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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 싸이키델리아, 그 정점의 조각 모음

[거짓말이야/아름다운 강산]은 2002년부터 복각 발매되고 있는 ‘신중현 작품집’ 시리즈 여섯 번째 음반이다. 앞선 음반들과 달리, 이 음반은 세 종의 LP에서 한 곡씩을 추려서 묶은 컴필레이션이다. 즉 같은 이름과 구성을 갖고 있는 오리지널 정규 LP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1972-73년 더 멘(The Men) 시절 신중현은 자신의 작사·작곡·편곡, 더 멘의 연주로 여러 솔로 가수의 음반을 만들었는데, LP 앞면은 솔로 가수의 짧은 곡, 뒷면은 더 멘의 긴 곡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중 각 LP의 B면에 실린 더 멘의 대표적인 롱 버전 세 곡을 복각해서 모은 게 이번에 나온 음반이다. “아름다운 강산”은 장현/더 멘의 [장현 and The Men(석양/안개 속의 여인/아름다운 강산)](유니버어살, KLS-46, 1972), “거짓말이야”는 윤용균/더 멘의 [내 곁에 있어주오/거짓말이야](유니버어살, KLS-61, 1973), “안개 속의 여인”은 지연의 [나만이 걸었네/그대 있는 곳에](유니버어살, KLS-66, 1973)에 각각 수록되었던 곡이다. 이번 음반에 담긴 롱 버전 곡들은 모두 중고음반 시장에서 각 음반을 ‘고가의 희귀 LP’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 이유가 단지 음반이 희귀해서이거나 혹은 ‘대가’로 평가받는 신중현의 ‘대곡’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첫 트랙 “아름다운 강산”은 굳이 이를 커버한 이선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이다. 유신정권 당시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청와대와 공화당의 요청(아니 압력)을 거부하고 만든 것이란 비화도 잘 알려져 있다. 신중현은 ‘중앙’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기 식 국민가요’를 작곡하면서 며칠에 거쳐 테마를 확장하고 다듬었는데, 이는 탄탄한 양식미를 갖춘 명곡이란 평가로 화답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름다운 강산”이 그룹 더 멘의 연주를 전제한 오리지널 버전인 반면, “거짓말이야”와 “안개 속의 여인”은 각각 김추자(1971), 장현(1970)의 목소리로 발표되었던 곡을 그룹 더 멘의 롱 버전으로 재편곡 연주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아름다운 강산”은 신중현이 동료들과 함께 치밀하게 쌓아올린, 그렇지만 그 속에 미로를 품고 있는 성채(城砦) 같다면, “거짓말이야”와 “안개 속의 여인”은 이미 발표했던 단편 영화를 변주하여 롱 테이크 위주로 자유롭게 다시 찍은 디렉터스 컷 필름 같다.

세 곡 모두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하지만 구성은 상이하다. “아름다운 강산”은 작곡과 편곡 단계에서 이미 10분 여에 육박하는 곡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얼핏 들으면 분방하게 만들어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잘 디자인되고 꼼꼼하게 만들어진 카펫처럼 짜임새가 돋보인다. 김기표의 키보드와 손학래의 오보에가 리드하는 35초 길이의 인트로는 클래시컬한 장엄미와 비장미가 느껴지는 짧은 조곡의 편린 같다. 탐미적인 인트로에 이어, 발군의 그루브를 들려주는 이태현의 베이스를 신호탄으로 메인 테마가 전개되는데, 비교적 길게 진행되는 노래 부분이 끝나면 참았던 욕망을 터뜨리듯 현란하고 환각적인 연주가 펼쳐진다. 전위적이면서 혼미한 부조화 속 조화를 들려주며.

반면 “거짓말이야”와 “안개 속의 여인”은 평범한 길이의 기 발표작을 마치 잼 하듯 맘껏 늘려 연주한 경우다. 즉흥적이라거나 라이브 같다는 수식은 그로 인해서다. 23분에 육박하는 “거짓말이야”에서 노래(신중현)는 처음과 끝을 장식할 뿐이고, 11분 30초의 “안개 속의 여인”에서는 1분 정도에 불과하다(그나마 5분 22초가 지나야 등장한다). 전자의 경우 17분 여, 후자의 경우 트랙의 거의 전부가 솔로 연주로 채색된 데서 알 수 있듯, 말이, 노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태현의 베이스와 문영배의 드럼은 꿈틀거리고 들썩거리는 가운데, 신중현의 기타, 김기표의 키보드, 손학래의 오보에가 돌아가면서 즉흥 연주를 벌인다. 이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이어지는 싸이키델리아 여행은 듣는 이를 무아지경에 빠뜨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음반은 한국 록 음악이 논리와 직관을 결합해 빚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 중 일부를 보여준다. 기획자의 말대로 당대 구미의 어느 싸이키델릭 록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누구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어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선입견이란 바이러스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때는 바야흐로 유신시대였다. 무아지경에 빠질 수 없는, 아니 무아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 압제의 시대에 신중현, 아니 한국 그룹 사운드의 찬란한 결실 중 하나가 꽃피었다는 것은 아이러닉하다. 그래서 30여 년이 흐른 지금 여기 담긴 음악들을 들으며 떠나는 44분 21초의 싸이키델리아 여행은 툭툭 끊긴다. 거짓말 같았던 시대, 거짓말 같은 음악이 생생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20030130 | 이용우 garuda_in_thom@hotmail.com

10/10

수록곡
1. 아름다운 강산
2. 거짓말이야
3. 안개 속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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