연하게 드리우는 역할을 한다.

이정선의 기여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이 앨범의 진면목은 역시 최병걸의 보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잔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원곡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그의 보컬은 처음에는 다소 뻣뻣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의 실체는 그가 지닌 탁월한 해석력이다. 사실 여기서 이정선의 존재가 이처럼 부각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원곡의 개성을 완벽히 구현해내는 최병걸의 해석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곡의 심장부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그것에 담긴 모든 가능성을 낱낱이 듣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축제 분위기의 “사랑의 바람”에서는 흥겨움의 이면에 존재하는 야릇한 슬픔을 살짝 드러내며 통속적 발라드인 “떠나갈 사람”에서는 신파조 멜로드라마의 차원을 넘어서는 감정의 깊이를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표현해낸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보컬 역량을 마음껏 과시한 것은 메신저스 시절 영화 [어제 내린 비]를 위해 녹음한 “어두운 골목길”과 “오후” 이래 실로 오랜만의 일인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이는 결국 만시지탄일 뿐이었다. “난 정말 몰랐었네”를 통해 트로트 가수로 낙인찍힌 이후 그는 어떠한 노력으로도 그 낙인을 지우지 못했다. 이 앨범 역시 그것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말았다. 고인에게는 안된 말이지만 무분별한 대중성 추구의 대가는 바로 이런 것이다. 20030325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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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Side A
1. 눈물 같은 비
2. 난 정말 몰랐었네
3. 우리 이제 떠나요
4. 사랑의 바람
5. 님의 편지
6. 그 사람
Side B
1. 떠나갈 사람
2. 오늘 같은 밤
3. 왔다가 그냥 갑니다
4. 노랑나비
5. 미소
6.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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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한국 록 음반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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