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및 장소: 2002.9.13 카페 [아름다운 세상]의 야외
질문: 신현준
정리: 송창훈, 최지선

20030317113427-0504interview_shin1_shin신병하(1945년생)는 먼저 [씨받이], [장군의 아들], [남부군], [하얀 전쟁] 등 영화 음악 및 드라마 음악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작곡가로 통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그룹 사운드 활동, 특히 1975년경부터 1980년경까지 그가 이끈 사계절을 통해 소중한 음악적 성과물들을 만들었다는 것은 중요한 이력이지만 많이 알려지는 않은 듯하다. 윤시내, 유현상, 연석원 등도 사계절을 거쳐간 인물이다.

밤 10시에 분당의 교외에 있는 한 카페의 야외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미8군 무대 활동에 대한 강한 자기성찰과, 현재와 앞으로의 한국 대중 음악에 대한 관찰이 그의 지적(知的)인 음악만큼이나 냉철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그는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http://www.shinbyungha.com)에 가면 간략한 바이오그래피와 디스코그래피를 볼 수 있다.

재즈 페스티벌을 주관하다
Q: 먼저 중고등학교 시절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 보성 고등학교 출신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은 원래 1964년이어야 되지만 초등학교를 한해 더 다녀서 1965년에 졸업했어요. 대학교는 가지 않았습니다.

Q: 홈페이지 이력에 보면 1965년 1회, 1966년 2회 재즈 페스티발을 개최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정성조 씨가 계셨던 밴드가 2등상을, 강근식 씨가 계셨던 홍익 캄보가 1등상을 받은 ‘전국남녀대학생재즈페스티발’인가요?
– 그것과는 다른 행사입니다. 1965년에 제가 친구들과 함께 주도한 행사였어요. 한국대학생연예서클이라고 해서 학생들로만 조직했는데 그때 회원수가 약 60명쯤 되었지요. 1회에 출연한 사람이 조영남이 있었고, 백병종(백병종은 “봄비”의 박인수의 본명)은 출연을 하기로 했다가 사정이 있어서 못 나왔죠. 장소는, 요즘에 숭의 음악당 같은 곳에서 많이 공연하듯이 그때는 진명여고 3·1당에서 많이 했습니다.

Q: ‘전국남녀대학생재즈페스티발’은 신병하 님이 하신 것보다 2년 뒤의 행사인데다가, 당시 신병하 님이 스무 살밖에 안되셨으니 자긍심을 느끼실 만하겠네요. 그러면 그때 하신 음악을 재즈라고 부르셨는지요?
– 그렇죠. 우스운 일인데, 그 당시만 해도 미국 곡이면 무조건 재즈라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컨트리 앤 웨스턴을 해도 재즈라고 불렀었으니까요.

Q: 그룹 편성은 어떻게 되었나요?
– 처음에는 기타 2, 베이스 기타가 있었고, 건반 악기가 있으면 다양할 것 같아 나중에 건반 악기 주자를 섭외했습니다.

Q: 이 행사는 아마추어적이라 볼 수 있겠네요. 상도 주었던 행사였나요?
– 아마추어적인 행사였지요. 상은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행사를 열면 금방 스타가 될 것 같아 주목을 받아 보려고 시작해 본 겁니다. 동양 라디오, 중앙 TV(TBC), AFKN에서 후원했습니다.

Q: 그때 그룹 이름은 무엇이었고 레퍼토리는 어떤 곡이 있었나요?
– 제가 처음 그룹 사운드를 시작할 때 이름을 ‘Moon Dog’이라고 했어요. 비틀스의 전신 이름과 같은 이름이죠. 레퍼토리는 벤처스도 물론이거나와, “Hanky Panky”, “Wooly Bully”, 애니멀스(Animals)의 “해뜨는 집(House of the Rising Sun)” 등도 연주했습니다.

미8군 무대의 A One Band, All Star Show, Super Star Show에서 활동하다
Q: 재즈 페스티발 주관하신 무렵의 활동은 아마추어적인데 공식적인 음악활동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는지요?
– 저 같은 경우에는 밑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동두천, 턱거리, 의정부의 기지촌부터 시작했죠. 우리 나라 그룹 사운드의 원류라는 키 보이스 같은 경우는 고생을 거의 안 해서 우리처럼 바닥부터 해본 사람하고는 좀 다르죠.

Q: 공영, 화양, 삼진 연예주식회사에 들어가셔서 1967년 ‘A One Band'(공영 소속), 1968년 ‘All Star Show'(화양 소속), 1969년 ‘Super Star Show'(삼진 소속)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지촌에서 연주하는 밴드와, 공영이나 화양에 소속되어 미8군 쇼, 패키지 쇼의 그룹과는 다른 형태였나요?
– 달랐죠. 기지촌에서는 기타 2, 베이스 기타 1, 드럼, 싱어 1 정도로 구성해서 록 그룹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유명해지면 기지촌 내에서뿐 아니라 미8군 무대 쪽에서도 소문을 듣고 스카웃을 하게 되죠. 그때 오디션을 보는데 합격하게 되면 등급이 있어요.

Q: A, AA 식의 등급 말씀이신지요?
– 맞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어가면 오픈 밴드를 먼저 합니다. 그 다음에 조금 실력이 쌓이면 하우스 밴드를 하고, 하우스 밴드에서 “어. 누가 아무개가 기타가 좋지”하는 식으로 유명해지면 패키지 쇼단에서 스카웃을 합니다.

Q: 신중현 님은 플로어 밴드라고 하시던데요.
– 예. 플로어 밴드라는 게 다 그런 개념입니다. 플로어 쇼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빅 쇼도 있고 패키지 쇼도 있는 거죠. 빅 쇼는 빅 밴드뿐만 아니라 노래도 하고, 코미디도 하고, 마술도 하는 다양한 쇼입니다.

Q: 패키지 쇼가 캄보 밴드가 있던 형태라고 생각하면 맞나요?
– 아니죠. 캄보가 하는 색깔을 띤 단체도 있지만, 키 보이스처럼 록 그룹이 많았어요. 김홍탁 씨의 경우는 록 그룹으로 패키지 쇼를 한 최초의 경우였다고 볼 수 있겠죠.

Q: 신병하 님이 참여하신 ‘A One Band’, ‘All Star Show’, ‘Super Star Show’ 같은 것들은 다 패키지 쇼입니까?
– 패키지 쇼인데 우리들은 록 그룹이었죠.

Q: 악단장하신 ‘Super Star Show’는 빅 밴드였나요?
– 빅 밴드는 아니지만 빅 밴드의 성격을 띠었죠. 왜냐하면 쇼가 좀 다양해야 했으니까요. 키 보이스 같은 경우는 키 보이스 자체가 스타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만의 색깔로 공연을 합니다. 그런데 여타 단체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때론 비틀스 흉내도 냈다가 때론 비치 보이스 흉내도 내곤 했죠.

Q: 그 때 대한민국이 어려웠던 시기이잖아요. 지명도과 있는 팀과는 어떻게 달랐는지요?
– 저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키 보이스 같은 팀은 인기가 있는 팀이니까 초저녁에는 문산의 어느 캠프에 가서 하고 그 다음에는 30-40분 거리에 있는 다른 캠프로 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두 군데씩 뜁니다. 하루에 ‘더블 부킹’을 하는 거죠. 그런 경우에는 인기가 있어서 일을 많이 하니까 회사에서는 보너스를 주게 되지요. 하지만 보통의 경우 하루에 한번씩 공연을 합니다.

Q: 악기나 장비는 스스로 조달을 하셨나요? 혹은 화양 같은 회사에서 사주었습니까?
– 회사에서 공짜로 해주는 건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아무개를 스카웃하면서 악기 장만하라고 돈을 가불해주는 거죠. 저 같은 경우에는 너무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척 창피한 일들이 있습니다. 히쓰키트(Heathkit)라는 영제 전축이 있었어요. 앰프에 진공관이 막 달린 걸 케이스도 없이 들고 다니면서 스피커에 연결해서 썼어요. 연예인이라면 미군들에게 어떤 경외심도 느끼게끔 해야 되는데, 케이스도 없이 스피커에 얹어놓고 연주했으니까 보기 흉했죠. 여유가 없는 연주인들의 경우에는 국산 악기를 썼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연주인들이 아무리 가난했다 해도 악기 욕심은 많았거든요. 웬만하면 전부 펜더(Fender)나 깁슨(Gibson) 쓰려고 했고 무리해서 장만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어려워서 그렇게도 할 수 없었습니다.

Q: 같이 고생하셨던 분 중에 어떤 분들을 기억하시는지요?
– 샤우터스는 유명했죠. 그 당시에 샤우터스보다 더 유명했던 팀이 코끼리 브라더스였는데 최영한, 최영훈 형제가 있었고, 조영조, 박명수가 있었죠. 그리고 신중현 씨는 애드 훠 이전에 캄보 밴드에 있었고 심형섭 씨가 계셨던 김치스가 있었습니다.

Q: 몇몇 그룹 빼고는 음반으로 남겨지지 않은 것 같은데, 음반을 낼 분위기가 아니었는지요?
– 그 때는 우리 그룹 사운드 하는 사람들이 미8군 무대에 안주했다고 할까요? 거기서 들어오는 수입이 괜찮아서 충분히 생활이 됐습니다. 일반 무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나가는 걸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별로 관심도 없었죠. 게다가 일반 무대보다 미8군 무대에서의 수입이 훨씬 좋았으니까요.

Q: 창작곡이 아니라 대부분 외국곡을 연주했는데요.
– 좀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정말이지 키 보이스를 위시해서 누구든 레파토리가 똑같았고 쾌쾌묵은 레파토리죠. 이 팀이든 저 팀이든 개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컨데 한 팀에서 “해뜨는 집”하면 저 팀에 가서도 “해뜨는 집”하고.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1969년에 미8군 카스토디언 중에 새로 부임해 온 미국 심사위원장이 있었어요. 당시 우스개 소리로 별명을 ‘백대가리’라고 했죠. 그 사람이 부임해오면서 “한국 연주인들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왜 죄다 앵무새처럼 흉내만 내고 있냐”더니, 곧 “1969년 2월 이후에 나온 곡으로 99곡을 편곡하여 제출해라. 그 이전 것은 전부 무효다”라고 해서 미8군 단체 전체가 아주 발칵 뒤집어졌었어요.

Q: 그룹 사운드가 전부 다요?
– 전체 다 발칵 뒤집어졌었어요. 사실 각 팀마다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요. 그래서 편곡할 수 있는 사람한테 의뢰했는데, 제가 1969년 이전부터 음악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단체가 전부 날아갈 지경이 되니까 회사에서 저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죠. 그렇지만 그땐 너무 늦었죠. 오디션이 불과 닷새 전이었으니… 급한 김에 악단을 급조해서 자작곡 두 곡을 만들었어요. 제목만 겹치지 않게 밤새 곡 리스트를 만들어 제출했죠. 다른 팀들은 두 달씩 모여 합숙해 연습했는데 저희 경우에는 두 곡만 연습을 한 겁니다. 두 곡으로 오디션을 보러 가서 심사위원들이 가령 73번을 시키면 A곡을 연주하고, 24번을 시키면 B곡을 연주하고, 48번을 시켜도 다시 A곡을 연주했죠. 99곡이 다 준비된 줄로 알았던지 오디션에 합격했던 적이 있었어요(일동 웃음). 이 사건을 계기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Q: 그럼 번안곡, 카피곡만 했던 당시 상황이 좀 부끄럽단 생각을 말씀하신 것인가요?
–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의 가치관 자체가 부끄러웠습니다. 미국 것이면 무조건 그대로 흉내를 냈던 겁니다. 그들이 이태원 거리에서 햄버거를 질겅질겅 씹어먹고 다녀도 자유롭고 멋있게 보이기조차했으니까요. 오디션을 위해 생각지도 않던 창작곡을 만들어 연주했던 그 사건이 저의 음악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사계절에 둥지를 틀다
Q: 홈페이지 연혁을 보면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비어 있는데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혹시 오비스 캐빈에서 활동하신 것인지요?
– 아니요. 오비스 캐빈 활동은 1970년대말 쯤이었고, 그때에는 미8군 무대에 계속 있었습니다.

Q: 1970년대 들어오면 미8군 무대가 이전보다 쇠퇴하고 일반 무대가 많이 커졌다고 하는데, 고고 클럽이나 음악 살롱 쪽으로는 진출을 안 하셨나요?
– 미8군이 철수하면서 시장이 좁아지니까 대개 일반 무대로 진출했죠.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존, 그 다음에 오비스 캐빈, 그리고 옆 골목에 있던,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뮤직살롱이 있었는데 그곳 무대에서 연주를 했죠.

Q: 그때 그룹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 타임스(Times)라고 기억합니다. 사계절은 그보다 나중의 이름이었지요.

20030317113427-0504interview_shin2_album_first[사계절](서라벌 SLK 1012, 1976) 음반 표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계절의 멤버는 윤시내(보컬), 유현상(기타), 신병하(베이스), 이정웅(키보드), 박훈(드럼), 서정훈(보컬). 그외에 표지 사진에는 빠져 있지만 김헌국(트럼펫, 현 KBS악단), 하재승(알토 색소폰, 하청일의 동생)이 사계절에 있었다.

Q: 사계절 결성은 언제인지요? 대마초 파동 후인가요? 저희는 1975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대마초 전입니다. 1975년에는 제가 이태원 유엔 클럽에 있었어요. 당시 대마초 파동이 나서 신중현 씨가 문제가 되었고 킹 레코드에서 그 대안을 구하면서 킹박 사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윤시내를 김추자 같은 색깔로 포장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윤시내를 중심으로 사계절이 함께 음반 작업을 했습니다.

Q: 그외에 사계절의 결성과 활동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미8군 무대에 있을 때, 김희경이라는 여자 리드 싱어가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윤시내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미8군 무대가 점점 몰락해 가니까 일반 무대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태원의 유엔 클럽이나 해밀턴 클럽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킹박이란 사람을 만나게 되어 사계절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대마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툭하면 유현상이나 다른 멤버들이 숨어다니던 좀 암울했던 때였으니까요. 그런 와중에도 오비스 캐빈 시절에 정성조와 메신저스하고 우리하고 같이 연주했습니다. 오비스 캐빈과 소공동의 포시즌에도 왔다 갔다하면서 활동했지요.

Q: 그래서 밴드 이름도 포시즌인가요?
– 예. 그런 동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 사운드도 좀 활동했었구요.

Q: 빅 화이브도 같이 하셨죠?
– 아닙니다. 빅 화이브나 화이브 휭거스는 일반 무대에서 좀 알려졌던 것 같은데요. 그 다음에 다크 아이스가 있었는데, 유명했어요. 다크 아이스에는 중국인이 둘 있었는데, 기타 치는 추랑이라는 친구가 우리 팀에 와서 리드 기타를 담당했습니다.

Q: 사계절의 멤버는 어떻게 됩니까?
– 그런 것은 의미가 없을지 몰라요. 변동이 잦았으니까. 키 보이스 같은 팀은 바뀌어도 팀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Q: 연석원 씨도 한때 사계절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외에 사계절을 거쳐가신 분은?
– 연석원은 시기적으로 좀 나중에 있었습니다. 그 외에 김현배, 김희현(드럼), 그리고 벗님들에서 드럼 쳤던 이순남 등이 기억납니다.

20030321031230-0504interview_shin3_discocarol[젊은이들을 위한 디스코 사운드 크리스마스캐롤](JLS-1201426)의 음반에 기록된 멤버는 연석원(퍼스트 기타), 윤영인(세컨드 기타) 노승준(일렉트릭 피아노), 최용대(오르간), 김헌국(트럼펫), 하재승(알토 색소폰), 김원용(테너 색소폰), 김정민(플루트), 김석림(스트링 앙상블), 신병하(베이스), 김희현(드럼).

Q: 벗님들, 유현상 씨나, 연석원 씨는 박영걸 씨하고 연관될 수 있는 분들로 보입니다. 유현상 씨는 라스트 찬스에 계셨고 데블스도 뒤에 노만 기획에 들어가는데요. 박영걸 씨는 어떤 역할을 하셨던 분인지. 킹박(박성배) 같은 일을 하셨다고 보면 되는지요.
– 킹박이라는 분은 레코드 제작사 사장인데 반해, 박영걸 씨의 경우는 단장, 말하자면 매니저였죠. 부킹도 해주고 월급이나 계약금을 주는… 그룹을 같이 꾸려나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Q: 킹 레코드는 청계천에 있었나요?
– 제가 녹음했을 때는 퍼시픽 호텔 옆 골목의 조그만 건물 2층에 있었습니다.

소울과 훵크를 아우르는 실험을 하다
Q: 사계절에서 음악의 실험은 어떤 방향으로 하셨는지요?
– 가령 베이스 오스트나토라는 것이 있습니다. “Susie Q” 같은 곡도 아주 쉬운 오스트나토의 일종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발전된 것이 리스테소(Lissteso)라는 겁니다. 재즈 룸바나 보사노바 같은 것들이 리스테소 템포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입니다. 4/4나 3/4, 2/4 박자가 우리가 보통 많이 접하는 음악인데 반해, 리스테소 템포란 기존의 박자 개념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난해한 리듬이었죠. 그런 리듬을 만들어서 연주를 했으니 저희는 도깨비 밴드라 할 만했죠. 오디션 99곡을 하는데 단 두 곡으로 오디션을 봤던 일화를 소개했었죠? 그런 음악을 했으니 심사위원들 감성으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죠. 그 음악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심사위원들이 찾아와서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것으로 가요를 만들었으니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Q: 리스테소까지는 몰라도 훵키한 음악을 많이 하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랑과 평화나, 데블스의 김명길 님도 비슷하게 그런 음악을 하신 듯합니다만…
– 예. 1970년대 중반 정도인 그때 좀 ‘한다’하는 색깔있는 밴드들은 훵키한 음악을 했죠.

Q: 신병하 님 음악은 소울 같은 느낌도 있는데, 그때 어떤 음악을 소울이라고 불렀는지 모호한 것 같은데요.
– 모호하죠. 그 때 흑인들끼리는 소울을 나누는 형제들이라고 했고 그들이 하는 음악 모두를 자칭 소울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때 훵키한 음악을 많이 했죠.

Q: 그 때 사이키델릭은 어떤 음악을 가리켰습니까?
– 사이키델릭 음악이라고 어떤 특정한 장르가 있었던 게 아니고, 그야말로 대마초와 사이키델릭 조명이 어우러지는 현란함 속에서 정신 못 차리게 음악을 막 뒤집어 놓는… 뒤집어 놓는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런 음악을 그냥 사이키델릭 음악이라고 했어요. 저도 그런 음악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Q: 그러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는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1973-1974년경에 이르면 소울 음악이 유행이었다고 보면 됩니까?
– 아뇨. 소울을 먼저 했던 것 같은데요.

Q: 펄 시스터즈나 김추자의 음악을 당시에 소울이라고 불렀는지요.
– 그렇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도 흑인들이 하는 음악을 그런 움직임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제임스 브라운이나 오티스 레딩 같은 흑인 소울 음악(과 매너)을 그대로 흉내내서 하곤 했죠.

Q: 그러니까 미국처럼 소울 그룹, 록 그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별로 어떤 유행이 있으면 실력 꽤나 있다고 하는 그룹들이 그 유행을 따른 듯합니다. 먼저 소울이, 그 다음에 사이키델릭이 유행했었다면, 그 다음은 어떤 음악이 유행이었는지요? 브래스 록, 시카고 음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렇죠. 시카고 음악은 사이키델릭 같은 음악과는 다르죠. 상당히 학구적인 음악입니다. 음악 전문가들이나 알아 줄 만한 재즈 화성, 재즈 스쿨에서나 가르칠 만한 음악들을 시도했어요.

Q: 그런 음악을 한국 그룹 사운드들이 많이 연주했었나요?
– 많지는 않았지만, 몇몇 의욕적인 팀들이 있었습니다. 김영일 씨라고 같이 공부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실력이 대단했었지만 일찍 타계했어요. 그런데 그런 음악은 상업성이 없었습니다. 그냥 좋아서 팀을 꾸려 시도하다가 흩어지곤 했죠.

Q: 음악 이론 부분은 어떻게 습득하셨는지요.
– 이교숙 선생님에게 좀 오래 배웠습니다. 1969년서부터인가… 26살부터 배웠네요. 5년 정도 공부했는데 그분한테 많은 걸 배웠죠. 그 분은 지금 연세가 79세이신데 정정하십니다.

Q: 개인 사사 같은 형식이었나요? 그리고 어떤 음악을 배우셨습니까?
– 사사라기보다는 몇 명이 그룹으로도, 일대일로도 배웠죠. 클래식부터 재즈, 현대 음악, 국악에 이르기까지 다 공부했습니다.

Q: 신병하 님이 키우신 제자분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 예. 많죠. 그런데 이름이 좀 알려졌지만 저한테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일부러 안 하고 다니는 친구도 있어요. (웃음) 제가 가르친 건 이론 부분입니다.

사계절 그 후, 가수 음악의 작편곡부터 영화 음악 작곡까지
주정이 노래모음(신병하 작편곡집)](대성음반, DAS 0003,) 영화 [애마부인] 주제가 “서글픈 사랑”이 들어있는 신병하 작편곡집 음반
Q: 사계절에서 하신 작업과 시도가 후대로 계승이 안된 것 같네요. 키우셨던 분들 중에 기대주라고 할 만한 분은 없었는지요?
– 이동원의 편곡을 제가 도맡아했었어요. 곡도 한두 곡 주기도 했죠. 그외에 이미배 , 산이슬의 주정이의 음반에 참여했었습니다.

Q: 사실 사계절 음반 외에 세션이나 편곡으로 참여하신 음반이 꽤 많으셨던 것 같은데 파악이 안됩니다.
– 많이 참여했었죠. 사실 저작권협회에도 제가 다 신고를 해야 하는데, 아마 95%는 빠뜨린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제가 영화 음악을 했던 영화가 많이 방영되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사용된 곡을 저작권협회에 신고해야 인세가 모두 계산돼서 나오거든요. 몇 번 시도는 했었는데 아주 귀찮은 일이더군요. 그걸 일일이 기록하고 앉아 있으려니 그냥 포기하고 말지 싶더군요. 예전에 신당동 입구에 있던 저작권협회에서는 카세트 라디오 같은 것을 여러 대 갖다 놓고 여직원들이 앉아서 일일이 모니터해서 인세가 나왔었는데, 이제는 저작권협회에서 해야 할 일을 저보고 직접 하라고 하니 차라리 인세를 포기하는 것이 편하겠다 싶더군요.

Q: 영화 음악 외에 1970년대 가수들 음악에 참여하신 곡에서 인세는 안 나오나요? 윤시내의 곡들도 있는데요.
– 1977, 8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꽤 오랫동안 했던 MBC 서울 국제 가요제가 있었습니다. 윤시내가 “공연히”라는 곡으로 나가는데 작곡가 최종혁 씨가 제게 편곡을 의뢰하여 그 곡을 훵키 리듬으로 만들었어요. 연주와 출연까지 의뢰했었죠. 그때는 일반적으로 기껏해야 고고 같은 리듬을 사용했는데, 16분 음표로 바운스 리듬으로 세분해 연주하는 훵키한 음악을 들은 MBC 스탭들은 색다름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즘 수요예술무대 같은 라이브 무대에 밴드가 나오는 것처럼 MBC에서 매주하는 프로에 일주일에 한번씩 사계절이 나가서 편곡과 연주를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는 TV에 나오는 사람들도 가위로 머리 잘리던 시절이거든요. 여러 가지로 그룹이 활동하기에 좋지 않았던 어려운 때였죠. 윤시내는 “공연히”가 뜨면서 사계절 활동을 접었고 그후 “열애”(최종혁의 곡)를 했죠.

Q: 사계절은 영화 음악 하시면서 접으셨나요? 그러니까 윤시내 씨가 “열애” 낸 후 정도가 됩니까?
– 예. 그 음반 낸 후, 한 1년 정도 더 활동하고 접었죠. 제가 너무 레코딩 편곡으로 바빠지니까 사계절을 해체하게 된 거죠.

Q: 결국 사계절 활동이 그룹으로는 신병하 님의 마지막 활동이 됐나요?
– 그렇죠.

Q: 좀 아쉽네요.
–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너무 대중들한테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뺀 것들이, 오히려 훨씬 실험적이고 훨씬 알맹이가 있었어요. 그런 걸 모두 다 빼버렸더니 이제사 아쉬운 걸 느낍니다.

Q: 녹음도 남기신 게 없으셨어요?
– 했죠. 하지만 지금은 날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킹 레코드 창고 어디쯤엔가 처박혀 있을지도 모를텐데…

Q: 영화 음악을 시작하신 것은, 좀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룹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인가요?
– 아닙니다. 영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었죠.

자긍심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 미8군 무대활동에 대한 성찰
Q: 영화 음악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여쭤보겠습니다. 관찰자가 보기에는 그룹 사운드가 잘 될 수 있었는데 잘 안된 듯합니다. 특히 1977년부터 그룹 사운드 출신 가수들, 예를 들어 최헌이 “무릉 도원” “오동잎”, 윤수일이 “사랑만은 않겠어요” 등 트로트 비슷한 노래를 했는데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10대였던 제가 히 식스, 엽전들의 음악을 듣다가 그런 노래를 듣고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미군이 철수한 것이 우리 나라 그룹 사운드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설 자리가 없어진 그들이 일반 무대로 나오면서 나이트 클럽 같은 곳에 자리잡고 춤추는 음악을 대신해줬죠. 사실 히 식스나 키 보이스 등 우리 나라 그룹 사운드 했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키 보이스 “정든 배”의 경우도 김영광 씨 곡이었고, 차도균 씨가 엘비스 프레슬리 곡을 불렀다 해도 ‘가요’ 수준을 넘지 못한 거였죠. 다시 말해 그룹 사운드 기조 자체가 근본부터 흔들려 버렸고 자기 색깔도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화하면서 그 나름대로 그룹 사운드의 색깔을 유지했더라면, 다시 말해 어느 한 두 사람이라도 그렇게 유지했더라면 그것이 본보기가 돼서 그룹 사운드가 활성화되고 나름대로 우리만의 색깔이 나왔을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중현 씨가 우리 나라 가요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Q: 미8군 무대 활동에 대해서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색깔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인가요?
– 그렇죠. 물론 어떤 점에서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좋았던 점은, 가난하고 황무지 같던 시절에 미국 음악에 눈을 뜨고, 서양 음악을 소화하고 나름대로 깊숙이 연구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만의 색깔을 찾지 못했죠. 가령 애드립을 할 때 자기 것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때는 원곡하고 똑같지 않으면 “에이 저건 틀렸어”, “저건 가짜다”라고 했다구요. 완전히 똑같아야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실은 자기 걸 하는 게 진짜인데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제가 보기엔 부끄러운 역사라는 것입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전망
[신병하 영화음악 모음](서라벌, SRB-SE007, 1991) : [남부군], [장군의 아들] [개벽] 등을 비롯한 영화음악 작품 모음집. 1987년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방영된 [소나기] 삽입곡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Q: 요즘 젊은이들의 록 음악은 어떻게 보세요?
– 과거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1960년대 말쯤 했던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1960, 70년대에 우리는 16분 음표로 바운스 리듬으로 세분해 훵키한 음악을 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단순해졌으니까요. 그러니까 극단적인 비유를 들면 딥 퍼플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나 할까요.

Q: 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음악이 전승이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젊은 음악인들은 이런 과거의 음악이 있었다는 자체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됐는지 궁금해지더라구요. 대마초 파동 영향이 컸나요?
– (젊은 음악인들이 과거의 음악을) 잘 모르겠나 싶은 점이, 옛날에는 그야말로 기지촌부터 미8군 무대를 거쳐서 밑바닥에서부터 다져왔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됐단 말예요. 산울림이나 송골매처럼 대학에서 한 두 곡만 연습해서 가요제에 나오고, 바로 레코딩을 하고 그랬으니까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러한 어려운 과정 없이도 매스컴의 조명을 받고 스타가 되니까 정작 중요한 음악의 본질에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Q: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전망도 비관적으로 보시는 편인가요?
– 아닙니다. 전 굉장히 밝게 봐요. 저는 음악에서의 주체성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 왔습니다. (과거에는) 뭔지 모르고 똑같은 걸 답습하고 흉내내곤 했지만, 앞으로는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예술적 감성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 서양 음악을 너무 늦게 받아들였죠. 일본 같은 경우는 훨씬 우리보다 일찍 받아들였잖아요. 게다가 우리는 예술적 정보에도 어두웠고, 경제나 정치적으로 어렵고 암울했던 시기를 거쳐왔지요. 그런데 제가 우리 나라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가 상당히 앞으로 전도가 밝다고 보는 이유는 우선 우리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언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형용사만 예를 들어봐도 빨갛다는 표현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그스름하다/벌거스름하다’, ‘불그레하다/볼그레하다/발그레하다’, ‘뻘겋다/시뻘겋다/새빨갛다’ 등등. “술을 한잔해서 얼굴이 좀 불그스름하다”라고 말하죠. 이것을 일본어로 표현하겠습니까, 프랑스어로 표현하겠습니까. 술을 좀 못하는 여자아이가 한두 잔 먹으면 발그레하잖아요. 또 다른 예로,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가서 증상을 이야기할 때도 그냥 “이가 ‘아프다'”가 아니라 ‘뻐근하다’, ‘욱신거린다’, ‘시리다’라고 각기 다양한 표현을 씁니다.

Q: 언어가 풍부해서 예술 표현이 풍부하다는 말씀이신가요?
– 대단히 풍부하다는 거죠. 그렇기에, 스스로 곡을 쓰고도 만족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감성적으로는 매우 까탈스럽다고나 할까요…. 스스로 곡을 써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끊임없이 다듬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고쳐나갑니다. 분명 타민족보다는 매우 섬세하단 얘기입니다.

Q: 기대하시는 음악하는 후배분이 계신가요?
–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금방금방 따라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옛날에는 우리가 너무 몰라서 표현을 못했지만, 지금 후학들은 고급정보를 주면 “아. 이거구나” 하고 금방 쫓아와요. 사실 미디 분야는 서양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미디 작업을 보면 테크닉이 아주 고급화되어 있습니다.

Q: 그런데 제 생각에는 한국인들이 재능은 많지만 그걸 시스템이 못 받쳐준다는 느낌이 많이 들기도 합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재능을 다 못 펼치고 쉬운 길 찾아 음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 그렇기는 합니다만 앞으로 대중들의 수요가 고급화되고 확대된다고 했을 때 거기에 맞는 공급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Q: 오늘은 이 정도로 말씀을 접겠습니다. 신병하 님의 말씀을 감히 정리하면 “1970년대 그룹 사운드 결과가 좋지 않았던 건 주체성의 문제인 것 같다” 정도로 이해해도 될까요? 나름대로 미국을 비롯한 서양 음악을 소화해 낸 건 인정하지만, 뭔가 우리 것을 못 만들어냈다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 예. 그렇죠. 저의 경우에도 향수도 있고 후회도 있죠. “너희는 앵무새”라고 한 ‘백대가리’라는 미국인이 저한테 가르쳐 준 셈입니다. 그 앵무새 노릇했던 것을 아무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향수에만 젖어 있다면 문제가 있다는 거죠.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아무 저항 없이 서양 사람들 흉내나 내면서도 그저 유행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엔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요. 단순하게 우리가 서양 음악을 그대로 흉내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모방을 넘어서서 이제는 우리화해야 되겠고, 거기에서 나아가 그들보다 훨씬 우수한 음악을 세계 속에 우리 것으로 심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자신과의 음악적 교감을 이루려면 조금은 달라져야 합니다. 어쩌면 제가 서양 음악을 아무 의식도 없이 흉내내기만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Q: 궁금한 것 있으면 전화 걸어 여쭤봐도 될까요? 다시 한번 뵐 수도 있을까요?
– 예. 이런 공식적인 만남보다 아무 때나 만나서 차 한 잔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Q: 늦은 시간에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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