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31011053-0424yupjuns1엽전들 – 저 여인/생각해/그 누가 있었나봐/나는 몰라 – 지구(JLS 120891), 19740825

 

 

신중현의 자신감, 국악과 록 음악의 결합 만개하다

언제부터 불어닥친 바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위 ‘한국 록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첫 번째 작업으로 진행되었던 ‘신중현 우상화’의 기운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신중현’이라는 대답이 따라 붙도록 만들었다. 물론 한국 록에 있어서 신중현의 위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꼭지점에 해당한다. 하지만 위의 질문에 대답한 이들에게 ‘그렇다면 신중현의 곡 중에서 들어본 곡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미인”(엽전들)과 “아름다운 강산”(뮤직 파워) 이외에는 거의 거론되는 곡들이 없는 걸 보면, 과연 ‘한국 록 역사 바로 세우기’는 제대로 된 작업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미인”과 “아름다운 강산”(처음 녹음한 건 더 멘(The Men)이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단한 곡들이다. 하지만, 그것 밖에는 없는가.

[저 여인/생각해/그 누가 있었나봐/나는 몰라]는 “미인”의 오리지널 버전이 들어있는 엽전들의 데뷔 음반이다. 오리지널이라 함은, 재발매되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미인”과는 다른 버전이란 의미다. 사실 ‘3천만의 애창곡’이 된 “미인”은 이른바 ‘미는’ 곡이 아니었다. 음반 제작의 관행상, 해당 음반에서 ‘싱글 히트'(물론 한국에는 싱글 음반이 없으므로 그 개념은 희박하지만)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곡을 (A면의) 첫 번째 곡으로 놓는 건 당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별도의 음반 타이틀 없이 음반의 대표곡을 커버에 써 놓음으로써 타이틀을 대신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이 음반의 커버에 적혀 있는 곡들은 “저 여인”, “생각해”, “그 누가 있었나봐”, “나는 몰라”이고, A면의 첫 번째 곡은 “저 여인”이다. 당연히 음반에서 히트할 가능성을 점쳤던 곡은 “저 여인”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저 여인” 역시 록에 충실한 빼 놓을 수 없는 곡이지만, ‘노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뒷부분의 리프와 약간의 샤우팅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에서는 가장 히트할 조짐이 보이는 곡이다. 하지만, 정작 히트한 곡은 뒷면의 끝에서 두 번째 곡인 “미인”이었다. 그래서, 엽전들은(드러머가 세션전문이었던 김호식 대신 히 식스 출신의 권용남으로 바뀐다) 수록곡들을 새로 녹음하고 “미인”을 타이틀로 해서 ‘두 번째의 데뷔 음반’을 발표한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엽전들의 데뷔 음반이다(타이틀도 바뀌어 [미인/생각해/그 누가 있었나봐]이다). 다시 녹음된 엽전들의 데뷔 음반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매체에 소개된 바가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소량으로 한정 발매되었던 초판에 한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전의 음반들에서도 언제나 신중현을 따라다니는 강박관념 중 하나였던 국악과 양악의 조화는 바로 이 음반에서 만개한다. 신중현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는 바로 국악의 가락을 이용해서 구미 록 음악의 뼈대가 되는 ‘리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 멘 시절 발표된 지연의 독집 음반 B면에 실린 “그리운 그 님아”가 진화한 형태로 보이는 “할 말도 없지만” 그리고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미인”의 도발적인 리프는 발 박자보다는 어깨를 먼저 들썩이게 하는 우리의 장단이었고, 애드립에 들리는 ‘농현(弄絃)’에서 차용한 주법은 우리의 가락 자체였으며, 국악에 기조를 둔 기타 리프를 베이스 기타와 대위적인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시킨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 외에도 더 멘 시절의 즉흥 연주에서 한 단계 진보한 그루브함을 느낄 수 있는 “그 누가 있었나봐”나 “나는 몰라”, 시끄러운 음악과 현란한 조명만이 싸이키델릭이 아님을 보여주는 나른하지만 섬뜩한 넘버인 “나는 너를 사랑해” 등 어느 곡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자신감에 충만한 음반이 바로 이 음반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시도들과 충만한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 하나로는 그들이 하고자 했던 음악을 모두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도 있다. 이전 그룹인 더 멘의 시절 자신들이 정작 하고자 했던 음악은 음반 뒷면에 수록했던 점을 생각하면, ‘내키지는 않지만 해야 하는 상황’을 드러내는 신중현과 이남이의 대화(“나는 몰라” 중반부), “하고 싶은 그 말은 할 수 없는 말 뿐이야”란 가사(“할 말도 없지만”), 심지어 가사를 뒤집어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나는 너를 사랑해”) 등 이 음반의 뒷면은 정작 엽전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다음 음반으로 유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는 게 사실이다. 물론 당시에는 이 음반의 많은 곡들이 ‘창법 저속’이나 ‘가사 퇴폐’ 등의 이유로 발목을 잡혀버릴 것을 몰랐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엽전들은 가장 물 오른 시기 신중현의 자신감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룹명에 걸맞는,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최정점에 올랐던 그룹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성공적이었던 국악과 양악의 결합을 필두로 여러 시도들이 빛을 발했던 신중현은 역시 하고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음반을 끝으로 타의에 의해 자신의 전성기를 접어야 했다. 그리고 이후 한국의 록 음악은 1970년대 후반 사랑과 평화나, 산울림을 필두로 한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득세 이전까지 어두운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20021231 | 송명하 coner@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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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Side A
1. 저 여인
2. 그 누가 있었나봐
3. 설레임
4. 생각해
5. 긴긴 밤 *
Side B
1. 나는 몰라
2. 할 말도 없지만
3. 미인
4. 나는 너를 사랑해
5. 떠오르는 태양 *
[참고] * 표시된 A, B면 5번 트랙은 뒷면 커버에는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수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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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한국 록 음반 연구회
http://cafe.daum.net/add4
윈드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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