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Ruff Ryders’ First Lady (1999)

Eve – Ruff Ryders’ First Lady – Interscope, 1999

힙합의 새로운 퍼스트 레이디, 러프 라이더스 패거리의 도움으로 탄생하다

새 천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주류 여성 힙합은 잠시 침체기를 맞는 듯했다. 여성 힙합 제 2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폭시 브라운(Foxy Brown)은 꾸준한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고 릴 킴(Lil’ Kim)은 아예 음반 활동을 접은 상태였다. 한편 갱스타 비치 래퍼들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던 로린 힐(Lauryn Hill)과 미시 엘리엇(Missy Elliott)은 직접적인 도전은 외면한 채 단지 본인들의 음악적 진화에 자족하는 듯이 보였다. 이 어수선한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랩 디바의 자리를 단숨에 꿰찬 이가 바로 이브(Eve)였다.

10대 시절부터 이미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탁월한 래퍼로 각광을 받았던 이브는 닥터 드레(Dr. Dre)의 눈 도장을 받은 후, 마침내 하드코어 랩의 기수 DMX가 이끄는 러프 라이더스(Ruff Ryders)의 홍일점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녀의 데뷔 앨범에 앞서 발매된 러프 라이더스 패거리의 집단 앨범 [Ryde Or Die](1999)는 이브의 존재를 처음으로 미 전역에 알려주었다. 비트 마술사 스위즈 비트(Swizz Beatz)의 주도하에 제작된 이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이브는 DMX, 드랙 온(Drag-On), 록스(the LOX) 등 쟁쟁한 남성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특히 살사 풍의 근사한 트랙 “What Ya Want”에서 멋진 랩을 선사하며 그녀의 성공적인 데뷔를 예고했다.

[Ruff Ryders’ First Lady]는 결국 발매와 동시에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한 최초의 여성 래퍼 앨범이 되었다. 물론 러프 라이더스 패거리의 후광과 치밀한 프로덕션이 성공의 첫 번째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스위즈 비트를 중심으로 한 막강 프로덕션 팀의 최첨단 비트와 앨범 곳곳에 배치된 화려한 까메오들의 비중도 무시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의 가장 큰 매력은 이브 자신의 청자를 사로잡는 끼와 음악적 역량이다. 릴 킴을 무색케 하는 대담한 표현, 부드러우면서 자신감 넘치는 래핑 그리고 동료 러프 라이더스 남성들에 대한 당당한 태도는 기존 갱스타 우먼 래퍼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또한 백인 여성에 대한 동경과 흑인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이 기묘히 공존하는 독특한 이미지 메이킹을 무기로, 이브는 인종적 경계를 넘어서며 미국의 10대 소년 소녀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대부분의 트랙에서 프로듀스를 담당하고 있는 스위즈 비트는 특유의 정교하면서 흥겨운 비트와 단순하면서 귀에 감기는 멜로디를 근사하게 조합하고 있다. 물론 지나치게 흥청거린다 싶으면 갑작스레 어쿠스틱 기타와 같은 효과음을 배치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재주도 남다르다. 덕분에 전체적으로 일관된 비트 속에 다채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감상할 수 있다. 미니멀한 비트와 키보드의 흥겨운 조화 속에 이브와 드랙 온이 특유의 허풍스러운 랩을 들려주는 “Let’s Talk About”, 어쿠스틱 기타와 이국적인 여성 코러스가 시종 귀를 사로잡는 “Gotta Man”과 함께, 미시 엘리엇과 이브의 격렬한 랩 대결이 돋보이는 흥겨운 훵크 곡 “Ain’t Got No Dough”가 앨범 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반면 클럽 파티용의 신나는 댄스 넘버 “We On That Shit”과 “Maniac”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후반부를 깔끔하게 마무리해주는 트랙들이다.

혹시 과장되고 노골적인 가사가 여전히 맘에 안 든다면, 그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Heaven Only Knows”와 “Love Is Blind”를 권하고 싶다. 전자가 이브 자신이 성장기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토로하고 자성하는 내용이라면, 후자는 동 세대 ‘시스타(sista)’의 고민과 고통을 상담하고 도와주려는 그녀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두 곡 모두 구슬픈 어쿠스틱 기타와 여성 코러스, 담담한 이브의 랩이 조화를 이루는 R&B 발라드들이다. 이브는 특유의 거칠고 솔직한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흑인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겪는 상처와 고민을 감싸안으려 한다. 자칫 앨범의 일관된 흐름을 벗어날 수도 있지만, 장차 그녀의 새로운 변화와 성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Ruff Ryders’ First Lady]는 스위즈 비트의 미니멀하면서 화려한 비트와 이브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양대 축을 이루는 수작이다. 스위즈 비트는 이 앨범의 빛나는 프로덕션으로 팀발랜드(Timbaland)와 어깨를 겨루는 당대 최고의 비트 메이커로 입지를 굳혔다. 한편 이브는 차기 앨범 [Scorpion](2001)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호평에 힘입어 자타가 공인하는 부동의 랩 디바로 자리를 잡았다. 더욱이 그녀는 패거리 동료들을 능가하는 인기 속에 이제 쇠락하는 러프 라이더스의 유일한 희망이자 확고한 간판스타가 되었다. 이브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여러모로 즐거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021001 | 양재영 cocto@hotmail.com

9/10

수록곡
1. First Lady (Intro)
2. Let’s Talk About (feat. Drag-On)
3. Gotta Man
4. Philly Cheese Steak (Skit)
5. Philly, Philly (feat. Beanie Siegel)
6. Stuck Up (feat. C.J.)
7. Ain’t Got No Dough (feat. Missy Elliott)
8. BM (Skit)
9. Love Is Blind
10. Scenario 2000 (feat. DMX, the LOX & Drag-On)
11. Dog Match (feat. DMX)
12. My Bitches
13. We On That Shit (feat. P. Killer Tracks)
14. Choke Nikes (Skit)
15. Maniac
16. My Enemies (Skit)
17. Heaven Only Knows
18. What Y’all Want (Remix)

관련 사이트
Eve의 공식 팬 사이트
http://www.evefanson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