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26032933-0506review_believe1믿음소망사랑 – 믿음 소망 사랑 신곡집(화랑/뛰어/만남) – 서라벌(SBK 0107/SB 7774), 1982/1988

 

 

‘한국적 록’의 고고학

많은 이들에게 그렇듯이 믿음 소망 사랑(이하 믿소사)은 들국화의 유명세 덕에 소급적으로 내게 알려졌다. 전인권과 최성원의 회고에 의하면 주찬권의 드럼과 최구희의 기타를 발굴하게 된 계기가 어쩌다 우연히 본 믿소사의 연주 모습이었다고 하니, 당시 믿소사란 밴드에는 눈에 번쩍 띌만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들국화 사운드를 구성한 하나의 단초를 찾아내려는 일종의 ‘고고학적 관심’을 갖고 이 음반을 듣는 것도 그다지 나쁜 접근 방식은 아닐 터이다.

고고학이란 말을 꺼낸 김에 믿소사에 얽힌 옛 얘기 몇 가지만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이들이 밴드를 시작한 건 대략 1978년경이라고 하니까 이미 4반세기 전 일이다. 주찬권은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직업 전선에 나서서 신중현을 비롯한 ‘그룹 사운드 1세대’ 음악인들과 같이 활동한 ‘전문 악사’ 출신이다. 최구희를 알게 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고, 나머지 멤버들의 이력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추측된다. 문제의 데뷔 앨범은 신중현의 주선으로 만난 ‘킹박’ 박성배를 통해 1982년 발매되었다. 들국화 이후 주찬권이 밴드 진용과 음반사를 바꿔서 믿소사 2집 [야(夜)](1987)를 발표하자, 킹박은 이에 대한 맞불 작전으로 곡 순서와 표지 사진만 바꿔 이 앨범을 재발매했다. 들국화의 인기가 시들지 않았던 때였으니 꽤나 영리한 속셈이긴 했지만, 우습게도 표지 뒷면의 작곡자 이름에 주찬권이 ‘주창권’으로 오기되어 있으니 의도했던 바를 스스로 갉아먹은 꼴이다. 일단 여기서는 음반을 구할 수 있었던 1988년 재발매반을 기준으로 음악을 들어보기로 한다.

주찬권의 리드 보컬을 들을 수 있는 “뛰어”는 같은 시기 캠퍼스 그룹 사운드나 윤수일 밴드 등이 자주 들고 나왔던 스트레이트 로큰롤이다. 블루스-하드록 기타 리프에, 별로 멋부리지 않는 소박한 보컬이지만 배킹 코러스가 이를 적절히 받쳐준다. 템포가 약간만 빨랐더라면 더 흥겨웠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곡의 짜임새나 완급 조절 면에서는 잘 다져진 노련함을 과시한다. 이런 류의 로큰롤을 연주하는 데 흔히 쓰이는 오버드라이브나 혹은 다른 식으로 기타 음을 찌그러뜨리는 효과가 별로 들리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게 ‘최구희 사운드’의 전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 봄직도 하다. 다른 한편 “만남”은 최성원이 주도했던 동아기획 컴필레이션 [우리 노래 전시회] 시리즈에 집어넣었다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발라드 팝이다. 두왑 풍의 배킹 코러스나, 마치 보컬 하모니를 넣듯이 3도 차이를 두고 같이 진행하는 하는 최구희와 최효남의 기타는 솜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최구희의 작품인 셔플 리듬의 로커빌리 “개척자”는 주찬권의 “뛰어”에 대한 맞장구처럼 들린다. “뛰어”라는 연호가 “달려”로 바뀌었을 뿐, 분위기는 그대로다. 비트가 부등박에서 등박 분할로 바뀌면서 등장하는 기타 이중주는 역시나 별다른 이펙트를 쓰지 않으면서 상쾌한 느낌의 톤을 뽑아낸다. 앞곡과 마찬가지로 베이스 이환규가 보컬을 맡은 “산으로 바다로”는 앞선 두 곡에 이어 로큰롤 3부작의 마지막 편을 장식한다. “허수아비”는 좀더 훵키해지는데, 최구희의 기타 솔로도 벤딩이 가미되면서 블루지한 느낌이 좀더 강해지고, 끝 부분의 트릴 주법 또한 인상적이다. 보컬 면에서 봤을 때 앨범 전체에 걸쳐 편재하는 멤버 전원의 합창이 믿소사 사운드의 한 가지 특징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각 멤버마다 돌아가며 적어도 한두 번씩 리드 보컬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 차례가 최효남에게 넘어온 “어느 봄날”에서는 리드 기타와 리듬 기타의 역할이 주거니 받거니 뒤바뀌면서, 한 쪽이 솔로를 하면 다른 한 쪽은 뮤트를 적절히 건 배킹을 아기자기하게 연주한다. 그리고 주찬권과 이환규의 건실한 리듬 섹션은 이런 약간 느린 스타일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이렇듯 산뜻하게 마무리되는 앞면에 비해 뒷면은 분위기가 사뭇 다른 “화랑”으로 시작되는데, 이 곡은 들국화 2집의 “너랑 나랑”에서나 그 이후 밴드 괴짜들의 음반을 통해 본격화된 최구희의 ‘한국적 록’에 대한 집념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가사가 전달하는 ‘조국을 위해 젊음 바친 화랑의 청년 기백’이란 메시지는, 마지막 군사정권이 들어섰던 게 벌써 10년도 전인 현재 시점에서는 잠이 확 깰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왜 이런 가사가 씌어졌는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즉, 이는 국정 교과서로도 모자라서 만화, TV 드라마, 인형극 등 대중문화의 기제들을 동원하여 삼국시대 청소년 군사조직이었던 화랑도를 소리 높여 칭송했던 박정희 시대의 군국주의적 이상이 남긴 한 흔적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이순신 동상과 마찬가지로.

‘한국적’ 혹은 민족주의적 정서가 종종 극우 군국주의의 상징들과 교차되곤 했던 이 시기의 모순적 상황들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좀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어렵더라도 일단 가사에 대해서는 ‘판단중지’한 상태로 사운드에 접근해 보자. 곡은 4분도 채 안되니까 전혀 길다고 할 수 없지만, 구성 면에서는 기승전결식의 대곡 스타일을 따른다. 즉, 비감 어린 기타 전주와 나직하게 결의를 다지는 듯 노래하는 최구희의 발라드가 전반부를 이루고, 드라이빙감 있게 몰아가는 후반부는 힘이 실린 합창과 기타 솔로가 장엄미를 돋우려 시도한다. 그러나 문제는 주로 후반부에서 발생하는데, 말달리는 화랑의 이미지에는 딥 퍼플(Deep Purple) 류의 빠르면서도 무겁고 강렬한 연주가 어울렸을 법하지만 믿소사의 연주 스타일은 아무래도 그런 곡의 아이디어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기엔 최구희와 최효남의 기타 톤은 지나치게 절제되어 있고, 질풍 같은 속주나 곡예적인 운지를 보여줄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리듬 섹션도 박진감 있는 템포나 액센트를 주는 데 한 발짝 못 미치는 듯한 인상이다. 이런 흠들도 샤우팅에 능한 카리스마적인 리드 보컬이 있었다면 상당 부분 감춰질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화랑”을 지나고 나면 사운드는 한층 가볍고 느긋한 팝으로 흘러간다. “행복 파는 상점”은 셔플 리듬의 흥겨움을 잘 살리고, 앞면의 “뛰어”, “개척자”와 마찬가지로 한 쌍을 이루는 듯한 주찬권의 “추억”과 최구희의 “사진첩”은 코러스를 앞세워 소녀적인 감수성에 호소하려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띤다. 그런 분위기가 점점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에 가까워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밴드의 이름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애초 이 앨범의 지배적 테마가 기독교적 가치보다는 ‘민족 정기’나 호연지기(浩然之氣) 같은 데 있었음은 방금 살펴본 88년판과 달리 “화랑”과 “개척자”를 각각 앞뒷면 첫 곡으로 내세운 82년 초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한 해 앞서 벌어진 관제 문화 축제 ‘국풍 81’이 상징하는 시대 분위기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서두에서 언급한 들국화 사운드와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단서는 주어진 셈이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우선 주찬권과 최구희의 오랜 연주 경력과 전문적인 테크닉은 초창기부터 들국화가 막 데뷔한 밴드답지 않게 잘 갈고 닦인 연주력을 과시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리라 짐작된다. 주찬권의 안정감있는 드럼과 최구희의 명징한 기타 톤은 특히 전인권의 거친 야성미에 어느 정도 고삐를 거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또한 음악사적으로 볼 때 이들은 신중현으로 대표되는 ‘그룹 사운드 1세대’와 들국화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고리 노릇을 한다. 마지막으로 “화랑” 전반부의 가야금을 흉내낸 기타 연주가 “너랑 나랑”에서 좀더 발전된 모습으로 재연되는 것처럼, 믿소사에서 시작한 최구희의 ‘한국적 록’에 대한 희구는 들국화 2집을 거쳐 괴짜들에 이르러 하나의 순환을 마무리한다. 20020317 | 김필호 antoedipe@hanmail.net

7/10

수록곡
1988년 재발매반
Side A
1. 뛰어
2. 만남
3. 개척자
4. 산으로 바다로
5. 허수아비
6. 어느 봄날
7. 공군가 (건전가요)
Side B
1. 화랑
2. 행복파는 상점
3. 추억
4. 사진첩
5. 누굴까
6. 오 그대여

1982년 발매반
Side A
1. 화랑
2. 뛰어
3. 산으로 바다로
4. 만남
5. 허수아비
6. 어느 봄날
Side B
1. 개척자
2. 행복파는 상점
3. 추억
4. 사진첩
5. 누굴까
6. 오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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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들국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모임: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도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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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팬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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