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업계가 가장 호황을 누리던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비틀즈(The Beatles)가 한창 날리던 시절?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온갖 판매기록을 갱신하던 시절? 유감스럽게도 둘 다 아니다. 음반산업 최고의 황금기는 바로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즉 컴팩트 디스크(CD)가 음반의 주된 포맷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다. 이 시기의 특별한 점은 소비자들이 이미 소장하고 있던 음반들을 또 다시 사들였다는 점이다. 사상 초유의 이러한 사태는 사람들이 기존의 비닐 LP를 새로운 CD 포맷으로 앞 다퉈 대체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음반업계는 호황을 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시장 수요가 하루 아침에 몇 배로 불어난 것은 물론이고 그 수요라는 것도 철저히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호황은 단순히 음반사들이 배를 불리는 것으로만 끝나지도 않았다. 음반업계는 때마침 당대를 휘저은 인수합병의 물결을 타고 거대한 재편성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음반산업은 현재의 5대(또는 4대) 메이저 체제로 새롭게 정립되었고 그들은 단순한 음반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미디어 왕국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새롭게 재편된 음반산업이 위기를 맞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포맷의 도입이 그 효력을 상실하면서부터다. 사실 이 위기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일이다. CD에 대한 초과수요분은 소비자 각 개인의 컬렉션 항목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소비자가 자신의 LP 컬렉션을 어느 정도 CD로 대체하고 나면 더 이상 열성적인 구매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음반사들은 무리한 팽창과 사업확대를 지속적으로 감행했고 결국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만성적인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인수합병은 덩치를 부풀리고 자본금의 규모를 늘이는 데는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것이 곧 이윤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윤의 창출은 어디까지나 상품이 팔려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점체제를 형성해서 시장지배력을 높인들 막상 음반이 팔리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게다가 극도로 불어난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도 어지간히 벌어서는 않된다. 다급해진 음반사들은 고위 간부직을 음악 전문가에서 재정 전문가들로 앞 다퉈 교체하고 어떻게든 돈을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따름이었다. 기본적으로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이 음반업계를 이끄는 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음반업계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메이저 음반사들은 모험을 피하고 단기 이익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1990년대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들의 안전 제일주의 노선은 단지 업계의 사업관행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질적 수준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음악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틀에 박히고 도식적인 음악이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 음반업계가 널리 채택하고 있는 사업 전략들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전략 중 하나는 완전히 통제가 가능한 허수아비 가수들을 키우는 것이다. 멋진 외모와 어느 정도의 보컬 능력을 지닌 신인들을 뽑아 철저한 트레이닝을 거친 뒤 주문 생산된 곡을 받아서 활동하게 하는 것이 이 전략의 내용이다. 물론 가수 자신에게는 음악과 관련된 아무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창작보다는 제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이런 부류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취향이 미숙한 13세 이하의 연령층을 집중적인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이 연령층의 기호가 예측 가능하고 조작 가능하다는 신념을 음반사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전략은 스타의 브랜드 파워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는 무명의 신인을 발굴해서 키우는 것 보다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스타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한 것이다. 여기에는 타 음반사와의 계약이 만료된 톱 스타를 스카우트하는 것과 인디 씬에서 명망을 쌓은 아티스트를 빼내오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그 동안의 경험은 이 전략의 비용이 상당히 만만치 않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 동안 거액을 받고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한 인디의 맹장들 중에서 음반사에 본전이나마 뽑아준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또한 얼마 전 EMI가 천문학적 액수를 지불하면서까지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와의 계약을 파기한 사건도 스타의 브랜드 파워라는 것이 얼마나 믿지 못할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메이저 음반사들이 스타에게 뭉칫돈을 안겨주기 보다는 가능성 있는 신인 발굴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은 그 동안의 손실을 경험하면서 스타 파워의 실효성이 그리 크지 않음을 자각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전략은 백 카탈로그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메이저 음반사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이득 중 하나는 합병된 레이블들의 거대한 백 카탈로그를 승계받았다는 점이다. 리이슈 음반들이 주도한 초기의 CD 붐을 경험하면서 음반사들은 백 카탈로그의 엄청난 잠재력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검증된 과거의 명반들은 유행에 상관없이 계속 팔려나감으로써 음반사들의 마르지 않는 수입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음반사의 입장에서는 별도의 큰 투자 없이 기존의 품목을 포장만 바꿔서 계속 발매하면 되므로 한마디로 손 안대고 코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CD가 음반시장의 중심 포맷으로 자리잡은 지 20여년이 경과하면서 웬만한 음반들은 모두 재발매가 이루어졌고 그에 대한 구매는 대부분 완료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CD는 반영구적 매체이기 때문에 마모에 의한 교체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러한 시장의 포화상태를 돌파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음반사로부터 뭔가 획기적인 방안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최근 음반사들이 선호하는 가장 유력한 방안은 바로 음반의 대폭적인 품질개선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새롭게 재발매된 음반들을 보면 몇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20-비트 또는 24-비트 디지털 리마스터링 기법을 사용한 최상의 음질 구현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은 이미 10여년 전에도 이용 가능한 기술이었으나 다행히(?) 널리 활용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 기술은 과거에 재발매된 앨범들을 또 다시 재발매하는 데 훌륭한 명분으로 기능하고 있다. 두번째는 풍부한 정보를 담은 부클릿과 선명하고 고급스러운 아트워크다. 오리지널 LP를 조잡하게 축소 복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과거의 리이슈와 달리 최근에 재발매되는 앨범들은 대부분 일찌기 보기 힘들었던 화려한 외양을 자랑한다. 세번째는 다수의 보너스 트랙 제공이다. 과거의 재발매 음반들은 앨범 트랙만을 그대로 옮겨 담음으로써 CD의 저장 용량을 낭비하거나 두 개의 앨범을 한 장의 CD에 몰아넣음으로써 ‘떨이’의 인상을 주곤 했다. 미발표 데모나 라이브 레코딩을 충분히 활용하는 최근의 전략은 아티스트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전문성을 제고함으로써 음반의 품격을 한 차원 높이고 해당 아티스트의 팬들을 강하게 유인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근래 들어 두번째(경우에 따라서는 세번째)로 재발매되고 있는 앨범들은 이처럼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는다는 일차적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런 음반들이 우려먹기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고, 소비자들이 같은 음반에 또 한 번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도 묵과할 수는 없다. 더욱이 DVD-오디오나 SACD 같은 새로운 포맷이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 같은 호화판 CD의 발매는 CD 포맷이 지닌 이윤 가능성을 마지막까지 짜내려는 의도로 비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반을 최상의 품질로 갖고 싶다는 팬들의 욕구를 비난하기는 어려우며, 새로운 포맷의 운명도 아직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비록 바뀐 것은 포장에 불과할 뿐이라고 해도 그 포장이 또 한 번의 구매를 유도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라면 그것의 의미를 단지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다. 그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뀐 포장의 매력이 과연 실제적 근거를 지닌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가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따져보는 일일 것이다. 리이슈 음반들이 포장되는 양상은 앨범과 레이블에 따라 천양지차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일괄적인 것 보다는 사례 별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 적합하다. 즉 ‘우려먹기다’ 또는 ‘기술적 발전이다’하는 식의 뭉뚱그리는 평가보다는 ‘워너와 라이노가 손잡고 새롭게 발매한 라몬스(Ramones)의 데뷔 앨범은 이전 사이어 판에 비해 소리는 깨끗해졌지만 보컬과 연주의 발란스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EMI가 발매한 버즈콕스(Buzzcocks)의 [Singles Going Steady]는 중간과 말미에 배치된 보너스 트랙들이 앨범의 완결성과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한다’는 식의 평가가 더 요긴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이브는 이번 호부터 리이슈 음반들에 대한 리뷰를 고정적으로 게재하려 한다. 쏟아져 나오는 재발매 물량에 비해 웨이브가 다룰 수 있는 양은 물론 터무니 없이 적겠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재발매 음반들만은 가급적 짚고 넘어가려 노력할 것이다. 리이슈 음반 리뷰를 통해 독자들이 과거의 좋은 음악을 재발견하고 나아가 음반 구매에 실질적인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면 필자들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20021223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관련 글 Nirvana [Nirvana] 리뷰 – vol.4/no.24 [20021216] Joe Meek [The Alchemist Of Pop: Home Made Hits & Rarities 1959 – 1966] 리뷰 – vol.4/no.24 [2002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