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27100204-AWalkAroundTheCorner배리어스 아티스트 – A Walk Around The Corner – Koneyisland/EMI, 2002

 

 

서정주의에 치우친 감상용 일렉트로니카의 자기규정

컴필레이션 앨범의 최대 난제는 개별적으로는 훌륭한 곡들이 모여 짜증스러워질 수 있다는 점이며, 지금까지 국내 편집음반들은 이를 잘 대변해왔다. 메이저 레이블의 편집음반들은 컨셉이 모호하고 기획력이 부족하여 좋게 말하면 실용적인 종합선물세트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려먹기와 얄팍한 상혼에 충실한 잡탕에 불과했다. 한편, 1990년대 말엽부터 인디 음악 진영에서 양산한 편집음반들도 독집을 발표할 여건이 안 되는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기여한 바는 인정되지만, 오마쥬와 냉소가 뒤섞인 주류 가요 리메이크가 아니면, 같은 클럽이나 레이블 소속 밴드들의 자족적 이벤트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여왔다.

겨울의 문턱에 발표된 편집음반 [A Walk Around The Corner]는 국내에서는 거의 최초로 시도되는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프로젝트 앨범이다([techno@kr]와 같은 앨범이 있었지만 별 다른 반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토이의 리더이자 라디오 DJ, 프로듀서 등 팔방미인을 자처하는 유희열이 총제작을 맡았고, 사진작가 안성진의 작품집이 실리는 등 볼거리까지 갖추고 있다. 수록곡 리스트를 훑어보면, 유희열의 다양하고도 깐깐한 인맥이 파악된다. 이미 토이의 5집 [Fermata]에 객원으로 참여했던 롤러코스터와 긱스의 멤버 강호정은 물론이고, 국내 언더그라운드 일렉트로니카 씬을 이끌고 있는 달파란(강기영), 프랙탈, 전자맨 등 ‘음지의 고수들’ 이름까지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루시드 폴도 유희열과 친분이 있었던가? 어쨌든 토이를 좋아하는 발라드 팬들과 전자음악 마니아들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외양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혼을 뺄 듯이 휘몰아치는 루프와 유쾌한 들썩거림을 기대한다면 이내 실망할 것이다. 일렉트로니카는 그것이 공격적인 하드 비트이든 폐부를 찌르는 몽환적인 노이즈이든 듣기 싫은 느낌을 가지고도 빠져드는 음악이다. 한 마디로 본 앨범은 듣기는 좋으나 빠져들게 만드는 그 무엇이 없다. 전자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가요대중들을 위한 배려일지는 모르지만, 앨범의 수록곡들은 전체적으로 일렉트로니카 특유의 중독성과 농밀한 그루브 대신에 느슨한 구성과 서정적인 무드에 치우쳐 있다. 더구나 유희열은 몇몇 곡에서 곱상한 보컬이나 보사노바 리듬으로 차가운 전자음을 희석시키는 등 골수 인상을 풍기는 일렉트로니카를 나긋나긋한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으로 윤색해 놓았다. 특히, 세인트 바이너리의 “나비”에서 들려오는 김지혜의 보컬과 웨어 더 스토리 엔즈의 “Velvet Crush”, 프랙탈의 “Sueno” 등은 통속적인 발라드식 창법을 답습하고 있어 당황스럽다.

춤추기를 포기한 바에야 다소 심각한 부동자세로 수록곡들을 들어보는 게 좋겠다. 먼저 친절한 제목을 달고 있는 유희열의 “Welcome To Koneyisland”는 지나치게 짧고 심심한 연주에 그쳐 프롤로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렉트로니카로 묶이기엔 어색한 롤러코스터의 곡은 이전 작품들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범작이며, Light Cube의 “No Vacancy”는 차라리 뉴에이지에 가까운 곡이다. 아마도 앨범에서 가장 궁금증을 유발할 토이의 “Silly Love Song”은 유희열 스스로 시부야 계열로 소개하고 있지만, 통기타 반주와 사랑타령의 가사가 어울린 변종 발라드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시종일관 귓가를 간지럽히는 ‘I love you, I need you’라는 속삭임은 차가운 전자음악도 닭살스러워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다.

또 음악 외적인 포장으로 기능하는 안성진의 사진집은 앨범의 느낌을 풍성하게 하는 시너지 효과보다는 청자 나름대로의 열린 감상을 일방향으로 구축해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만다. 결국 감각적이고 매만져진 전자음을 통해 도시적 감수성을 전하려는 의도는 사진의 부연설명까지 가세해 더욱 확연해지지만 탁상 위의 예쁜 감상에 머무르고 만다.

앨범은 전반적으로 함량미달이지만 몇 곡의 수작이 발견되는 점은 다행이다. 이미 온라인 상에서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 클래지콰이의 “Coming At Me To Disco”는 훵키한 그루브와 여성보컬의 조화가 감칠 맛 나는, 본 앨범의 가장 큰 수확이다. 또 달파란의 “Rain”은 흥겨운 퍼커션 리듬이 인상적인 본격적인 트랜스 넘버이다. 춤을 이끌어낼 만한(danceable) 요소를 잃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클래지콰이와 달파란의 곡은 돋보인다. 마지막 곡인 루시드 폴의 “몽유도원”은 앰비언트 성향의 작품인데, 조윤석이 미선이와 루시드 폴의 앨범에서 힙합을 시도하긴 했지만 이건 좀 의외다. 특히 시냇물, 산새, 개구리 소리 등의 자연음 샘플링과 드럼머신이 이끄는 기계음이 불편하게 접목되어 환각적인 무드를 조성하고 있다. 전자음에 이끌려 접속되는 꿈속의 환타지라? 앨범에서 가장 파격적인 실험이다.

본 앨범은 싫든 좋든 국내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현주소와 방향을 규정하는 결과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에 그 내용물이 더 마뜩치 않다. 사진집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종 기사와 리뷰에는 ‘소장가치’라는 구린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CD장에 고이 모셔질 만한 음반의 외양과 기념가치가 아니라, 척박한 우리 일렉트로니카 씬의 앞길을 여러 갈래로 열어줄 모색의 흔적과 음악적 완성도가 아닐까? 분명 앨범의 지명도와 상업성을 높였을 유희열의 프로듀싱이 배제되었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해진다. 20021209 | 장육 evol62@hanmail.net

5/10

수록곡
1. Welcome To Koneyisland
2. Dive Into The City – Rollercoaster
3. Illusion – East4a
4. 나비 – Saint Binary
5. N.Y.C – Junjaman
6. Velvet Crush – Where The Story Ends
7. Cityscape – 강호정
8. Coming At Me To Disco – Clazziquai
9. No Vacancy – Light Cube
10. Sueno – Fractal
11. Rain – Dalpalan
12. Silly Love Song – Toy
13. 몽유도원 – Lucid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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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Fermata] 리뷰 – vol.3/no.11 [200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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