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초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시스템

지난 번 글에서 1975년 말의 대마초 파동까지를 다루었으니 이번 글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즉, 이 글은 1970년대 이전까지 존재했던 에너지가 대마초 파동 이후에 어떻게 보존되고 변형되고 굴절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대마초 쇼크’가 어떤 귀결을 낳았는가 살펴 보면 1976년 1월 30일 확정된 처벌조치에 의해 44명의 ‘대마초 연예인’들이 모든 활동을 금지당했다. 물론 ‘훈방’된 인물들도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곧바로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어떤 트렌드가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논의를 미루자. 그에 앞서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한국적 록’이나 ‘한국적 포크’라는 ‘젊고 현대적’인 대중음악을 탄생시키려는 프로젝트가 유산(流産)되었다는 주장을 부연해 보겠다. 간단히 말해 이때 유산이란 단어는 작품의 생산이나 작가(혹은 ‘아티스트’)의 활동이 인위적 수단에 의해 중단되었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간단히 말해 한국의 대중음악은 새로운 작품과 작가에 걸맞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영미권 등 서양에서 전개된 1960년대 말 이후 음악산업의 혁신은 한국에서는 발생하지 못했다. 그러니 잠시 여기서 ‘남의 나라’ 이야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시점에서는 ‘배 부른’ 일이었겠지만 이제는 시간도 지났으니까…

음악산업의 혁신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젊고 현대적’인 음악을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뜻이다. 그 핵심은 당연히 ‘음반’과 관련된 시스템이다. 즉, 음반의 제작 및 배급과 관련된 번듯한 비즈니스가 공연 프로모터, 매니저, 극장 주인, 악보 출판업자 등 음악산업의 전통적 세력이 하던 비즈니스를 제치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작권 제도가 합리적으로 정비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렵게 말하면 재능이 있는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합리적 시스템을 갖춘다는 의미고, 쉽게 말하면 음반회사의 ‘직원’이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꽁지머리를 길러도 된다는 의미다. 이른바 A&R(artists & repertoire)이라고 불리는 부서는 마치 독립된 회사처럼 자율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이 시기 혁신된 기업구조의 특징이다. 또한 수많은 독립 음반사(이른바 ‘인디 레이블’)들과 다양한 계약을 통해 하청관계를 맺는 산업조직 상의 특징도 빼놓을 수 없다. 즉, 음반회사는 음반의 컨텐츠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고 음반의 배급이나 재정에 집중하는 것이 ‘선진국형’ 시스템이다. 1970년대 말의 불황을 거치면서 사정이 조금 바뀌었지만 이런 기본적 특징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음악산업은 어땠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의 음악산업에서는 여전히 공연 프로모터(‘쇼단’ 단장)이나 가수의 매니저(‘나이트클럽 매니저’) 등이 실세였다. 이건 지금도 유지되는 한국 음악산업의 특징이다. 오히려 음반업자(‘판 장사’)들이 이들보다 ‘덜 현대적’인 때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음반사업이 ‘중소기업 고유업종’으로 묶여 있었던 데다가 지구나 오아시스처럼 ‘대형 메이커’라고 불리는 음반회사라고 하더라도 ‘중소기업’ 수준이었으므로 선진국의 ‘메이저 음반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제까지 킹, 애플, 오리엔트 등 1970년대 한국의 젊은 음악의 탄생에 기여한 독립 프로덕션에 대해 언급했지만 분석적으로 정리한 이야기를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이 점에 대해서 일단 짚고 넘어가자. 간단히 말해서 이들 ‘독립 프로덕션’과 지구, 오아시스, 신세계 등 ‘대형 메이커(제작사)’와의 관계는 선진국에서 ‘메이저와 인디와의 관계’와는 많이 다르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선진국에서 메이저와 인디 사이의 관계는 1960년대까지의 경쟁 관계를 지나서 기능적으로 역할을 분담하거나 아예 ‘서로 간섭하지 않고 따로 노는’ 관계지만, 한국에서 음반 제작사와 독립 프로덕션은 여전히 잠재적 경쟁 관계에 있었고, 양자간에 차이라면단지 음반제작사는 스튜디오, 공장, 창고 등의 시설요건을 갖추어서 문공부에 정식 등록한 반면 독립 프로덕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1968년 [음반법]이 제정된 이후 독립 프로덕션들은 정식 등록된 음반제작사의 상호를 빌려서 음반을 발매했다. 이게 이른바 대명제작이다. 그 중에서 킹, 애플, 오리엔트 등 ‘군소 프로덕션’들이 록(소울·싸이키)이나 포크 계열의 젊은 음악을 많이 발굴한 것은 사실이다. 음반에서 이들 프로덕션의 이름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킹은 펄 시스터즈, 김추자, 김정미, 장현 등 ‘신중현 사단’의 음반을, 애플은 어니언스, 김정호, 김인순, 채은옥 등 ‘이종환 사단’의 음반을, 그리고 오리엔트는 이장희, 송창식, 김세환, 현경과 영애 등 ‘나현구 사단’의 음반을 각각 제작했음은 앞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이들 독립 프로덕션은 1970년대 중반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면서 트로트 중심의 낡은 시스템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메이저는 새로운 주류에 속하는 음악인들을 흡수하려고 시도했다는 것도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소속된 핵심 음악인들이 활동을 금지당하면서 이 프로덕션들은 동시에 위기에 처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4~5년의 극심한 경기침체,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독립 프로덕션들 대부분은 경영난에 처했고, 오리엔트의 경우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대마초 파동은 음악인들의 활동을 금지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경제적 거점마저 없애 버린 것이다. ‘시스템의 혁신’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 프로덕션에 모여서 일관된 사운드를 만들어내던 음악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예 다른 일을 찾아나섰다(한 예로 강근식, 김도향, 윤형주 등은 광고음악이나 영화음악 등 ‘실용음악’을 만드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이렇게 된 ‘책임’으로 방송산업의 선정주의나 음악산업의 상업주의의 몫은 ‘당국의 규제’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속된 말로 한국의 대중음악은 ‘윗분들이 원하는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게 그분들의 뜻대로만 되지도 않았다. 얼마 남지 않고 다 타버린 것 같은 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질기게 버텨 나가는 것은 한국인들의 오래된 ‘민족성’이기도 하다. 당시 관제 교과서에서 자주 나오던 표현을 빌면 ‘시련과 극복’이라고나 할까. 달리 말해서 대마초 파동으로 많은 작가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스템의 맹아가 잘린 상태에서도 몇 개의 새로운 움직임은 존재했다. 그 움직임도 ‘영세’하고 ‘난립’한 독립 프로덕션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들이 활동하던 전반적 조건을 알아보기 위해 1976년부터 1978년에 이르는 ‘가요계’의 상황에 대해 간략히 검토해 보자.

1976-1979: 대중음악계, 불황의 긴 터널

1976년 최대의 인기가수와 히트곡은? 송대관의 “해뜰 날”이다. 송대관은 그해 말 각 방송사의 가수왕 시상식을 휩쓸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사건은 흔히들 대마초 파동 이후 이른바 ‘트로트의 왕정복고’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언급된다. 그렇지만 ‘트로트의 왕정복고’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고 “해뜰 날”도 따지고 보면 정통(?) 트로트에 속하지는 않는다. 한 예로 1976년 말 MBC 10대 가수로 선정된 가수들을 들여다 보자. 송대관, 송창식, 금과 은, 박상규, 김훈(이상 남자), 정미조, 김인순, 김상희, 조미미, 하춘화(이상 여자)이고 신인상은 이수만(!)과 백남숙이다. 이들 가운데 ‘정통 트로트’라고 할 만한 사람은 송대관, 조미미, 하춘화 정도이고, 나머지 가수들의 경력은 트로트와는 거리가 있다. 달리 말해 트로트의 제왕들이라고 할 만한 남진, 나훈아, 이미자는 이 시점에서 일선에서 완전히 후퇴한 듯한 인상을 주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참고로 남진(과 윤복희), 나훈아(와 김지미)는 이 시기 약혼·파혼 등으로 인한 ‘스캔들’에 시달렸다. 그때는 그런 일로도 방송 출연이 자유롭지 않았다.

어쨌거나 면면들이 다소 ‘고루’하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조미미와 김상희의 경우 ‘언젯적 가수냐?’는 말이 나올 만하고 송대관과 하춘화도 연배는 저들보다 아래지만 기성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다. 이런 ‘기성’의 느낌은 강하지 않더라도 송창식(“왜 불러”), 김인순(“여고졸업반”), 정미조(“불꽃”), 박상규(“조약돌”) 등은 별다른 신곡 없이도 1975년에 충분한 인기를 누린 곡들로 1976년 말까지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송창식, 김인순, 정미조가 오리엔트 프로덕션 계열의 ‘포크'(실제로는 ‘팝’?)계열에 속한다는 사실도 그리 위안받을 일은 아니다. 주)

주) 1976년 인기가수와 히트곡은 송대관의 “해뜰 날” 외에 금과 은의 “처녀 뱃사공”, 조미미의 “연락선”, 박상규의 “친구야 친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정종숙의 “둘이 걸었네”, 이승연의 “비에 젖은 비둘기”, 산이슬의 “이사 가던 날” 등이었다. 대체로 ‘건전한’ 가사와 곡조를 가지고 있는 곡들이다.

문제는 음악 장르였다기보다는 ‘시스템’에 있었다. 위에 열거한 가수들 가운데 송창식과 김훈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의미에서 ‘싱어송라이터’는 없다. 이들 대부분은 장르와는 무관하게 ‘작곡가 선생님’이 작곡한 곡을 ‘전속 악단’이 편곡한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솔로 가수’들이었다. 이들의 음악을 ‘트로트’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트로트와 유사한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지고 유포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가사들은 하나같이 ‘건전’하고 ‘바른 생활’을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

시스템이야 어떻든 신곡이 많이 생산되고 신보가 많이 팔리면 대중음악은 풍성해지는 것 아닐까. 1976년 한 해 동안 연예협회에 새로 등록한 가수의 수는 140명이고, 공연윤리위원회가 심의하여 통과시킨 곡(악보)의 수는 8,000개가 넘는데, 이는 “예년에 비해 꼭 2배가 넘는 숫자”([경향신문], 1976.12.16)라고 한다. 신인도 많아지고 신곡도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1976년 음반 판매량 1만장 넘긴 음반이 10종에 불과하고 그해 최고 히트작이었던 송대관의 음반 판매고조차도 “고작 2만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같은 기사의 보도에 의거하면, 발매된 음반 종수는 많았지만 실익은 오히려 더 작아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침체가 단지 문화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선진국들의 경우 1978년까지 음반산업이 ‘두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한국의 음반산업의 성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주)

주) 감을 잡기 위해 수치를 인용해 보자.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음악산업의 연간 총매출액은 1967년 10억 달러, 1973년 20억 달러, 1978년 40억 달러를 돌파했다. 5년마다 매출액이 두 배로 증가한 셈이다. 어떤 음반이 나왔길래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1970년대 록의 명반들’을 떠올리기 바란다. 따라서 이 시기 지구, 오아시스, 성음 등 한국의 메이저 음반사들은 ‘(팝 음악의) 라이센스 음반’으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반면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하는데 실패한 기성 음반사들(아세아, 신세기, 대도 등)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점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이런 불황은 1979년 말까지, 즉 유신정권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3년을 건너 뛰어 ‘10.26 사건’ 한 달 전쯤의 한 일간지 기사를 들추어 보면 “1974년 대마초 가수 사건 이전에는 적어도 레코드가 5만장이 넘어야 히트를 했다고 얘기되었으나 요즘은 1만장만 팔려도 많이 팔린 것으로 평가하는 정도”([동아일보], 1979.9.24.)라는 고백이 나온다. “침체의 늪 TV 쇼 프로 – 대마초 쇼크 이후 인기 내리막길”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기사의 초점은 음반이라기보다는 방송이었고, 그 가운데는 “시청자들로부터 ‘항상 같은 얼굴에 같은 내용으로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냉담한 반응을 얻고 있다”는 구절도 눈에 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TBC-TV의 [쇼쇼쇼]와 MBC-TV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도 ‘건전을 강요하는’ 환경 하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위에 언급한 기사는 또한 ‘도저히 못 해 먹겠다’는 뉘앙스를 담은 한 쇼 PD의 한탄도 싣고 있다. 그러니 음반도 방송도 4년 가까이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그 사이 기간에 ‘대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6년 말부터 시작해서 1977년 한 해를 강타한 곡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최헌의 “오동잎”이었다. 1977년 4월의 한 일간지 기사에 의하면 조용필의 음반은 10만장, 최헌의 음반은 5만장이 각각 판매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다([한국일보], 1979.4.17.). 앞서 언급할 기회를 놓친 김훈의 “나를 두고 아리랑”과 더불어 이 곡들은 이른바 ‘트로트 고고’, ‘로꾸뽕’으로 불리는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그 뒤를 이어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다시 최헌의 “앵두”, 장계현의 “나의 20년”, 조경수의 “아니야”,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 등 1976~7년 경의 히트곡들이 줄을 이었고, 이들은 1970년대 말까지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등의 여가수들과 더불어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당시를 살지 않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 시리즈를 대충이나마 읽은 사람이라면 이들의 이름이 귀에 익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이제까지 고고 클럽 씬에서 그룹 사운드의 싱어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복습’하는 기분으로 다시 짚어보자. 최헌은 챠밍 가이스, 히 식스, 검은 나비를 거쳐 이 무렵에도 불나비라는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조용필은 기지촌에서 수많은 밴드들에서 경력을 시작한 뒤 김 트리오를 거쳐 이때는 자신의 그룹 그림자를 이끌고 있었다. 김훈은 이 시기에도 트리퍼스의 보컬이자 리더였고, 장계현은 템페스트의 보컬을 거쳐 자신의 그룹 하얀 날개를 이끌었고, 윤수일도 함중아와 함께 골든 그레입스에 있다가 나와서 솜사탕을 결성했다. 최병걸과 조경수는 정성조가 이끈 메신저스 출신이다.

그런데 이상에서 언급한 인물들은 ‘그룹’에서 ‘록’이나 ‘소울’을 연주한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왜 갑자기 ‘솔로’로 ‘트로트’를 부르게 된 것일까. 이제 그 속사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단, ‘가수’보다는 그 배후의 제작자(프로덕션)와 작·편곡자에 주목하기로 하자.

킹, 서라벌과 손잡고 살아남다: 조용필과 윤시내(사계절)의 경우

킹 프로덕션, 그리고 ‘킹박’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박성배 사장은 ‘신중현 사단’과 연관된 인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신중현 사단이 궤멸된 이후에도 킹박의 비즈니스는 계속된다. 신중현은 이미 1973년 말에 지구 레코드로 적(籍)을 옮겼고 김추자, 장현, 박인수, 박광수는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을 정지당했지만 킹박은 재능있는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려고 했다. 청계천 바닥에서 ‘보따리 장사’로 활동한 이력은 엄혹한 상황에서도 잡초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했다.

윤시내 외 [Hit Rotary vol.1 – 새야 날아라] (SLK-1005, 1976.3.25.)
양희은 [한 사람/세월이 가면] (SLK-1006, 1975.12.25.)
조용필/영 사운드 [너무 짧아요/돌아와요 부산항에] (SLK-1009. 1976.?)
사계절 [사계절] (SLK-1012, 1976.3.25.)
양희은 [내님의 사랑은/작은 배](SLK-1014, 1976.9.30.)
조용필 [님이여/어디로 갔나요] (SLK-1021, 1976.7.10.)
송창식 [사랑이야/나의 키타 이야기](SBK-0002, 1978.7.11.)
양희은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천릿길] (SBK-0010, 1979.1.5.)

위 음반들의 일련번호를 유심히 보면 KLS로부터 SLK로, 그리고 1978년 이후에는 SBK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S로 시작하는 새로운 일련번호의소유주는 서라벌 레코드다. 즉, 킹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음반을 배급하는 음반사의 상호가 유니버살에서 서라벌로 바뀐 것이다. 음반의 주인공들의 면면을 보아도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계열의 인물들 가운데 대마초 파동을 피해간 거물들이 여전히 킹박의 휘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하사와 병장, 박헌룡, 이주원 등이 싫든 좋든 킹박의 손을 통해 음반을 발표했다.

물론 자체 제작을 전혀 하지 않고 킹과 애플에서 제작한 음반을 임가공하기만 했던 유니버살과 달리 서라벌은 자체적으로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고 킹 프로덕션 이외의 프로덕션의 음반을 대명제작해주기도 했다. 뒤에서 볼 노만기획(노만 프로덕션)이 대표적 케이스다. 서라벌의 이흥주 사장은 1970년대 중반의 오리엔트와 1980년대 중반 동아기획의 과도기에 ‘다른 음반사에서 외면하는 음반을 제작해 준 인물’로 꼽을 만하다. 산울림, 사랑과 평화, 노고지리, 정태춘, 박은옥, 피버스(열기들), 이명훈 등의 이름을 열거한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지금은 일단 1975-6년의 기간에 ‘킹 프로덕션이 서라벌 레코드를 통해 제작한 음반’으로 시야를 좁혀 보자. 양희은은 데뷔 시절부터 킹박의 산하에 있던 가수였으므로 역시 논외로 하자. 그러면 남는 음반은 조용필과 영 사운드의 합동 음반과 사계절의 음반이다. 조용필과 영 사운드는 이미 낯익은 이름이지만 사계절은 낯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계절은 리더인 신병하가 [애마부인]과 [남부군] 등의 영화음악을 만들었고 이동원, 주정이(산이슬), 홍삼 트리오 등의 편곡을 맡았던 인물이라고 말하면 좀더 친숙하게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 시기 사계절에는 윤시내(!)와 유현상(!)이 멤버로 있었다. 앞의 음반 리스트에서 첫 줄에 있는 컴필레이션 음반의 타이틀곡인 “새야 날아라”가 신병하 작·편곡에 윤시내가 부른 곡이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한편 안치행이 이끌던 영 사운드는 1973년 경 TBC-TV의 젊은이용 프로그램 [오라 오라]의 전속 하우스 밴드를 맡는 등 그룹 사운드계에서는 이미 인기 정상에 올라 있는 존재였지만 1975년 경 내분이 일어나서 그룹으로서의 생명력은 거의 다한 상태였다. 안치행이 만든 “등불”, “달무리”, “대학가의 찻집” 등, 영 사운드가 1970년대 초반에 활동한 그룹 사운드로서는 드물게 자작곡의 비중이 높았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주)이 프로그램은 [쇼쇼쇼]의 PD로 저명한 ‘쇼 프로그램 제작의 귀재’ 조용호가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양희은과 서유석이 MC를 맡았다. 이 프로그램의 전신으로 1972년 경 제작된 [원 투 쓰리 고 고]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한국판 ‘소울 트레인’같은 것이었다. 두 프로그램 모두 ‘문공부의 한 마디’로 인해 도중하차했다. 조용호는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과 히 식스의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의 작사자이며, 오비스 캐빈의 실세이자 ‘위탁 연출자’이기도 하다. 히 식스는 1971~2년 경 [쇼쇼쇼]의 전속 밴드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김홍탁은 조용호를 ‘정신적 지주’라고 말한 바 있다.

이상의 사실들로부터 킹박의 전략을 추측해 본다면, 그것은 신중현 사단의 전성기때처럼 능력있는 작편곡가를 포섭하고 그들의 곡을 부를 ‘퀄리티 싱어(quality singer)’와 짝을 맞추는 것이다. 안치행과 신병하를 ‘신중현처럼’ 만들고, 조용필과 윤시내를 ‘장현이나 김추자처럼’ 만드는 것이라고나 할까. 방송가에 홍보를 하지 않고 음악의 질로 승부하는 전략도 여전했다. 이런 전략은 ‘여전히’ 적중했다. 물론 사계절의 ‘어려운’ 음악은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윤시내의 성공은 조금 뒤에 찾아왔다. 조용필과 영사운드의 합동 음반도 발매 초기에는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렇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발매된 지 한참 뒤인 1976년 말부터 슬슬 입소문이 나더니 마침내 1977년 초반 대중음악계를 강타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이 음반에서 ‘미는 곡’이 아니었고, 작곡가도 안치행이 아니라 부산의 무명 작곡가 황선우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곡은 김 트리오 시절 녹음한 [조용필 스테레오 히트 앨범 vol.1](아세아 1972.?)에 ‘어쿠스틱 버전’으로 수록된 바 있으니 ‘리메이크 버전’인 셈이다.

조용필 – 돌아와요 부산항에(1972)
조용필 –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
조용필 – 돌아와요 부산항에(198?)

이 곡의 히트가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한국 방문’과 시기가 맞아 떨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 인기의 원인을 단순히 ‘사회사’에 돌려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음악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트로트의 악곡 형식과 단조의 멜로디를 2박자의 트로트 리듬이 아닌 4박자의 고고 리듬과 결합시킨 편곡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고고 리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형화된 패턴을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록 음악의 리듬 가운데 ‘댄서블’한 것이라고 답변하겠다. 1970년대 후반 대학가의 고고 파티에서 즐겨 연주되던 곡이 C.C.R.의 “Proud Mary”, 레어 어쓰(Rare Earth)의 “Get Ready”나 ELO(Electric Light Orchestra)의 “Last Train to London” 등이었다는 정보가 감을 잡는데 도움을 줄지 모르겠다. 가장 단순한 드럼 패턴은 ‘쿵쿵딱쿵 쿵쿵딱쿵’거리면서 ‘딱’에 강세가 들어가는 형태다(물론 리듬 기타와 베이스 기타의 패턴은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뽕짜자 뽕짝’거리는 트로트 리듬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트로트의 요소는 여기저기 숨어 있다. 사운드 면에서 전기 기타와 바이올린을 적절히 조화시킨 점도 특기할 만하다.

불운하게도 조용필은 이 곡이 히트하자마자 대마초 흡연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어 중도하차하고 말았고 뒤이어 발표한 [님이여/어디로 갔나요](SLK-1021, 1976.7.10.)는 제대로 홍보도 못한 채 사장된 음반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조용필을 다루는 글이나 방송에서 구구절절 언급되는 일이니 긴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자. 그렇지만 트로트 고고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 곡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시기를 풍미하는 양식이 되었고, 그 주역은 킹 프로덕션으로부터 안타 프로덕션으로 이동했다.

안타 프로덕션, 작곡가가 비즈니스맨이 되다

1977년 4월 한 일간지 기사는 “가요계 판도 바꾼 두 히트곡”이라는 타이틀로 두 곡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일단 인용부터 해 보자. “1, 2위를 차지한 두 곡은 디스크 제작사가 킹·서라벌이라는 점 이외에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노래가 현대감각을 가미한 뽕짝조이고 노래를 부른 가수가 그룹 사운드의 멤버로 활약하다 솔로 가수로 데뷔한 점이다. 이밖에도 두 가수가 데뷔한 지 5년 이상된 중고 신인 가수이며, 똑같이 그룹 사운드 영 사운드의 리더로 활약한 작곡가 안치행씨(35)의 곡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조용필이나 최헌이 준비하고 있는 곡이 전부 안치행씨의 곡이다”([한국일보], 1977.4.17.). 그룹 사운드의 비사(秘史)를 아는 사람이라면 두 인물이 1970년 경 히 식스의 여섯 번째 멤버로 서로 경합을 벌였다는 사실도 지적할 것이다.(그때의 승자는 최헌이었는데 이유는 그의 허스키한 음색이 조용필에 비해 당시 히 식스의 리드 보컬인 이영덕의 매끄러운 음색과 대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20030228010801-0504series01_hitlogo힛트 레코드 로고

하지만 위 기사에서 맨 처음 언급한 ‘디스크 제작사가 킹·서라벌’이라는 점은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조용필의 음반을 킹·서라벌에서 제작한 것은 틀림없지만, 최헌의 음반은 ‘힛트 레코드’라는 레이블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음반은 LA-001이라는 일련번호에서 추측할 수 있듯 신흥 음반 프로덕션의 최초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프로덕션의 이름은 ‘안타 프로덕션’이다. 안타 프로덕션과 히트 레코드? 같은 것 아닌가? 아니다. 히트 레코드는 제조시설을 보유한 음반사로서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안타 프로덕션은 새로 설립된 프로덕션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면 히트 레코드는 안타 외에도 다른 여러 프로덕션들의 대명제작을 해주었다. 당시 상황을 오늘날에 비유해 볼 때 최헌이 조성모라면, 안타 프로덕션은 GM 기획이고, 히트 레코드는 도레미 레코드다. 아, 참 2001년 이전의 조성모의 경우를 말한다.

주) “오동잎”이 수록된 음반이 제작된 시점은 1975년 12월29일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녹음을 빨리 했더라도 대마초 파동 이전의 시점이고 작사나 작곡은 그 이전일 것이다. 즉, 흔히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안타 프로덕션의 ‘트로트 고고’ 프로젝트를 대마초 파동 이후의 즉흥적 대응으로 볼 수는 없고, 그 이전부터 구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최헌이 솔로 가수로 데뷔한 작품은 이 음반이 아니라 “가로등 불빛 아래”, “들리지 않네” 등이 수록된 이연실(!)과의 합동 음반(성음, SEL 200010, 1973)이다. 이 음반은 음반사가 성음이라는 점, “들리지 않네”가 조동진의 곡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나현구가 제작한 작품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홍탁 이후의 히 화이브/히 식스는 [골든 포크 앨범] 시리즈에도 참여했다. 나름대로 수작이고 ‘뽕끼’는 거의 없는 이 음반은 최헌의 경력에서 히 식스와 검은 나비 사이의 기간에 해당되는 시점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의 다소 복잡한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타 프로덕션이란 안치행이 영 사운드에서의 연주인 생활을 접고 직업적 작곡가로 변신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조용필/영 사운드]의 음반을 킹/서라벌에서 제작·배급한 것은 안타가 정착하는 과도기에 발생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위 기사는 오보인가? 명확히는 알 수 없다. 원래는 히트 레코드의 상호를 달고 발표했지만 판매 성적이 시원치 않자 킹박의 수완을 이용하여 판매와 배급을 위탁한 것인지도… 킹박은 만날 길이 없고 안치행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확인할 길은 없다.

안치행과 안타 프로덕션은 몇 개의 곡이 성공을 거둔 뒤에는 킹/서라벌은 물론 히트 레코드로부터도 독립하여 몇 개 프로덕션과 힘을 모아 현대음반이라는 음반제작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렇게 독립 프로덕션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뒤 음반 제조시설을 갖춘 음반사를 새로 만드는 방식이 한국에서 음악산업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업자가 없다면 출발부터 ‘프로덕션’으로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럴 땐 독립 프로덕션이라기보다는 ‘개인 제작자’일 뿐이고, 대부분은 ‘가수 매니저’다.

그렇다면 안치행과 안타 프로덕션이 처음부터 사업체로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동업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안치행, 최헌, 김기표, 이태현이 안타 프로덕션의 4인방이다. 마치 더 멘(The Men)이나 검은 나비의 라인업같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때부터는 ‘안치행(기타), 최헌(보컬), 김기표(키보드), 이태현(베이스)…’라는 식의 음악적 분업이 아닌 새로운 역할 분담이 생겼다. 안치행과 김기표는 작곡과 편곡을, 최헌은 간판 가수를, 그리고 이태현은 비즈니스를 담당했다. 안치행이 대표가 된 것은 ‘집을 잡혀서 대출을 받아’ 자금을 댔기 때문이다. 만약 트로트 고고에 대해 뜨악해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양식의 음악을 탄생시킨 주체가 ‘신중현의 사이드맨들’이었다는 점에 놀랄 것이다.

안타에서 제작한 작품들은 히트 행진을 계속했다. 최헌은 “오동잎”에 이어 비슷한 스타일의 “앵두”와 “순아”, 그리고 발라드풍의 “가을비 우산속”, “구름 나그네”를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대마초 문제로 도중하차한 조용필을 제치고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1978년 말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 타이틀이 최헌에게 돌아간 것이 안타 프로덕션의 영광의 절정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최헌에 이어 윤수일도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시작으로 “갈대”, “유랑자”, “추억”, “나나” 가 이어졌다. 윤수일의 성공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1977년 봄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요계’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는 실로 오랜만에 전국의 밤무대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그룹 사운드들이 1971년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사건이었다. 이 행사를 주최한 측이 바로 안타 프로덕션이었다. 일개 음반 프로덕션이 경연대회를 개최한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경연대회가 ‘신인 발굴’을 목표로 개최되었다는 데서도 어떤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

최헌과 윤수일의 성공 이후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 배인숙(펄 시스터즈), 김추자, 박인수, 윤항기, 윤복희 등 거물급 베테랑들도 안타 프로덕션을 통해 음반을 발표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이런 솔로 가수들 뿐만 아니라 안타에 소속된 그룹들도 많았다. 유영춘을 중심으로 라인업을 정비한 영 사운드, 김정수와 급행열차,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김 트리오같은 그룹들이 대표적이다.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쫄딱 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음반들을 들으면서 ‘무언가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연륜이 깊어지고 테크닉은 향상되었지만 1970년대 초 이들이 보여주었던 번뜩임과 날카로움(영어로 표현하면 ‘flash’와 ‘edge’)은 무뎌지고 있다. 이제 그룹 사운드 1세대들은 성인 세대가 되어 가고 있었고, 안타 프로덕션의 작품들은 점점 더 성인지향적이 되어 갔다. (참고로 안타 프로덕션의 핵심 인물들 가운데 연장자인 안치행은 1942년생이고, 연소자인 김기표는 1952년생이다).

안치행이 작곡한 “실버들”(희자매), “울면서 후회하네”(주현미), “연상의 여인”(윤민호), “영동 부르스”(나훈아), “천방지축”(문희옥), “사랑과 진실”(임채무), 그리고 “내 마음은 당신 곁으로”(김정수), “서울 여자”(김수희), “사랑은 차가운 유혹”(양수경), “사랑의 불시착”(박남정), “하얀 바람”(소방차) 등은 장르에 대한 취향을 떠나서 일관성이 없고 불균등하다. 즉, ‘상업적 대중가요’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지만 몇몇 곡의 경우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느낌을 준다.

1970년대 중반 신중현과 송창식을 좋아했고, 1970년대 후반 산울림과 활주로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이런 곡들은 ‘혐오의 대상’ 이상이 아닐 것이다. 이유는 작품의 장르와 질을 논하기 앞서 이런 작품들이 ‘당시 생각있는 젊은이들이 현실에서 경험하던 것’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 그룹 사운드계 최고의 음악인이 모여서 만든 곳에서 만든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또한 그룹 전체가 아니라 솔로 가수만을 스타로 부각시킨 점에서도 기성 가요계 관행과의 타협을 감추기는 어렵다. 그 탓에 최헌, 조용필, 윤수일, 조경수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호랑나비, 그림자, 솜사탕, 매직스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시간이 흘렀으니 이들의 어두운 면도 감싸안을 수 있을까. 그런데 감싸 안든 아니든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면서도, 즉 음악으로 먹고 살면서도 기성의 관행과 타협하지 않는 방법과 수단이 아직도 묘연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록 음악인이 트로트를 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트로트가 여전히 ‘돈이 되는 음악’으로 남아 있는 현실이 문제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 트로트를 ‘발라드’로 바꾸면 이 명제는 지금도 성립한다. 따라서 ‘트로트 고고’는 이른바 ‘록 발라드’의 선구자인 셈이다. 결국 ‘트로트 고고’는 한편으로는 그룹 사운드가 최초로 대중성의 미학에 본격적으로 주목하여 만들어낸 음악이고, 다른 한편으로 정부와 시장과의 문화적 협상이 협소한 상황에서 굴절되고 변형된 음악이기도 하다. 이 두 측면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주) 안타 프로덕션과 관련된 인물들은 1980년대 이후 주류 가요계의 작·편곡자로, 음반 제작자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음반사업이 그 속성 상 몇 개만 실패해도 부도를 내기 십상이고 안타도 몇 번의 위기를 맞았지만 안치행은 지금도 ‘사운드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안타의 계보를 잇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이태현은 ‘나훈아 쇼’를 몇 번 맡아 성공시키더니 공연기획사 서울기획을 창립하여 독립했다. 요즘도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대형 공연’은 서울기획이 없이는 성공적으로 치를 수 없다고 한다.

1970년대 말, 그룹 사운드의 쓸쓸한 뒤안길

대마초로 모든 것이 작파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앞에서는 안타 프로덕션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나머지 인물들도 대체로 비슷한 길을 걸었다. “나를 두고 아리랑”의 김훈은 트리퍼스 이래로 애플 소속이고, 최병걸은 서판석이 경영하던 ‘서 프로’ 소속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장계현과 조경수는 메이저 음반사인 오아시스를 통해 음반을 발표했지만 이전 시기의 전속 계약보다는 느슨한 것이었다.

주) ‘서 프로’의 대표 서판석은 처음에는 개인 제작자로 지구레코드를 통해 소속 가수의 음반을 대명제작한 인물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정선과 선우혜경이었다. 이정선은 그를 ‘서뽕’이라고 불렀는데 최병걸에게 뽕짝을 부르게 종용한 인물이 바로 서판석이었다고 한다.

종합한다면 1976~8년의 시기는 그룹 사운드 출신의 솔로 가수들이 기성 가요계의 스타들을 제치고 처음으로 ‘전국구 인기가수’가 된 시기였다. 이는 1977년 경 이미지와 패티 김은 물론 남진과 나훈아가 일선 무대에서 퇴장한 사실로도 확인된다. 남진은 1977년 가을 ‘제 5회 리싸이틀’을 기획하여 전국을 순회했지만 공연장이 텅텅 비다 시피했다. 그가 “인기는 썰물과 같다”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된 충격적 사건이었다. 나훈아의 경우는 군에서 제대한 1976년 이후 김지미와 동거하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기회가 쉽사리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렇게 트로트계 슈퍼스타들의 장기집권이 끝나고 그룹 사운드 출신들이 모처럼 미디어를 장악했지만 ‘승리의 기쁨’은 그래 오래 가지 않았다. 음반시장은 장기 침체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고, 사전검열을 통한 정부정책은 계속 근엄했고, TV 쇼 프로그램은 맥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1977년 조용필과 최헌의 음반이 ‘대박’을 기록하고 히트곡이 이어지면서 1978년 봄에는 “때아닌 그룹 사운드 선풍”([주간여성], 1978. 4. 2.)이라는 식의 기사가 등장한다. 이 기사는 이 시점에 서울에서 활동하는 그룹의 수만 총 98개팀으로 한때 30여개로 위축되었던 때와 비교하고 있다. 단지 히트곡 몇 개가 나온 것이 아니라 ‘씬’이 활성화되었다는 이야기다. 밤무대에 선다는 이유로 ‘박쥐떼’로 불리고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사회적 탕아’ 정도로 간주된 그룹 사운드가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와 무대의 활성화를 동시에 달성한 것이다.

주) 위 기사에서 트로트 고고(이 기사의 표현은 ‘뽕짝 고고’)의 성공 비결에 대한 논의는 흥미롭다. “그룹 사운드들이 10여년 넘게 고고 클럽, 캬바레 등에서 밤새워 연주해 온 고고 리듬은 이미 수백만의 고고 팬을 형성해 왔고 그 계층도 10대 소년·소녀층에서부터 중년·노년층에 이르기까지 가림없이 영향을 미쳐 왔으며 그것이 전통적인 뽕짝과 매치되었으니 새로운 흐름을 이루지 않을 수 없다”([주간여성], 1978.4.2.)

그렇지만 그 뒤의 사건을 종합해 보면 그룹 사운드가 ‘때아닌’ 붐을 맞이한 것은 그와 동시에 그룹 사운드의 내리막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룹 사운드의 일상적 공간인 나이트클럽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나이트클럽은 그룹 사운드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공간으로부터 DJ가 판을 틀어주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른바 디스코의 물결이 한국에도 상륙했고, 춤 역시 고고로부터 디스코로 변하고 있었다. 실버 컨벤션(Silver Convention)의 “Fly Robin Fly”, 조지 베이커 셀렉션(George Baker Selection)의 “Paloma Blanca”, 도나 서머(Donna Summer)의 “Hot Stuff” 등을 필두로 아바(Abba)의 “Gimme Gimme Gimme”, 이럽션(Eruption)의 “One Way Ticket”, 보니 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 Bahama Mama”, 징기스 칸(Ghenghis Khan)의 “Ghengis Khan”, 빌리지 피플(Village People)의 “YMCA”를 거쳐서 레이프 가렛(Leif Garret)의 “I Was Made for Dancing”, 바카라(Baccarach)의 “Yes, Sir I Can Boogie”, 둘리스(The Dooleys)의 “Wanted””, 놀란스(The Nolans)의 “Sexy Music”, 아라베스크의 “Hello Hello Mr.Monkey”에 이르기까지. 이들 ‘말 달리는’ 곡들은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 지극히 복잡하고도 엄혹한 정치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이트클럽의 플로어에서 울려 퍼졌고, 몇몇 곡들은 번안곡으로도 만들어져 가요로서도 히트했다. 박지영의 “그 사람 목석”, 방미의 “날 보러 와요”, 조경수의 “YMCA”, 현철의 “그대와 춤을” 등.

이런 나이트클럽의 레퍼토리가 변하는 과정은 ‘고고클럽’이 ‘디스코텍’으로 변하는 과정과 거의 일치했다. 속어를 사용하면 ‘닭장’이 ‘디텍’으로 변했고 [– 닭장과 디텍은 동시대에 같이 쓰인 속어임]라이브 무대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룹 사운드들 가운데 A급에 속하는 경우는 고급 호텔의 나이트클럽의 무대에 서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하의 그룹 들은 ‘변두리’와 ‘지방’을 전전하거나 이런저런 단발성 이벤트에서 풍악을 울려대면서 살아야 했다. 이런 이력은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묘사된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호텔 및 고급 나이트클럽을 무대로 삼는 A급의 유명 그룹 사운드들이라고 해도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들은 뜻밖의 복병을 만나야 했는데, 다름 아니라 외국에서 온 밴드들, 주로 ‘필리핀 밴드’들이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경제성장을 추진한 결과 이 시점에 이르면 한국의 임금수준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높은 수준에 달했고 그 결과 필리핀 밴드는 한국의 그룹 사운드보다 ‘인건비’가 쌌다. 게다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클럽의 경우 영미 팝을 주로 연주하므로 영어 가사의 발음이 상대적으로 유창한 필리핀 밴드를 선호했다.

고고 클럽과 더불어 라이브 무대를 제공했던 생음악 살롱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79년 제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는 경제학자들이 ‘구조적 위기’라고 부르는 심각한 상태로 이어졌고, 그 여파로 생음악을 연주하는 공간은 하나둘씩 급격히 사라졌다. ‘그룹 사운드의 성지’로 불린 오비스 캐빈이 1978년에 문을 닫은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생음악 살롱과 고고 클럽을 운영하던 업주들은 성인용 나이트클럽이나 캬바레로 업소의 성격을 바꾸든가 아니면 아예 다른 사업으로 돈을 빼갔다. 1970년대 후반은 ‘강남 개발’로 인한 투기 열풍이 불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너도 나도 일확천금을 노리던 시기이다. 이럴 때 돈이 되지 않는 업소를 ‘문화 공간’으로 계속 운영할 사람은 드물었다. 정부의 보조금? 그런 건 꿈을 꾸지 말자. 이렇게 해서 ‘명동의 시대’도 저물어 갔다.

정리한다면 억압적인 정부정책, 음악 테크놀로지의 변화, 밤무대의 경제적 압박이라는 3재(災)가 겹치면서 그룹 사운드 1세대들은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하고 무대에서 서서히 퇴장하고 있었다. 극장 쇼의 쇠퇴가 트로트와 악극단의 몰락을 가져왔다면, 고고 클럽의 쇠퇴는 그룹 사운드의 몰락을 가져온 셈이다. 그러니 ‘트로트 고고’라는 합성어를 이루는 두 단어인 트로트도, 고고도 시대의 변화를 버텨내지 못한 셈이다.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가 “Miss You”를, 키스(Kiss)가 “I Was Made for Loving You”를 부른 것처럼 한국의 그룹 사운드들도 디스코를 연주하면서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차이가 있었는데 한국의 그룹 사운드들이 연주한 디스코는 대부분 번안곡이었고 1970년대 중반 그룹 사운드 1세대들이 어렵게 개척한 ‘한국적 록’의 성과와는 큰 관련이 없었다.

다시 ‘트로트 고고’로 돌아와서 정리해 보자. 트로트 고고는 음악 양식의 경계를 넘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과 지방, 청년과 성인의 경계를 넘어 ‘크로스오버 히트’를 기록한 스타일이었다. 대학생 엘리트들이 외면하고 독재 정부는 방치하는 묘한 틈새에서 서식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았다면 1976년 말 ~ 1977년 초 몇몇 음반이 5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한 현상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이런 음악을 ‘내 이야기야’라고 하면서 미치도록 좋아한 수용자, 특히 젊은 수용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TV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올 때 들으면 싫지 않고, ‘야전(야외전축)’을 들고 나가서 함께 춤추기에는 좋았다(1970년대 후반의 풍속도 중의 하나는 ‘교련복 입고 디스코 추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곡이 계속 나오면서 돈 주고 구입하여 고이 소장할 만한 음반이라는 가치는 줄어들었다. 최헌의 예를 들자면 “오동잎”은 나름대로 신선했지만 “앵두”와 “순아”가 이어지면서 흥미는 반감되었다. 1977년의 반짝 상승 이후 음반 시장이 다시 위축된 현상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1970년대 후반은 음반과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인켈이나 롯데 파이오니아에서 국산 보급형 ‘컴퍼넌트 오디오’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했고, FM을 통한 스테레오 방송도 일반화되었다. 컴퍼넌트 오디오보다는 음질이 좋지 않았지만 휴대용이라는 강점을 가진 카셋트 재생기(이른바 ‘붐 박스’)도 널리 보급되었다. 이런 혜택을 받으면서 자란 10대들은 듣는 귀가 확 트였다. 이런 10대들에게 트로트 고고의 음반들은 ‘경쟁력’이 크지 않았다.

또한 ‘빽판’에 비해 깨끗한 음질을 가진 ‘라이센스 음반’이 대량 배급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판매용 카셋트 테이프도 등장했다. 이들 가운데 외국에서 제작된 음반들은 ‘멀티트랙 레코딩’으로 녹음된 것들이었다. 빽판이든 라이센스판이든 딥 퍼플(Deep Purple), 퀸(Quee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강력하면서도 오묘한 사운드를 듣고 넋이 나간 사람이 ‘트로트 고고’에 열광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이 시기 젊은 청중이 ‘가요’를 외면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미학적 이유 혹은 공학적(!) 이유 때문이었다.

주) 예를 들어 조하문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록 음악을 즐겨 들었다. 내 맘에 드는 음반은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았거나 발매가 되었더라도 금지곡은 삭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빽판을 주로 사서 들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장희씨가 진행하던 “0시의 다이얼”, 윤형주씨가 진행하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같은 프로를 즐겨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요는 절대 듣지 않았다”(안성민(1998), [캠퍼스 그룹 사운드 붐](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 논문), p.26). 조하문은 연세대학교 78학번으로 1980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마그마라는 그룹으로 출전하여 “해야”(박두진 시·조하문 작곡)로 은상을 받으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그 뒤 마그마라는 이름으로 한 장의 독집 음반을 발표했고 솔로 가수로서도 몇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이 밤을 다시 한번”,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등. 현재는 기독교 목사로 살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음반 컬렉터’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이 이 무렵부터다. 무엇으로 증명하냐고. 단적으로 말해서 이 시점 이전에 나온 음반들은 지금 ‘희귀 음반’ 아닌가. 가요는 안 모으지 않았나.. 그렇지만도 않다. 다음 두 그룹의 음반들은 당시에도 ‘젊고 신선한’ 사운드로 들렸고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랑과 평화, 다른 하나는 산울림이다. 1978년에 데뷔한 두 그룹들 가운데 산울림은 이제까지 우리가 보았던 그룹 사운드와는 다른 계보에 속하므로 다음에는 사랑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20030214 | 신현준 homey@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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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한국 록 음반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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