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30064457-0424review_choihun

최헌 – 세월/오동잎 – 힛트(LA 001), 1975

 

 

배반이냐 성숙이냐

1975년부터 시작된 대마초 파동은 한국의 대중예술계를 하루 아침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핵 폭탄이었다. 영화, 코미디, TV 드라마 등 대중예술의 어떤 분야도 무사하지 못했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뭐니뭐해도 대중음악계였다. 대중음악계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처음부터 판을 다시 짜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대마초를 명목으로 수 백 명 예술가의 인생을 앗아간 대통령의 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마약사범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현실은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갑작스레 무주공산이 된 음악계의 극심한 인력난은 대마초 사건의 광풍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의해 메워졌다(남들 다 피우던 대마초에 손을 안대서 살아 남았든, 피우고도 용케 단속망을 피해서 살아남았든 간에 이들의 생존은 ‘운’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들 중에서도 과거 그룹사운드 출신의 가수들은 잇달아 새로운 스타로 등장하면서 폐허가 된 가요계의 재건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대마초 사건 직후의 시기는 흔히 트로트의 왕정복고 시대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룹사운드 출신의 음악인들이 있었다. 트리퍼스 출신의 김훈, 정성조와 메신저스 출신의 조경수와 최병걸 그리고 검은나비 출신의 최헌이 이 시기를 이끈 주역 사인방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 인식에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는 이들의 음악이 과연 트로트였나 하는 점이다. 대중적으로 히트한 곡들만 놓고 봐도 김훈은 전혀 트로트를 하지 않았고 조경수와 최헌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트로트를 다뤘다. 이들 중 본격 트로트를 시도한 적이 있는 가수는 최병걸 한 사람 밖에 없다. 엄밀히 말해서 이들의 음악은 트로트라기 보다는 ‘뽕’의 느낌이 가미된 가요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음악이 트로트로 분류되는 이유는 단순히 그런 음악을 분류할 수 있는 적절한 범주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이러한 범주의 부재 때문에 [가요무대]에 출연하는 가수들의 음악은 지금도 장르를 불문하고 트로트로 뭉뚱그려진다).

두번째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트로트의 왕정복고’라는 말 속에 함축된 ‘대중음악의 질적 저하’라는 평가다. 한국 가요에서 포크의 실종을 문제 삼는 이 평가에는 물론 수긍할 면이 없지 않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포크와 함께 1970년대 초 청년문화의 주역이었던 그룹사운드 음악의 관점에서 보면 ‘트로트=저속’이라는 등식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그룹사운드 음악은 이미 초창기인 키보이스 시절부터 트로트와 깊고도 꾸준한 연관을 형성해왔다. 따라서 이들 사인방이 이 시기에 와서 트로트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타락이라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이들이 이제 창작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록이나 포크가 트로트보다 우월하다는 독단에 빠지지 않는 한 외국 곡을 카피하는 것에서 창작곡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발전이면 발전이지 분명 쇠퇴는 아니다.

최헌의 솔로 데뷔 앨범은 이러한 문제들을 좀 더 깊이 있게 토의해 볼 수 있는 좋은 소재로 기능한다. 그는 챠밍 가이스로 출발하여 히식스와 검은 나비 등 한국 그룹사운드의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서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각광 받았던 인물이다. 또한 그룹사운드 출신으로는 드물게 솔로 데뷔 이전부터 커다란 대중적 인기를 모은 스타이기도 하다. 그가 검은나비를 나와 영사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안치행과 손잡고 만든 이 앨범은 한국 그룹사운드 역사의 적통으로서 최헌의 이력을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그룹사운드 출신 가수들의 솔로 앨범이 그룹사운드 시절과는 크게 다른 음악적 성향을 나타내는 것에 반해, 이 앨범은 두 사람의 그룹사운드 시절 음악적 방향과 취향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룹사운드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미 성공을 경험한 이들의 음악적 자신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룹사운드 음악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해도 이 앨범은 어디까지나 상업성을 지향한 대중가요 음반이다. 그러나 최헌과 안치행은 엘리트 뮤지션들답게 대중에 대한 노골적 아부 보다는 작품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여기서 이들이 생각하는 작품의 질이란 다름아닌 수준 높은 연주다. 블루스와 트로트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세월”의 인트로나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오동잎”의 기타 전주 그리고 군데 군데서 등장하는 재즈 터치의 섬세한 키보드 간주는 이 앨범의 의미와 이들이 경과한 지점을 예리하게 드러내준다. 오랜 그룹사운드 활동을 통해 이들이 도달한 곳은 바로 능수능란한 프로페셔널리즘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 앨범을 시작으로 이들은 주류 음악계를 고도의 프로페셔널리즘이 각축하는 경연장으로 뒤바꿔놓는다. 이 점에서 보면 최헌(및 사인방)의 등장을 대중음악의 질적 저하로 손쉽게 매도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것이 언제나 양 날을 지닌 칼로 작용한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이 앨범은 크게 소프트 록, 발라드, 트로트의 세 가지 스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소프트 록과 발라드 계열의 곡들은 최헌과 안치행이 그룹사운드 시절에 했던 음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당신은 몰라”에 비견될만한 곡이 없고, 새롭게 커버된 “등불”도 오리지널만 못하다는 차이는 있다. 블루스 리듬을 사용한 히트곡 “세월” 정도가 그나마 들을 만할 뿐, 나머지 곡들은 이렇다 할 특징도 없고 기억에도 별로 남지 않는다. 이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흥미로운 곡들은 모두 트로트에 집중되어 있다. 이 곡들은 철저한 트로트면서도 트로트임을 가급적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즉 노래 자체는 트로트지만 그것을 감싸는 연주는 전혀 트로트가 아닌 것이다(송창식이 자신의 노래들을 트로트처럼 보이기 위해 과장된 제스쳐를 취했던 것과는 전혀 상반되는 접근이다). 산타나(Santana)를 흉내낸 사운드의 “지나간 날”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풍의 어쿠스틱 발라드 형식을 취한 “그림자 하나”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문제작 “오동잎”이다. 신나는 고고 리듬에 트로트 선율을 얹은 이 곡은 경쾌하고 스케일 큰 기타 전주와 ‘오텅-닢~’하는 보컬 도입부만으로도 듣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최헌 생애 최고의 히트곡인 이 곡은 송대관의 “해뜰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함께 대마초 파동 이후 주류 가요계의 방향을 제시한 기념비적 작품이다(대마초 사건의 와중에서 스타로 급부상한 조용필은 그 자신이 대마초 사건에 희생됨으로써 일찍 낙마하고 만다). 그러나 이 곡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원죄로 남아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 곡 이후 그는 검은나비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로부터 하루 아침에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평단으로부터는 가요 저질화의 대명사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후 “가을비 우산속”이나 ‘최헌과 불나비’ 등을 통해 명예회복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오동잎”의 선명한 기억을 팬들의 뇌리에서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뮤지션들이 만든 앨범 치고는 이 앨범의 음악은 대단히 무미건조하다. 마땅히 흠잡을만한 곳은 없지만 그렇다고 흥미로운 구석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이 앨범이 최헌의 역사적인 솔로 데뷔 앨범임을 감안하면 이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데뷔 앨범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흥분이나 설레임 같은 것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능숙한 프로들이 일상적이고 냉담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인상만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마도 만드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 앨범의 음악적 내용을 그다지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앨범은 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음악적 영역에 도전한 것도 아니다. 철저히 필요에 의해 계산된 음악을 한 것 뿐이다. 괜한 모험을 하기 보다는 그저 주어진 공식에 따라 안전하게 가자는 의도가 앨범 전체에서 감지되는 것은 이 점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는 최헌과 안치행이 수행한 작업이 트로트 장르의 스타일적 혁신을 이뤘다는 점에서 욕을 먹기 보다는 칭찬을 받아야할 일로 볼 수도 있다. 과거 그룹사운드들의 거칠고 투박한 록 트로트를 매끈하고 세련되게 다듬어 놓은 이들의 음악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트로트 음악을 완전히 바꿔놓을 만큼 영향력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가의 기준은 혁신 그 자체가 아니라 혁신의 의미와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들이 이룩한 혁신이 과연 개선이었는지 개악이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록과 트로트를 결합한 것은 어떤 음악적 모색이나 실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상업적 성공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의도에서 이들은 록과 트로트의 요소 중 잠재적 위험요인이 될 수 있는 야생적 에너지와 감성적 깊이를 안전하게 제거해 버렸다. 형태만 남은 이 두 스타일이 결합되는 지점은 바로 이지 리스닝이었다. 이지 리스닝은 청취자에게 어떠한 도전도 부과하지 않고 아무런 주의 집중도 요하지 않는 상업음악 중의 상업음악이다. 만일 이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저하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음악사의 물꼬를 트로트로 돌렸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지 리스닝을 음악계의 중심으로 끌고 왔다는 점 때문이다. 20021216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0/10

수록곡
Side A
1. 세월
2. 잊었다고 하던 날이 엊그제인데
3. 기억해주렴
4. 오동잎
5. 등불
Side B
1. 가슴 깊이
2. 떠난 후에
3. 지나간 날
4. 사랑하던 마음 하나
5. 그림자 하나

관련 글
‘한국적 록’의 유산(流産)과 유산(遺産): 1974-75 – vol.4/no.24 [20021216]
드래곤스의 보컬 박명길과의 인터뷰 혹은 긴 채팅 – vol.4/no.24 [20021216]
김기표 인터뷰 – vol.4/no.24 [20021216]
프론트맨보다 더 중요한 사이드맨, 이남이와 인터뷰 – vol.4/no.24 [20021216]
이정선 [이리 저리/거리] 리뷰 – vol.4/no.24 [20021216]
양병집 [넋두리] 리뷰 – vol.4/no.24 [20021216]
오세은 [우리 애인/고아] 리뷰 – vol.4/no.24 [20021216]
김의철 [김의철 노래모음] 리뷰 – vol.4/no.24 [20021216]
김인순 [비오는 날에는/초저녁별(안건마 편곡집)] 리뷰 – vol.4/no.24 [20021216]
엽전들 [저 여인/생각해/그 누가 있었나봐/나는 몰라] 리뷰 – vol.4/no.24 [20021216]
히 식스 [당신은 몰라/아름다운 인형] 리뷰 – vol.4/no.24 [20021216]
검은 나비 [Album Vol. 1] 리뷰 – vol.4/no.24 [20021216]
최헌 [세월/오동잎] 리뷰 – vol.4/no.24 [20021216]
김훈과 트리퍼스 [나를 두고 아리랑/사랑의 추억] 리뷰 – vol.4/no.24 [20021216]
양키스 [Yankee’s GoGo 크럽 초대] 리뷰 – vol.4/no.24 [20021216]
신중현 & 더 멘 [거짓말이야/아름다운 강산] 리뷰 – vol.4/no.24 [20021216]
배리어스 아티스트 [골든 포크 앨범 Vol. 11: 바보들의 행진] 리뷰 – vol.4/no.22 [20021116]

관련 사이트
한국 록 음반 연구회
http://cafe.daum.net/add4
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윈드버드
http://www.windbird.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