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대선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독자로서 2002년은 근래 몇 년 동안 가장 읽을거리가 풍성했던 해였다. 장르 문학이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 해였고 지난해에 이어 유럽 만화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으며, (데즈카 오사무, 나카자와 케이지 등) 이제는 고전이 된 일본 만화가 대거 들어왔다. 또 TV를 비롯한 대중 매체에 책 관련 프로그램이 융성했고, 에코나 베르베르 등 인기 작가의 신작이 발표된 해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읽었던 책들을 정리하며 한 해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모리스 르블랑 (성귀수 譯), [아르센 뤼팽 전집] (까치) 금년도 독서시장의 이슈 중 하나로 추리 소설의 화려한 복간을 들 수 있다. 셜록 홈즈를 필두로 다양한 고전 추리물이 전집의 형태로 나왔고 일부는 출판사간의 과도한 경쟁을 낳았지만, 왜 이런 출판 아이템을 그간 생각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 중 까치에서 나온 뤼팽 전집은 실로 내게 책읽는 즐거움을 한껏 안겨준 작품이다. 홈즈와 대조되는 캐릭터 설정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한 작가가 작가로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뤼팽의 변신을 활용하여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가 하면, 때론 고뇌하는 뤼팽의 심리를 보여주기도 하고, 라이벌을 등장시키는 한편 유럽의 역사 도입을 통해 구성을 확장하는 등… 뤼팽 전집의 소름끼치는 재미는 단연 병문안용으로 최고의 선물이다. 에르네스트 만델 (이동연 譯), [즐거운 살인: 범죄 소설의 사회사] (이후)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범죄 소설(추리 소설)의 성공을 자본주의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 그에 따르면 추리 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팽창에 따른 탈개인화의 산물이자 그런 사회에 균열 내려는 욕망의 반영이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은 추리 소설보다 ‘범죄’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근대 추리 소설의 탄생에서 2차 대전 후 첩보물에 이르는 역사 과정에 대해 기대만큼 많은 문학적 정보를 담고 있지 않지만, 대신 부록으로 실린 작가 목록이 어느 정도 보충을 해준다. 추리 소설의 든든한 가이드이자 비판적 텍스트를 겸해 한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지. 필립 K. 딕 (이지선 譯), [마이너리티 리포트] (집사재) 비록 영화의 은덕에 힘입은 바 크지만 필립 딕의 단편집은 올해 내게 가장 큰 즐거움을 준 작품 가운데 하나다. 과학 소설의 장점 중 하나는 작가가 작품 배경 자체를 전적으로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인데, 필립 딕은 이를 십분 이용하여 기발한 발상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물론 그의 매력은 아이디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의식의 부조리함, 정체성의 혼란 등 철학적 질문에까지 이어진다.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 간결하고 스피디한 전개, 행간에 흐르는 재치와 유머, 아이러니 등 단편 소설의 미덕 또한 보여주는 작품. 까렐 차뻭 (김희숙 譯), [로봇 R.U.R.] (길)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만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는 수많은 고전 중 하나가 조용히 번역되었다. 까렐 차빽의 단편집과 철학 소설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정작 그의 대표작은 세기가 바뀌고 난 뒤에야 이렇게 찾아왔다. 최근 과학 소설과 로봇에 관한 서적들이 심심치않게 출간되고 있다곤 하지만 슬라브권의 희곡 작품을 이렇게 소개하는 데는 분명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텍스트의 힘도 놀라울뿐더러 풍성한 사진 자료와 작품 해설, 게다가 예쁘게 제본된 책 자제를 보는 즐거움도 크다. 아무쪼록 슬라브권 문학을 꾸준히 제대로 소개하겠다는 출판사의 포부가 꺾이질 않길 바란다. 움베르토 에코 (이현경 譯), [바우돌리노] (열린책들) 몇 년마다 한 번씩 찾아와 지적 즐거움을 던져주는 에코는 이번에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허구의 인물 바우돌리노가 12세기 실존 인물인 프리드리히 1세의 양자로 등장하는 이 책은 성배를 찾아 떠나는 모험물이자 중세의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역사물이자 전설상의 동물들이 등장하는 판타지이자 온갖 신학적, 철학적 논쟁이 오고가는 학술서이자 또 살인자를 밝히려는 미스터리물이다. 언어와 신화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 무모하지만 꿈을 찾아 나서는 용기, 인간 존재에 대한 숙명 같은 무거운 주제를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로 엮어내고 있다. 데즈카 오사무 (최윤정 譯), [불새] (학산문화사)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불새를 매개로 하여 고대 일본과 미래 사회를 오가는 에피소드들로 이뤄진 이 만화는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의 필생의 작품이다.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표현은 실로 이 작품에 어울리는 말이다. 방대한 시공간을 오가며 인간의 욕망을 은유하고 있는 이 작품은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대담한 시도들이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아동 만화에서 발전된 미학과 불편함 없이 만난다는 점에서도 놀랍다. 일본 특유의 상상력과 문화 관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흥미를 끈다. 어떤 이유에서든 유명한 작품들은 널리 소개되고 알려져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 (신현승 譯), [육식의 종말] (시공사) 연초 한 텔레비전 방송이 전국을 채식 열풍으로 몰고 갔을 때 출간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육식의 폐해를 소리 높여 고발하는 것을 넘어 소고기의 관점에서 서양 문명사를 다루고 있다. 소고기 소비가 야기한 환경 재앙과 사회 문제는 물론, 소가 육식 문화의 중심이 된 사연, 소고기 문화를 둘러싼 식민주의, 계몽주의, 성차별주의, 계급주의 발상 등 광범위한 문화적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시각에 따르면 인간 사회의 모든 불평등과 갈등은 바로 소고기 문화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음식은 단순히 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 역을 하기도 한다. 마크 애론슨 (장석봉 譯), [도발: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이후) 새로움이 예술가들의 영원한 꿈이라면 아방가르드만큼 설레게 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1820년대 파리에서 1990년대 인터넷 시대까지 진보와 실험으로 점철된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다. 젊은 독자를 상대로 쓰여진 일종의 입문서이고, 많은 부분이 미술에 편중되어 있는 데다가 미국 중심적인 시각이 종종 드러나지만, 아방가르드 자체가 책으로 엮기 곤란한 주제임을 생각한다면 꽤 읽을 만하다. 유용한 정보들과 충실한 사진 자료, 참신한 시각 등을 접할 수 있다. 과연 사회가 아방가르드가 된다면 예술가들은 여기에 어떻게 반항할 것인가. 김용규, [영화관 옆 철학카페] (이론과 실천) 철학과 영화의 만남. 하지만 단순한 만남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술 영화 철학적으로 보기’ 정도가 되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 스크린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한 철학자를 만나게 된다. 즉 이 책은 영화 서적을 가장한 철학서인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신학과 중세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에 마주치게 되는데, 그럼에도 갑갑하다거나 강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저자가 과거의 지식을 (영화라는 모던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현대에 되살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 의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라든지, 희망과 사랑을 인식론의 문제에서 존재론적 문제로 바꿔놓는 저자의 사유는 책읽기를 즐거운 체험으로 만든다. 영화는 물론 삶을 보는 새로운 시각까지 던져주는 보기 드문 책. 윤광준, [윤광준의 생활명품산책] (생각의 나무) 물건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다. 사용자의 안목과 인품, 나아가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그토록 명품에 목을 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값비싼 명품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사진작가로서 저자가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물건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써 내려간 에세이다. 이 책에는 누구든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활용품에서 좀더 전문적인 기능품까지 다양한 품목이 담겨 있는데, 책을 내려놓는 순간 주변의 물건을 새로운 눈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물건 역시 단순히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사용자의 애정과 관심이 더해질 때에만 빛나는 가치와 기품이 있는 것이다.20021221 | 장호연 bubbler@naver.com [weiv]가 뽑은 2002년의 앨범 베스트 [weiv]가 뽑은 2002년의 앨범 베스트 – 필자별 weiver’s choice :[weiv] 독자들이 뽑은 2002년의 앨범 베스트 33 김필호 – Bootleg Galore 2: 2002년의 공연 부틀렉 10선 [weiv]가 뽑은 2001년의 앨범: intro – vol.3/no.24 [20001216] [weiv]가 뽑은 2000년의 앨범: intro – vol.2/no.23 [200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