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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과 트리퍼스 – 나를 두고 아리랑/사랑의 추억 – 유니버어살(K Apple 810), 19750810

 

 

‘여행자들’은 브래스 록의 여정 속으로 향하고…

1970년대 초·중반, 많은 ‘그룹 사운드’들이 브래스들을 들고 고고 클럽에 나타났다. 잠시 그때의 한 클럽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화신 옆 지하철 입구, 아카데미 극장 옆 골목에 1974년 8월경 개업한 파노라마를 비롯해, 허리우드 극장 앞 낙원빌딩 4층에 1975년 봄 개업한 파랑새 같은 클럽에 한 밴드가 연주하고 있다. ‘고고’의 유행과 더불어 문을 연 새로운 클럽 중 일부였던 이 무대에서 그들은 휘황한 조명의 번쩍임 아래, 많은 한국의 밴드들이 전범으로 삼았던 시카고(Chicago)의 노래들부터, 딥 퍼플(Deep Purple)의 하드 록 넘버들을 연주한다.

이러한 풍경은 김훈과 트리퍼스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파이오니아스(Pioneers), 키 브라더스(Key Brothers) 등 많은 밴드들이 이른바 ‘브래스 록’의 급물살을 탔다. 1973년 이후, 김훈(보컬)이 이끄는 8인조 김훈과 트리퍼스를 필두로, 신시봉(드럼)이 이끄는 신시봉과 트리퍼스, 김선민(기타)을 주축으로 한 자이언트로, 트리퍼스가 분열되어 활동했다는 점은 1971년 데뷔작 [Trippers Go Go] 리뷰에서 본 바 있다. 이 중에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트리퍼스의 자식’은 김훈과 트리퍼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김훈=나를 두고 아리랑’이라는 공식으로들 알고 있으리라.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김훈의 두껍고 텁텁한 목소리 톤일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떠올릴 김훈(과 트리퍼스)의 출세작 “나를 두고 아리랑”부터 후끈한 느낌이 느껴진다. 다소 ‘뽕끼’가 느껴지지만, ‘워킹 베이스’로부터 영향받은 듯한 베이스의 운용이나 시원하게 내뿜는 관악 사운드로 이런 기운은 다소 감소(혹은 이와 조화)되는 듯하다. 사실 이 곡보다는 “정주고 내가 우네”가 뽕짜짝 뽕짝 하는 리듬까지 가세해 뽕끼가 더 완연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그 시대 이땅의 그룹 사운드의 존재론이란 것이 우선적으로 기성 작곡가 곡과 영미권 팝/록의 번안곡 사이에 놓인, 그 어쩔 수 없는 비대칭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어찌할까. 그래서 김훈과 트리퍼스의 본작에서도 역시 이런 특징들이 보인다. 그런데 기성 작곡가의 곡을 수록한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도 몇 년 전의 히트곡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옛님”, “그 언제일까”. “메아리”는 1971년 데뷔작 [Trippers Go Go]를 통해 히트했던 김희갑의 작품이다. 이런 곡들에 대해 무작정 ‘울궈먹기’라는 비난의 시선에 앞서 기존의 곡이 얼마나 재해석되었느냐를 꼼꼼히 따져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약간 빠르게 편곡된 1975년 버전 “옛님”은, 부드러운 현악기에 보컬들의 하모니를 강조한 1971년작보다 12/8박자 리듬을 치는 기타나 드럼 라인이 다소 강조되어 있다. 또한 이 음반 발표 당시 브래스 록 밴드답게 배킹 보컬 하모니에 관악기가 함께 응답하는 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곡에서는 관악기가 두드러지게 튀는 강렬한 사운드를 보여주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울려대는 관악기들의 활발한 사운드들 느낄 수 있는 곡은 “메아리”로, 이 곡의 편곡 역시 보컬 하모니 위주로 구성된 1971년작과는 대조된다. 반면 “그 언제일까”는 퍼즈 톤의 기타와 오르간 위주로 구성되고 관악기가 사용되지 않고 현악기가 받쳐준다거나 다양한 보컬들의 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안이하게도 1971년 버전을 그대로 가져온 듯하다. 하지만 이 세 곡들을 통해, 보컬들의 앙상블과 현악기의 수식 위주로 편곡되었던 전작과 대조적으로, 이 음반이 보컬 하모니는 다소 축소되고 관악 편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편곡되었음을 느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이제 김희갑의 곡 이외에 다른 기성 작곡가의 곡이 있는가를 훑어보다 보면 안건마 작사, 작곡의 “몰라주네”에서 눈길이 멈출 것이다. 순간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안건마는 어니언스나 김정호 같은 포크/포크 록(이라고 불린 음악)의 후광을 드리운 작편곡자/연주자 아니던가. 아니, 오히려 포크 가수로 통한 어니언스, 현혜미 등이 부른 이 곡의 전체 사운드가 ‘그룹 사운드’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와 해야 할까. 어쨌거나 1975년 경 어니언스나 김훈과 트리퍼스는 파노라마라는 동일한 무대에 섰던, 일명 ‘이종환 사단’의 일부였으니 음악의 교류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몰라주네”의 어니언스 버전에서는 굵직하고 호방한 베이스 리프가 압도하면서 간주에서 징징 우는 듯한 기타 솔로가 등장하며, 현혜미의 버전에서는 거친 느낌이 다소 완화되면서 현악기가 들어가기도 했는데, 트리퍼스의 버전에서는 관악기를 삽입하면서도 어니언스 버전보다는 말끔하게 정돈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다소 경건한 듯한 오르간과 시원스레 내뿜는 관악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전문적 작곡가의 곡들만 수록된 것은 아니다. 많은 그룹 사운드들이 그러했듯 리더인 김훈의 창작곡도 포함하고 있다. 이 중 브래스 록 밴드로서의 김훈과 트리퍼스의 면모를 드러내주는 창작곡은 시원하고 활발한 관악기가 주도하는 “세월만 가네”일 것이다. 반면 발라드 풍의 “사랑의 추억”, 경쾌하면서도 서정성 짙은 “세월만 가네” 노래에서 주도하는 것은 관악기가 아니라 서정적으로 울리는 기타 멜로디(혹은 “사랑의 추억”에서의 바이올린)에, 하늘거리며 떠 다니는 플루트와, 그뒤를 받쳐주는 오르간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번안곡 역시 소란스럽고 활기 넘치는 유형이 아닌, 서정적이고 애상적인 유형 쪽에 속한다. 브래스 록의 전범인 시카고의 노래도 포함되어 있는데 “사랑은 가고”가 시카고의 “Memories of Love”를 번안한 노래로 특유의 서정적인 맛깔을 내고 있다.

이처럼 관악기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 순간적으로 튀어오르며 활력 있는 느낌을 선사하거나(셔플 리듬이 주도하는 “나를 두고 아리랑” “세월만 가네”를 비롯해, “몰라주네” 등), 이와는 대조적으로 플루트를 위시해 서정적인 빛깔을 입히거나(“옛님” “사랑의 추억” “태양의 꿈” 등), 관악기 사용을 아예 억제하는(“그 언제일까” 등) 식으로 분화되어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다양한 어법의 관악기(혹은 브래스) 록 음악의 스펙트럼은, 기성 작곡가들의 입김부터 그룹 사운드 본인의 창작곡까지 아우르며, 트로트를 비롯한 주류 가요의 어법에 순응하면서도 거부하던 당시 ‘그룹 사운드’의 지형까지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정황은 어쩔 수 없게도 김훈(과 트리퍼스)을 “나를 두고 아리랑”만을 기억하게끔 만들었다. 20030103 | 최지선 fust@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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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는 말: 당시 신출내기로 개그맨 이력을 쌓아가던 이홍렬이 클럽 파노라마에서 낮에는 DJ를, 밤에는 김훈과 트리퍼스를 비롯한 야간 무대의 마이크 조정하는 일을 했다거나, 지금은 트로트계의 거두 중 하나인 설운도가 당시에는 김훈과 트리퍼스가 빵꾸내면 대타로 “나를 두고 아리랑”을 부르며 이력을 쌓아가던 시절이라는 말로 김훈과 트리퍼스의 당시 명성을 대신하겠다.

수록곡
Side A
1. 나를 두고 아리랑
2. 옛님
3. 세월만 가네
4. 사랑은 가고(Memories of Love)
5. 그 언제일까

Side B
1. 사랑의 추억
2. 태양의 꿈
3. 정 주고 내가 우네
4. 몰라주네
5.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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