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07061327-devils데블스 – 그리운 건 너/사랑한다면 – 아세아(ALS 337), 1974

 

 

닫힌 철창 속의 소울, 그 침울함 속의 흥겨움

음반 표지의 이미지가 독특하다. 창살은 콘크리트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 건물이며, 여섯 청년들 모두를 가두고 있다. 그런데 청년들은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듯 창살을 등지고 돌아서 발걸음을 옮긴다. 창살은 더 이상 아무 것도 가둘 수 없게 된다.

이런 독특한 표지를 가진 이 음반은 ‘소울 그룹 사운드’ 데블스의 두 번째 정규 음반이다. 표지 때문에 일명 ‘철창 음반’이라고 불리는 이 음반은 한국 록 음반을 수집하는 컬렉터들조차 구경하기 힘든 음반이었다. 그저 전설처럼 데블스의 음반 중에 ‘철창을 배경으로 멤버들의 뒷모습을 촬영한 표지를 가진 음반’이 있다는 것과 그것의 존재를 ‘아직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이 음반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였다. 종종 진귀한 음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매 사이트에조차 이 음반은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음반을 제공해 주신 최성근님께 감사드린다.)

먼저 이 앨범의 라인업을 점검해 보자. 1971년 아세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 음반을 낸 뒤 당대 최고의 고고 클럽이던 ‘닐바나’뿐 아니라. MBC의 ‘젊음을 가득히'(PD 박명구)와 같은 방송 프로에 전속 밴드가 되어 바쁜 나날을 보내는 과정에서 약간의 멤버 변동이 발생했다. 클럽 ‘마이 하우스’에서 만난 빅 밴드(이종묵 안단, 여대영 악단 등에서 활약함) 출신의 트럼펫 주자 홍필주가 새롭게 그룹에 참여하고, 군입대로 자리를 비운 연석원을 대신해 박문이 테너 색서폰을, 그리고 본래 테너 색서폰 주자였던 최성근이 키보드를 맡는다. 베이스와 드럼도 채완식과 유기원으로 각각 교체된다.

데블스는 데뷔음반 [추억의 길/연인의 속삭임]을 통해 당대의 그룹 사운드와는 차별적인 길을 선택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새까만’ 것을 선택한 것이다. 기타와 함께 색소폰이 이끄는 ‘그루브’한 리듬과 크라잉(crying)이라고 부를 만한 보컬의 창법은 당시의 어떤 그룹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소울의 특징이었다. 1집 음반의 대다수의 곡이 김영종에 의해 작곡되어지긴 했지만 결국 데블스의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작곡가 시스템’을 자신들의 독특한 편곡으로 무력화시킨 이들이 있었다면 바로 데블스였다. (신중현이 내세운 가수들이나, 김희갑이 관여한 그룹들의 음악이 작곡가의 음악적 지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에 반해 데블스의 데뷔 음반은 작곡자의 이름을 소거하더라도 남은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2집 음반은 1집보다 다양한 데블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김명길의 보컬을 맡은 곡의 비중이 1집보다 많아지고 그는 여전히 소울의 크라잉 창법을 구사한다. 한편 연석원이 물러선 자리는 채완식(베이스)과 박문(키보드)이 이어받는다. 특히 소울의 전형은 아니지만 원초적인 ‘흐느낌’을 느낄 수 있는 채완식의 보컬은 1집과는 전혀 색다른 데블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2집의 음악적 내용을 구조화하는 사운드는 테너 색소폰과 트럼펫의 ‘울림’이다. 금관악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쓰임새가 상이한 두 악기의 합주는 여전히 다른 그룹의 음악들과 차별화된 ‘데블스’만의 사운들를 명확히 구현하고 있다. 때로는 같은 멜로디를 경쟁적으로 연주하거나 각기 다른 파트를 맡아 앙상블을 내는 색소폰과 트럼펫의 ‘거친’ 동거는 2집의 다양성을 한 데 묶는 끈이 된다.

첫 곡은 이 음반의 최대 히트 곡인 “그리운 건 너”다. 드럼의 짤막한 필인(fill-in)에 이어 두 대의 기타가 연주하는 듯한 기타의 인트로를 지나면 보컬(채완식)이 등장한다. 보컬의 음색만큼이나 절절한 연가(戀歌)이자 애가(哀歌)다. 후렴구인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를 부르는 부분은 노래라기보다는 ‘흐느낌’이다. 색소폰도 트럼펫도 함께 읍소(泣訴)한다. 1집 음반을 들어본 사람은 그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이 애절한 연가임에도 불구하고 ‘흥겨운’ 리듬과 비트로 담아 내고 있다고 기억할 것이다. 즉, ‘임을 보내는 마음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가사에도 불구하고 막상 연주되는 음악은 슬픔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스텝’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흥겨운 춤곡이다. 반면 이번 음반에는 사랑의 슬픔을 흥겹게 승화하는 곡들이 줄어들고 침울한 분위기가 많아졌다. “그리운 건 너”와 더불어 김명길의 ‘토크’가 등장하는 “사랑한다면”, 박문의 “우산 속의 행복”같은 곡이 그렇다. 닫힌 ‘철창’ 때문이었을까?

물론 흥겨운 그루브가 없으면 데블스가 아니다. 또하나의 타이틀곡이라고 할만한 “몰라요 몰라”는 무대 위에서 가장 ‘데블스다운’ 곡으로 평가받을 만한곡이다. 트럼펫과 색소폰은 시종일관 ‘빵빵’대며, ‘몰라요 몰라’를 연발하는 청년의 설램을 실어 나르기 바쁘다. 노랫말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상적인 언어에 리듬을 실어 넣은 그의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런 흥겨움은 뒷면의 두 번째 수록곡 “별들에게”로 이어진다. 한편 세 번째 곡인 “임의 노래”는 곡의 템포는 느리지만 ‘그루브’한 리듬감이 살아있는 곡이고, “괜찮아”는 기타 리프로 인해 상대적으로 로킹한 느낌을 준다. 짤막하지만 간주부의 기타 연주도 나머지 곡들과는 상이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 후주부에 보컬이 ‘괜찮아’를 반복하며 페이드 아웃되는 동안 기타와 브라스는 짤막한 솔로를 주고 받으며 곡을 마무리한다. 보컬의 음색이 확실한 색깔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짤막하게 등장하는 기타와 브래스의 합주가 멋진 곡이다.

이 음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은 데블스의 합주 실력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태양을 향하여”라는 연주곡이다. 소울보다는 훵크에 가까운 곡으로서 ‘죽이는 댄스곡’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원곡은 스택스-볼트(Stax-Volt) 레이블을 통해 멤피스 소울의 진수를 선사했고, 이후 훵크, 디스코, 랩까지 흑인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아이삭 헤이스(Isaac Hayes)의 “Theme From Shaft“라는 곡이다. ‘데블스다운’ 선곡이다. (음반에는 누구의 곡인지 설명이 없는데, 본인들에 따르면, 미 8군 무대를 순회하던 필리핀 출신 밴드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들과 우연히 같은 무대에 섰다가 그들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채보해서 레퍼토리로 삼았다고 한다).

데블스의 미덕은 ‘그룹다움(혹은 밴드다움)’다움에 있다. 6명의 연주가 ‘튐’없이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엮여있는 듯 하다. 색소폰과 트럼펫의 합주에서 드러나듯 경쟁보다는 어울림에 치중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키보드의 연주는 물러나 있다는 점이다. 음반 전체적으로 솔로 연주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짧게 등장할 때마다 악기 고유의 매력을 내뿜는 반면 키보드는 시종일관 뒷전에 물러나 있는 점이 조금은 아쉽다.(이는 베이스에서 테너 색소폰으로 그리고 키보드로 자리를 계속 옮겼야했던 최성근의 ‘피곤함’ 때문으로 보인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어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포지션을 옮겨야 했던 그는 이 음반을 녹음할 즈음, 키보드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아꼈던 테너 색소폰을 놓아야 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 그룹 사운드는 (영미권의) ‘백인 음악’보다는 ‘흑인 음악’에 가까운 논리에 따라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직업을 초월한 예술’을 창조했다기보다는 ‘직업’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는 많이 다듬어야 할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만약 그 가설이 타당하다면 그 가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는 데블스로 보인다. 20021108 | 신효동 terror87@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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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음반이 ‘희귀’해진데는 대중음악에 대한 방송의 태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의 라디오에서는 곡의 길이가 2분 30초가 넘는 경우 방송을 ‘금지’하다시피했고, 따라서 이 음반의 수록곡들도 방송을 위해서는 새롭게 녹음되어야 했다. [데블스/히 화이브], [데블스/유심초]라는 편집음반은 이러한 연유로 인해 다시 만들어진 음반이다. 이 ‘스플릿 음반;에 수록된 데블스(음반에는 ‘친구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의 수록곡도 “그리운건 너”와 “몰라요 몰라”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곡들을 담고 있다. 요즘의 업계 용어를 빌면 ‘2.5집’쯤 되는 음반이지만 새롭게 녹음된 버전을 담고 있다.

수록곡
Side A
1. 그리운건 너
2. 몰라요 몰라
3. 임의 노래
4. 괜찮아
5. 우산 속의 행복

Side B
1. 사랑한다면
2. 별들에게
3. 마지막 선물
4. 태양을 향하여
5. 내말을 믿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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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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