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117024613-xtcXTC – Skylarking – Virgin, 1986/2001

 

 

계절과 인생의 이중주

영화는 흔히 감독의 예술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음악을 프로듀서의 예술이라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그럴 수밖에 없다. 영화는 감독의 이름으로 출시되지만 음반은 프로듀서가 아닌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발표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로듀서는 종종 아티스트의 음악적 비전을 구체화시키는데 필요한 기술적 자문역 정도로만 간주되곤 한다. 최근 힙합 분야에서 뮤지션의 명성을 능가하는 스타 프로듀서들이 대거 등장하고는 있지만 음악은 기본적으로 아티스트의 예술이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지배적인 관념이다. 비록 과거의 몇몇 선례가 있다고 해도 작가주의 프로듀서라는 것은 아직도 그리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섣불리 작가주의를 주장하고 나섰다가는 자의식 강한 아티스트의 반발을 사기 십상이다. [Skylarking]은 작가주의 프로듀서와 창조적 아티스트의 만남이 명작의 탄생으로 이어진 드문 사례 중의 하나다. 물론 그 과정이 절대로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XTC와 프로듀서 토드 런그렌(Todd Rundgren)은 창조적 주도권을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대결을 벌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육탄전에 돌입할 만큼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앨범의 음악은 그것이 이러한 갈등과 대립의 산물이었음을 전혀 믿을 수 없을 만큼 지극히 평화롭고 목가적이다.

[Skylarking]은 일종의 컨셉트 앨범이다. 한여름부터 늦가을에 이르는 계절과 기후의 변화가 성장과 사멸이라는 인생의 과정과 결부되어 하나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앨범의 이러한 구조를 만든 것은 바로 프로듀서 토드 런그렌이다.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전 XTC는 새롭게 작곡된 곡 35개를 토드 런그렌에게 발송했다. 그는 이 중 14곡을 앨범 수록곡으로 확정했고 이 곡들을 일정한 순서대로 배열함으로써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앨범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컨셉트 앨범은 아니다. 실제로 앨범이 지닌 이야기의 흐름과 연결은 긴밀하다기보다는 느슨하고 철저하다기보다는 개략적이다. 전체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 트랙들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이 점은 이 앨범의 약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점이다. 대개의 컨셉트 앨범들이 주제를 살리기 위해 음악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이 앨범의 트랙들은 처음부터 주제와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쓰여진 곡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이 앨범은 개별과 전체가 이상적으로 조화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이 앨범이 비치보이스(The Beach Boys)의 [Pet Sounds], 비틀즈(The Beatles)의 [Magical Mystery Tour], 킹크스(The Kinks)의 [The Village Green Preservation Society] 등에 필적하는 팝 마스터피스로 꼽히게 된 데는 이와 같은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

이 앨범에서 계절과 기후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고 다른 하나는 인생에 대한 비유다. 이 두 가지 용법은 인생의 매듭마다 결합하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하면서 사람과 자연의 상호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크게 4부작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앨범은 유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라는 인생의 각 단계를 서로 다른 계절의 이미지로 채색한다. 유년기와 결부되는 이미지는 맑은 여름날의 목가적 풍경이다. 정겹고도 나른한 XTC의 노래는 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Summer’s Cauldron”) 그리고 증기 기관차 소리(“The Meeting Place”) 등의 효과음과 결합하면서 어린 날의 순박한 낭만과 그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푸근하게 되살린다. 유년기의 낭만을 뒤잇는 것은 청년기의 질풍노도다. 이 단락에서 XTC는 비를 주된 이미지로 삼아 젊은 날의 고뇌와 번민을 그려낸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연인에 대한 저주와 환멸(“That’s Really Super, Supergirl”)은 그럼에도 억누를 수 없는 이별의 슬픔(“1000 Umbrellas”)과 병치된다. 두 곡 사이에 위치한 비 오는 날의 풍경화 “Ballet For A Rainy Day”는 두 곡과 주제상의 연관성은 적지만 비라는 소재를 통해 둘 사이를 이어주는 훌륭한 가교의 역할을 한다.

장년기는 여름이 지나가 버린 초가을의 서늘함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는 곧 인생의 긴 휴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제 인생의 동반자를 찾아 안주해야 할 때다. 그러나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Earn Enough for Us”). 생활전선에서의 힘겨운 분투는 결혼식을 통해 잠시 간의 보상을 부여받는다(“Big Day”).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금새 반전되고 만다.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권태가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Another Satellite”). 모든 것이 지겹고 따분하다. 함께 사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도 자꾸만 신경을 거스른다. 그럴수록 꿈에 젖어 살던 어린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Mermaid Smiled”). 그래도 세월은 가고 계절은 변하는 법… 스산한 늦가을의 이미지는 인생의 황혼기와 오버랩된다. 죽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Dying”). 그러나 죽음은 단순히 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고 자연은 또 다시 새로운 주기를 되풀이한다(“Sacrificial Bonfire”). 결국 이 앨범의 끝은 다시 시작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세대는 다시 태어나고 그들은 똑같은 일로 고통 받고 똑같은 일로 기뻐하다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는 계절의 순환과도 같은 인생의 진리다.

팝 앨범으로서 [Skylarking]은 거의 나무랄 구석이 없는 작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앨범이 지닌 명반으로서의 지위는 여러 면에서 토드 런그렌의 재능에 힘입은 바 크다. 선곡과 배열 뿐만 아니라 현악(“Sacrificial Bonfire”, “1000 Umbrellas”)이나 재즈(“The Man Who Sailed Around His Soul”) 등의 도입을 통해 이 앨범에 독특한 향취를 부여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헌이다. 그러나 애당초 원곡과 연주가 훌륭하지 않았다면 이 앨범은 결코 마스터피스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XTC 역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XTC의 앤디 파트리지(Andy Partridge)와 콜린 물딩(Colin Moulding) 콤비는 초창기인 뉴 웨이브 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송라이팅 팀 중 하나로 평가되어 왔다. 기존의 도식을 철저히 거부하는 작곡과 정치성 짙은 가사는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열렬한 팬 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이들의 작품은 가끔 일반 청중들에게 난삽하고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이들은 과거의 다소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일소하고 잘 다듬어진 멜로디와 원숙한 가사를 들려줌으로써 자신들의 앨범 중 가장 완성도 높으면서도 접근이 용이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앨범은 첫 출시연도인 1986년에도 이미 CD로 발매된 바 있다. 초창기 CD치고는 음질도 상당히 훌륭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음반의 판권을 소유한 버진(Virgin)은 2001년 XTC 전작 재발매 계획의 일환으로 이 앨범의 새로운 버전을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미국 발매연도는 2002년이다). 2001년 버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1986년 버전에서 삭제되었던 “Mermaid Smiled”가 복원되었다는 점이다. 이 곡은 원래 이 앨범의 초판에 잠시 수록되었으나 싱글 B-면 트랙 “Dear God”의 예상치 못한 히트로 인해 그 곡에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오랫동안 실종상태에 있던 이 곡의 재수록은 이번 리이슈가 지닌 가장 커다란 의의라고 할 수 있다(물론 “Dear God”도 앨범의 맨 끝으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2001년 버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많은 리이슈다. 오리지널 LP의 엠보싱 처리된 질감을 되살리기 위해 새로 그렸다는 커버아트만으로는 이번 리이슈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보너스 트랙도 없고 라이너 노트도 없으며 부클릿에 인쇄된 깨알 같은 가사는 돋보기 없이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적어도 포장에 있어서 2001년 리이슈가 새롭게 제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위에 나열한 문제들은 그래도 ‘원작의 가감 없는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음질이다. 최근 발매되는 다른 리이슈 음반들처럼 이 앨범 역시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쳤다고 표기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실제로 1986년 버전에 비해 훨씬 맑고 투명한 소리를 들려준다. 그런데 그 소리가 과히 ‘음악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이 앨범의 음악은 통상적인 팝/록 음악에 비해 좀 더 유기적이고 따뜻한 소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버전의 사운드는 맑고 투명함이 지나친 나머지 경우에 따라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디지털 사운드 특유의 광채 또한 자연을 중심 소재로 한 이 앨범에는 어울리지 않게 매우 인위적으로 들린다. 이러한 사운드의 특성은 몇몇 록 트랙에서는 좋은 효과를 발휘하지만 목가적 분위기가 짙은 첫 세 곡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호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이라는 기술 자체에 내재된 문제라기 보다는 이 앨범의 디지털 리마스터링에 국한된 문제다. 이 앨범과 비슷한 사운드 텍스쳐를 지닌 앨범들 중에서도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20030115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10/10

수록곡
1. Summer’s Cauldron
2. Grass
3. The Meeting Place
4. That’s Really Super, Supergirl
5. Ballet For A Rainy Day
6. 1000 Umbrellas
7. Season Cycle
8. Earn Enough For Us
9. Big Day
10. Another Satellite
11. Mermaid Smiled
12. The Man Who Sailed Around His Soul
13. Dying
14. Sacrificial Bonfire
15. Dear God

관련 사이트
XTC 공식 사이트
http://www.xtcidearecords.co.uk/
XTC 비공식 사이트
http://chalkhill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