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2년 9월 16일 오후 4시 장소: 최이철과 그의 밴드의 연습실 인터뷰이: 최이철, 허경, 정한옥, 안정현 질문 및 참석자: 신현준, 신효동 정리: 신현준, 최민우 인터뷰 장소였던 연습실에서 최이철의 모습 지난 번 아이들(Idol)이라는 낯선 밴드의 음반 리뷰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리뷰를 본 사람은 이 그룹이 사랑과 평화를 이끌어 온 최이철이 ‘일반 무대’로 나와서 결성한 최초의 그룹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아이들이라는 이름은 낯설 것 같다. 그래서 [Go Go! 한국 록의 고고학]이 이번 호에 다시 그룹 사운드로 돌아 오면서 그에 대한 인터뷰를 싣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그와 더불어 또 한 명의 색깔있는 기타 연주자인 데블스의 김명길과의 인터뷰와 함께 이 글은 ‘한국 그룹 사운드의 1.5세대’의 특징을 잘 조명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 최이철이라는 이름은 경이롭다. 1970년대 후반 직업적 그룹 사운드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무대 뒷전으로 물러나던 때 최이철은 사랑과 평화라는 ‘마지막 그룹 사운드’를 이끌고 독야청청했다. 자신의 그룹을 이끄는 것과 더불어 그는 무수한 레코딩 세션에 자신의 기타를 연주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김현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나 송창식의 “담배 가게 아가씨”같은 방송가의 ‘올 타임 리퀘스트’의 훵키한 기타 연주의 주인공이 최이철이다. 2000년에는 ‘기타 없는 록 밴드’ 들국화의 공연에도 세션 연주자로 가담하여 전혀 스타일이 다른 연주를 들려주었고 11월 한 달 동안 예정된 최희준(!)의 공연에도 그가 이끄는 밴드가 세션으로 초대되어 연주할 예정이다. 김현식 – 봄 여름 가을 겨울(1981) 송창식 – 담배가게 아가씨(1987) 그렇지만 현재 그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그는 ‘공식적’ 사랑과 평화의 멤버가 아니다. 하지만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그룹이 둘 있다는 것이 현재의 복잡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점에 대한 복잡한 설명은 여기서 간단히 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사랑과 평화라는 그룹의 창설자이자 그룹 그 자체였던 그가 그룹의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현실은 그의 현재가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와 함께 작업했던 많은 동료들이 그를 떠나갔다. 초기 사랑과 평화 시절 그와 탁월한 파트너십을 이루었던 키보드 주자 김명곤은 두 종의 음반을 내고 그룹을 떠났고 그 뒤 직업적 작편곡가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지만 2001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그의 찬란한 업적에 대해서는 나미, 이문세, 신승훈의 이름만 언급하겠다). 게다가 사랑과 평화가 한국 최고의 합주력을 갖추는데 데 숨은 조력자였던 드러머 김태흥은 198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 외에도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이 ‘그룹 사운드’와 ‘록 음악’을 등지고 떠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위의 세평처럼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오랜 기간 그의 음악적 동료인 허경(베이스), 정한옥(보컬), 안정현(키보드)과 더불어 강남의 한 ‘슈퍼’가 있는 건물 지하에 연습실을 만들어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송창식이 운영하는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록시]에서 연주를 하는 틈틈이 ‘유라시아의 아침’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미국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음악 스타일에 도전하고 있다(그 성과는 조만간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물어 물어 연습실을 찾아간 우리는 ‘음악밖에 모르는’ 상태가 된 시절의 이야기부터 물어보았다. 우리가 들이민 것은 1971년 1월에 나온 아이들(Idol)의 음반을 스캔해서 프린트해 간 사진이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아직 미성년자일 때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최이철, 허경, 정한옥 세 사람은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물론 굳이 그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얘’, ‘쟤’라고 부르면서 아이들(!)처럼 지내는 사이로 보였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문어체와 경어체로 바꾸었지만 실제 인터뷰에서는 구어체와 비존칭이 많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또한 어눌하기로 소문난 최이철을 허경과 정한옥이 도와주었지만 이하의 답변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구분하지 않았다. 이 자리를 빌어 최이철님 뿐만 아니라 허경님과 정한옥님께 감사드린다. 신동들의 역사: ‘데니스 쇼’부터 아이들, 김 트리오, 영 에이스, 그리고 서울 나그네까지 아이들의 [아이들과 춤을](성음 DG 가 30, 1971. 1. 25. 발매) 음반 표지의 뒷면. 표지 앞면은 음반 리뷰를 참고하라. Q: 이 음반이 1971년에 나왔네요. 당시 아직 어린 나이였을 것 같은데 연주는 숙련되어 있는 것 같네요. – 그럴 거에요. 겨울에 남대문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었는데 그때 우리들 모두 한 스무 살 정도였죠. 이 음반을 제작한 사람은 김대환씨에요(주: 김대환은 신중현과 애드 훠와 퀘션스 시절 함께 그룹을 했던 드러머이고 뒤에는 재즈 드러머의 길을 걸었다). 그분이 우리를 신동 취급했었죠. 그때 최이철(기타, 보컬), 허경(베이스, 보컬), 김태흥(드럼), 박병무(오르간) 이렇게가 주요 멤버였죠. 나머지는 정식 멤버라고 보기는 그렇고…. 박병무라는 친구는 오르간이라는 악기가 귀할 때 오르간을 갖고 있었죠. 병무는 나중에 조용필과 그림자로 갔다가 오토바이 타다가 죽었죠. 나중에는 태흥이 형도 죽었고. 그리고 색서폰 불던 김영호는 아이들에서 같이 한 다음에는 더 이상 음악하지 않았죠. (허경) 그래서 미 8군 무대에서 주요 멤버는 김태흥, 최이철, 박병무, 최이철 이렇게 원래 넷이었어요. 그러다 일반 무대로 나오면서 김영호가 음반 낸다고 해서 갑자기 끼었다가 음반만 내고 나간 거죠. 아이들 – 전쟁(War)(1971) (원곡은 에드윈 스타(Edwin Starr) 및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 아이들 – 배신당한 내 가슴(Purple Haze)(1971)(원곡은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Q: 그럼 아이들 이전에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신 것에 대해 여쭤 보겠습니다. 먼저 박활란 쇼와 데니스 쇼에 대해서 저희는 소문만 듣고 자세히는 모르는데요…. –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았죠? 박활란 쇼보다 데니스 쇼를 먼저 했죠. 그때 우리가 유니버설(주: 화양과 더불어 미 8군 연예기획사의 양대 산맥) 소속이었는데. 병기라는 아이가 생긴 게 참 이뻤어요. 그래서 그 아이가 데니스 캐릭터를 했고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나오는 만화 주인공들처럼 했었죠. 그게 한 1968년 무렵이었던 것 같네요(주: 1968년이면 최이철은 고등학교 1학년 나이인 만 16세 정도일 때이다). Q: 그러면 박활란씨가 음반을 발표한 것은 그 뒤의 일인가요? – 예 그건 나중이고 우리가 연주한 것도 아니죠. (박)활란이가 미 8군 무대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쇼가 우리와 같이 한 쇼였으니까요. 그때 유니버설에서 박활란 쇼를 기획해 준 사람은 고병희씨라는 분입니다. 뒤에 태양음반을 경영하던 그 분이죠. 그때 그 분한테 가끔씩 두드려 맞기도 했어요(웃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우리에게는 은인이었어요. 신중현씨를 불러서 우리들 선생으로 붙여서 가르쳐 주기도 했어요. 그때 우리는 악보도 제대로 못 볼 때였는데 신중현씨가 우리를 많이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그 분 이름이 신중현씨인 줄도 몰랐죠. 그때만 해도 재키라고 그랬었죠. 박활란 – 내 고향 캔자스 씨티(1969?) Q: 데니스 쇼와 박활란 쇼는 어느 정도 동안 하신 건가요? 얼마 하지는 않았어요. 데니스 쇼는. 한 3-4개월 정도 했고 박활란쇼는 한 1년 정도 했었죠. 그러다가 화양으로 옮겨서 베트남 다녀 온 방은미(본명: 방은영)를 만나고 그래서 앨리게이터를 결성했고, 이것도 패키지쇼 였어요. Q: 패키지 쇼에서는 주로 어떤 음악을 연주했나요? – (허경) 우리가 화양에서 음악 활동을 할 때는 주로 (미국의) 백인 음악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특이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You Keep Me Hanging On” 정도를 연주하고 있을 때 우리는 “Spinning Wheel”(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의 곡)을 연주하려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그런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죠. 그런데 이철이는 피(血)가 그런 친구에요. (최)이철이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유명한 재즈 연주인들이에요. 아무튼 저런 곡들은 지금도 그건 연주하기 어려운 곡들이잖아요. 그런데 브래스가 들어가는 곡을 네 명이서 연주한 거죠. 히 화이브 – You Keep Me Hanging On(1970) (원곡은 바닐라 퍼지(Vanilla Fudge)) Q: 그렇다면 아이들 음반은 그 다음의 일이군요… – 그렇죠. 그렇게 김대환씨가 미 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우리를 보고 픽업해서 음반을 낸 게 아이들의 음반이죠. 그러고 나서 명동에 있는 실버타운에서 공연도 했는데 그때 거기에 라스트 챤스 등도 출연하고 그랬었죠. Q: 김대환님이 김 트리오를 결성한 것은 그 다음인가요? 그때 최이철님과 조용필님이 베이스와 기타를 모두 연주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했던 것이죠? – 예. 아이들 이후에 (김)대환이 형이 (조)용필이형을 화이브 휭거스에서 데리고 와서 저하고 같이 세 명이서 팀을 구성했죠. 그때 용필이 형이 노래하면 내가 기타를 치고 내가 노래하면 용필이형이 기타를 쳤죠. 그러니까 기타와 베이스 기타 두 개를 동시에 매고 나가서 베이스 기타는 등 뒤에 놓고 기타를 치거나 기타를 등 뒤에 놓고 베이스 기타를 쳤죠. 1971년 5월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참가했을 당시 김트리오의 모습. 왼쪽 서있는 이가 최이철(g, b), 가운데 앉아있는 이가 김대환(d), 오른쪽 서있는 이가 조용필(g, b, v). Q: 조용필님이나 최이철님이나 키도 크지 않고 체구도 작은 편인데 무겁지 않으셨나요? – 엄청 무거웠죠(웃음). 그러다가 오르간을 칠 때도 있었어요. 뒤에 제가 나간 다음에는 이남이형이 들어왔고, 그때 아마 (조)용필이형도 첫 독집을 녹음했을 거에요. 남이형도 참여했고…(필자 주: 1972년 아세아 레코드에서 발매된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아세아, AALS 0002)을 말한다. 이 음반은 아이들의 음반과 더불어 김대환이 기획해 준 것으로, 아이들의 음반에 수록된 “꿈을 꾸리”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조용필은 이 음반 이전에 ‘조영필’이라는 본명으로 오스카 레코드에서 발매된 [변혁 작편곡 제1집](오스카, OR1001)이라는 ‘옴니버스 음반’에서 레코딩 데뷔를 했다). 아이들 – 꿈을 꾸리(1971) 조용필 – 꿈을 꾸리(1972) Q: 그때 같이 활동하던 다른 그룹 사운드들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네요. – (조)용필이형이 하던 화이브 휭거스는 아까 얘기했고, 샤우터스라고 하청일씨 있던 그룹이 있었죠. (하)청일이형이 리듬 기타, 드럼에 김선, 베이스에 조경수(필자 주: 신중현의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이태현도 샤우더스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다고 한다. 사실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분들은 일반 무대에서는 거의 안 했고 미 8군 무대에서만 했었죠. 그 전으로 올라가면 차도균씨가 하던 가이스 앤 돌스, 그리고 조영조씨가 하던 코끼리 브라더스 관련된 분들, (조)갑출이형이 하던 조커스. (박)활란이 오빠가 하던 드래곤스…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그룹의 역사로 따지면 무지하게 오래되었어요. 그리고 일반 무대에서는 미도파 살롱에서 이동기 악단, 김치스, 바보스가 연주하는 걸 처음 봤죠. 이분들도 미 8군 무대 출신이지만. Q: 그러면 김트리오를 나온 뒤 영 에이스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어요? – 영 에이스는 오승근씨가 투 에이스(Two Ace)라는 듀엣을 하다가 갈라지고 자기가 영 에이스라는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게 우리와 합쳐진 것이죠. 그때부터 미 8군 무대에는 나가지 않게 되었죠. 오승근씨는 최근에 트로트 음반을 내고 있지만 그때는 팝 음악을 참 잘 불렀어요. 트로트 음반 내는 건 그게 돈이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죠. 영 에이스 – 한밤의 고백(Midnight Confession)(1971) (원곡은 그래스 루츠(The Grass Roots)) Q: 굉장히 복잡하군요. 그러면 서울 나그네는? – 서울 나그네는… 그 전에 최헌, 김기표, 손학래 등이 있던 검은 나비라는 그룹 알죠? 그걸 같이 만들었는데 솔직히 음악적 방향이 잘 맞지 않았어요. 그런데 김명곤이 군대 갔다가 신체검사에서 떨어져서 나온 거에요. 김명곤은 원래 대구에서 홍순백씨가 하던 그룹에 있었던 친구인데, 참 감각이 좋았어요. 통기타도 잘 치고 피아노도 잘 쳐서 제가 그때 찍어 놓았죠. 그래서 검은 나비에서 나와서 김명곤이랑 합쳤고, (이)남이형은 엽전들로 갔고, 그래서 나, (김)명곤이, (김)태흥이형, 김태욱 등이 모여서 미 8군 들어가서 오디션을 보았죠. 그게 1974년 정도의 일이에요. 그 때 부산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부산 그룹들은 아직도 로큰롤을 하고 있는데 우린 헤비 메틀을 했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가 음악성이 몇 단계 앞서 있었던 셈이죠. 그래서 쫓겨났어요(웃음). (허경: 사실 우리 전체의 음악성이 높았던 게 아니라 이철이의 음악성이 높았던 거지. 그런데 음악하는 사람들은 다 이철이를 존경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잘 몰랐던 것이죠). (필자 주: 최이철이 검은 나비에 가입하기 전 1973년 경 최이철, 신중현, 김기표, 이남이 등이 함께 모여 잠시 그룹을 한 일이 있다. 이 그룹이 한국 록 매니아들 사이에서 ‘초기 엽전들’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본인들은 그런 그룹이 잠시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게 엽전들이라는 사실은 부인하는 것 같다. 이 사실은 이 인터뷰에서는 명확히 확인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그룹으로부터 엽전들, 사랑과 평화, 그리고 검은 나비 세 그룹으로 이합집산 혹은 분열증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하다. 1970년대 중반을 풍미한 ‘슈퍼그룹’이라고 할 만하다). Q: 음악 공부 따로 하신 거에요? – 처음부터 받은 건 없었어요. 그러다가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에 들어갔는데 그리고 나서 작곡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서 이교숙 선생한테 사사받았는데 뭐랄까 양에 차지는 않더라구요. 그래서 이판근 선생도 찾아가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사사받고 그랬죠. 서울 나그네의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 Q: 그렇다면 서울 나그네에서 사랑과 평화로 간 건 자연스럽게 연장된 것이네요. – 그렇죠. 서울 나그네에서 사랑과 평화로 넘어온 것은 베이스만 빠진 거죠. (이)남이형이 잠깐 하다가 나갔고 그 대신 사르보(Sarvo)라는 이탈리아 친구가 들어왔어요. 사랑과 평화는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할 때 (이)남이형이 지어준 이름이에요. 그때 여러 사람들이 이름을 써서 좋은 것으로 정하자고 그랬는데 그 중에서 (이)남이형이 지은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정했어요. 히피적인 이름이죠. 그런 분위기가 나잖아요. 그때 대마초 파동도 있었고 그래서 3년간 활동을 정치당했죠. 음반이 1978년에 나온 것도 그때문이죠. 방송 일도 못하고 업소에서 연주도 하는둥 마는둥 했고 그때가 제일 힘든 시기였어요. 훵키 록이 만들어지기까지 Q: 그러다가 1978년에 “한동안 뜸했었지”를 수록한 사랑과 평화의 첫 번째 음반이 나와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곡을 작곡하고 이 음반을 기획해 주신 분은 이장희씨라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 – 예 맞아요. 장희형은 그때 ‘세시의 다이얼’인가 ‘밤을 잊은 그대에게’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는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콧수염 기른 사람이 어느날 와서 음악을 듣다 가더라구요. 그 뒤로도 자주 와서 결국 친해지게 되었고 나중에 형님이 “이철아, 나 니가 스타되는 걸 보고 싶다”고 하더니 음반을 내자고 말하더군요. 그때 동아방송에서 방송 스튜디오를 연습실로 내주는 등 우리한테 잘해줬죠. 녹음은 이촌동에 있는 서울 스튜디오에서 했죠. Q: “어머님의 자장가”와 2집에 실린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나 “장미”도 (이)장희님의 곡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음반 표지에는 이장희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나옵니다. – 그때 (이)장희형이 대마초 사건 때문에 자기 이름을 못 써서 그런 거에요. 그래서 자기 마누라랑 아들 이름을 썼죠. 저는 편곡만 한 건데 원래 (이)장희형이 만들어 온 곡은 통기타로 반주하는 곡이었는데 제가 훵키하게 바꿔버린 것이죠. 사랑과 평화 – 한 동안 뜸했었지(1978) 이장희 – 한 동안 뜸했었지(1982) 사랑과 평화 – 어머님의 자장가(1978) 사랑과 평화 –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1979) 사랑과 평화 – 장미(1979) Q: 이장희같은 ‘포크’ 계열의 음악인들, 이른바 ‘통기타 가수’들과 사랑과 평화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외일 것 같습니다. 최이철님은 송창식님과도 각별한 사이라고 하던데요 맞습니까? – 음악 하다 보면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게 되어 있어요. 장희형 이야기는 앞에 했고, (송)창식이형은 젊었을 때부터 친했고 뒤에도 “담배가게 아가씨”같은 곡은 내가 기타를 쳤던 곡이죠. 그 전에 1980년인가 사랑과 평화가 문화체육관에서 첫 콘서트를 할 때 창식이형이 음향을 봐 주었고 (윤)형주형은 연출을 맡아주었죠. (정한옥: 친할 사람들은 다 친해요. 그리고 포크는 포크대로 매력이 있잖아요. 음악은 다 좋은 거잖아요). Q: 훵키한 음악이 나오게 된 계기를 좀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당시 김명길씨가 이끌던 데블스나 신병하씨가 이끌던 사계절 등이 훵키한 리듬을 도입했지만 이 두 밴드의 음악은 훵크보다는 소울에 가까웠던 반면 사랑과 평화는 보다 본격적으로 훵키한데 어떻게 이런 음악이 들어왔는지. – 우리는 미 8군 무대에서 제일 어린 존재였고 미 8군 무대의 특성 상 안 거친 음악이 없었어요. 맨 처음 트위스트부터 소울, 싸이키델릭, 하드 록 그래서 하드 록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AFKN 라디오에서 이상한 음악을 들었어요. 그걸 듣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죠. 그래서 청계천 가서 음반 찾다가 칙 코리아(Chic Corea)랑 코모도스(The Commodores)를 찾은 거에요. 근데 그건 그다지 재미가 없었고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같은 것을 듣고 결정적으로 생각이 바뀌었죠. 그때는 그걸 ‘재즈 록’이라고 불렀는데 김명곤을 만난 1974년부터 그걸 했어요. 그래서 그거 사서 듣다가 거기에 빠졌어요. (정한옥)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미도파 살롱에서 연주할 무렵 조선 호텔에 투모로우(Tommorrow)라는 나이트클럽이 생겼는데 거기에 하우스 록커(House Rocker)라는 그룹이랑 오리지널스(Originals)라는 필리핀 그룹이 왔어요. 그래서 거기를 가 봤는데 그 친구들이 슬라이 스톤(Sly Stone)을 연주하는 거에요. 그때 필리핀 애들이 키가 컸는데 그때 스틱을 특이하게 잡고 때리는데 파워가 장난이 아닌 거에요. 그런데 웃기는 게 씽커페이션이 들어가서 첫박자와 끝박자를 잡질 못하겠는 거에요. 그래서 그 친구들 하는 음악 제목이 뭐냐 해서 그걸 찾았는데 찾고 보니 그게 쿨 앤 더 갱이더군요. 사랑과 평화의 연주곡 음반 [Disco] 표지(대도, DSAP-79002, 1979). 편곡력과 연주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의 사랑과 평화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Q: 초퍼나 슬랩 등 훵키 리듬 특유의 베이스 기타를 주법을 도입한 과정은 어땠나요? – (이)남이형의 베이스는 훵키 스타일이 아니었죠. 그래서 사르보라는 이탈리아 친구를 데려온 거에요(필자 주: 송창식이 1978년에 발표한 [사랑이야/나이 기타 이야기](서라벌, SBK-0002)의 뒷면 표지에 Savatore Cantone라고 쓰여진 인물이 사르보다. 아마도 ‘Salvatore’의 오기로 보인다), 그때 그 친구는 송창식형이 월급을 주고 데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연주 스타일이 우리랑 맞으니까 제가 반해서 창식이형한테 말해서 데리고 온 것이죠. 나중에 사르보가 비자만료기간이 다 되어서 일본으로 가게 되었죠, 그 무렵 송홍섭이 제대하게 되어서 데리고 와서 사르보한테 베이스를 가르친 것이죠. 그때는 미 8군 무대에서 연주했는데 우리가 클럽에서 연주하는 날은 흑인들만 왔어요. TV에서 본 흉내도 내고 공연 끝나면 전부 엄지 손가락으로 베이스 줄을 튕기는 흉내를 하고 돌아갔어요. 사랑과 평화 – 다 함께 춤을(Shake Your Body)(1979) 송창식 – 나의 키타 이야기(1978)(베이스: Sarvo, 기타: 김석규, 키보드: 이호준, 드럼: 배수연) Q: 사랑과 평화의 혁신적 스타일의 음악에는 베이스나 기타 못지 않게 드럼과 키보드의 역할이 중요해 보였습니다. 먼저 김태흥 선생님은 어떤 스타일의 드러머였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록 밴드의 드러머같지는 않아서 여쭤 보는 말입니다. – 태흥이형은 1949년생이었는데 우리 형의 친구였어요. 그래서 어릴 때 만났는데 정말 형제처럼 지냈었죠. 태흥이형은 연주의 폭이 넓었죠. 군대 있으면서 풀 밴드를 했고 뒤에는 캄보 밴드도 하는 등 다양하게 경험했으니까 연주의 폭이 넓은 것이죠.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태흥이형의 드럼에는 사람 냄새 나는 게 있어요. 그룹은 사실 드럼이 리더에요. 기타가 아무리 나서도 소용없어요. 사운드 쥐락펴락하는건 드럼이니까. Q: 그 다음 김명곤님에 대해 몇 가지 묻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억에 의하면 TV에 나와서 키보드 여러 개를 탑처럼 쌓아 놓고 연주하는 것은 김명곤님과 사랑과 평화가 처음으로 기억됩니다. 김명곤님과의 파트너쉽은 어떤 성격이었나요? – (허경: 폼으로 그런 거지 뭐(웃음)). 나하곤 친구 사이죠. 김명곤이 아버지가 광주 MBC에서 악단장으로 근무했고 (김)명곤이 형제가 전부 음악가였어요. 첫째 형이 드럼, 둘째 형이 테너 색서폰, (김)명곤이 클라리넷을 하다가 나중에는 건반으로 돌았죠. 나중에 우리랑 헤어지면서 작곡·편곡 쪽으로 갔고 그러다가 나미가 부른 “빙글빙글”고 “슬픈 인연” 등 작곡하고 잘 나갔죠. 걔는 정말 난 놈이에요. 나하고 (김)명곤이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어요. 작곡이랑 편곡이랑 다 걔랑 같이 했죠. (허경) 그런데 주위에서 보기에는 (조)용필이형이라든가 명곤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최)이철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프로포즈는 다 그 사람들이 (최)이철이한테 한 거에요. (최)이철이가 그 사람들한테 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최)이철이나 (김)명곤이도 난 놈들이지만 우리 앞에는 진짜 훌륭한 연주인들이 많았어요. 우리들이 보고 배워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 분들이 요즘 한국의 연주인들 보면 한심하다고 그럴 거에요. . Q: 김명곤님은 여러 키보드를 정말로 ‘폼으로’ 사용하셨나요?(웃음) 사랑과 평화의 1집과 2집을 들어 보면 몇몇 곡들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키보드 주법같은 것도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나 예스(Yes)같은… – 폼으로 그랬다는 말은 농담이고… 예를 들어 하나는 피아노, 하나는 신씨사이저, 하나는 스트링, 하나는 애드립 이런 식으로 용도를 달리 했죠. 프로그레시브 록은 (김)명곤이가 아무래도 그런 밴드들도 좋아했으니까 자연히 그런 느낌이 나왔겠죠. 근데 명곤이는 키스(Kiss)를 더 좋아했는데… Q: 그 당시 그룹 사운드 중 사랑과 평화와 비슷한 음악을 하는 밴드가 또 있었나요? – 없었죠. 아, 아니다. 김 트리오라고 미국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어요. 키보드 주자가 베이스를 같이 치면서 했던 그룹이었어요, 우리 그룹과 색깔이 잘 맞는 편이었죠(필자 주: 앞서 언급한 김대환, 조용필, 최이철이 결성한 김 트리오와는 이름만 같다. 김 트리오는 ‘베니 김’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재즈 뮤지션 김영순의 자제들이 결성한 그룹으로 사랑과 평화와 비슷한 시기에 훵키한 록을 선보였다. 물론 국내 대중의 반응이 없자 뒤에는 “연안부두”같은 트로트 스타일이 가미된 곡들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타일은 달랐지만 TV에 출연할 때는 산울림, 김 트리오, 와일드 캐츠, 우리 이렇게 네 그룹이 같이 다녔어요(허경: 지금 내 마누라가 와일드 캐츠 출신입니다. 이름이 지윤경인데 뒤에 와일드 캐츠가 갈라진 다음 젊은 연인들이란 그룹을 만들어서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노래를 불렀죠). Q: 그 당시 같이 활동하던 산울림을 비롯한 캠퍼스 그룹 사운드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는지도 저희로서는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대마초 사건 이후 직업적 그룹 사운드들은 전멸하다시피 했고 그 공백을 메운 게 캠퍼스 그룹 사운드인데, 이들의 ‘연주력’이 시원치 않다는 이유로 그닥 곱지 않게 보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산울림같은 경우는 아이디어가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스타일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김창완씨 곡은 얼마나 좋아요? 연주 못한다는 걸 감안해도 곡이 얼마나 좋아요. 연주를 잘 못해도 독특한 그룹이 얼마나 많은데… 훌륭한 연주인이 있어서 연주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성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것이죠. 1980년대 이후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지금 아이들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이철의 옆에 있던 베이시스트 허경 아이들 – 바람아!(노래: 허경) Q: 1980년대 이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여쭤 보겠습니다. 단, 몇 가지 사실만 확인드리겠습니다. 김현식 1집 음반의 연주곡들이 사랑과 평화의 연주곡과 같더군요. 이 음반의 레코딩 세션에 참여하신 것이 맞죠? 그리고 김현식과 절친한 사이인 봄여름가을겨울도 사랑과 평화와 밀접한 관계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예 맞아요. 김현식이는 1집에도 세션을 해 주었고 그 뒤에도 친하게 지냈죠. 중간에 한 앨범에도 참여했고 나중에 6집인가요 유작 앨범. 그것도 원래는 내가 다 곡을 하기로 했었죠. 그런데 열세곡째 녹음 들어가는 날 현식이가 그런데 그 전에 (김)현식이가 살아있을 때 전부 내 곡으로 하는 데 “형, 이 중에서 쓸만한 거 있으면 들어 봐”라고 하면서 세 곡을 가져와서 쓸만한 게 있나 보라고 했던 적이 있어요. 그 중에 “사랑 사랑 사랑”이랑 “내 사랑 내 곁에” 가 있었는데 내가 조금 안 맞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현식이가 “알았어”라고 그랬고 그 뒤에는 잊어버렸거든요. 그런데 그 노래가 그렇게 사랑받을 줄은 몰랐죠. 그러니까 지금 나와 있는 (김)현식이 6집은 내가 한 거 몇 곡하고 이전에 한 것들하고 섞여서 나온 것이죠.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을 처음 봤을 때는 (김)홍탁이형이 서교동에 녹음실 차렸을 때였는데 그때 참 열심히 하고 잘 하더라구요. 그때 (김)종진이랑 (전)태관이 말고 장기호랑 박성식이 같이 그룹에 있었죠. 그래서 깨지지 않고 뭉쳐서 끝까지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장기호랑 박성식이 가스펠한다고 나갔죠. 뒤에는 우리랑 함께 사랑과 평화 4집(1989)에 잠시 참여했다가 빛과 소금을 만들어서 나갔죠. Q: 1980년대 사랑과 평화로 활동하실 때는 주로 어떤 무대에 섰나요? 1983년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연주하신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때는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사랑과 평화 때는 주로 무겐(Mugen)이나 타워 호텔, 그리고 호텔은 아니지만 코파카바나(Copa Cabana)같은 데 섰었죠. 1983년경 리버사이드에 섰을 때는 코리아라는 그룹 이름을 썼고, 손학래가 리더였고 사랑과 평화 관련된 사람들 중에는 최태일(베이스)만 있었죠. Q: “넋나래”가 들어 있는 앨범은 정규 앨범으로 분류되지 않고 유현상씨가 보컬로 참여하고 있어서 특이합니다. 작사가로 하덕규씨의 이름이 올라온 것도 특이합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이죠? – 그 음반에서 유현상씨는 “목소리” 한 곡만 불렀고 1985년 경 머치 모어라는 제일생명 뒤에 있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할 때는 사랑과 평화의 리드 보컬로 활동한 적도 있어요. 하덕규와도 친한 사이였어요. 친할 사람은 다 친해지게 되어 있어요. Q: 2년 전 들국화의 공연에 종종 참여하셨는데 그건 공연 세션으로 잠시 참여하신 건가요 아니면 지속적으로 하실 계획이 있으신 건가요? – 그건 세션으로 한 것이죠. 그때 이후 함께 한 적은 없었고. 들국화 음악 참 좋잖아요? 특히 전인권씨 처럼 표현하는 사람도 드물고 음악성이 있다고 봐요. (최)성원씨가 만든 “그것만이 내 세상”같은 대곡도 좋고… 맨날 훵키 이런 것만 하다가 들국화 공연에서 1970년대 록 분위기의 장대한 연주를 하니까 그것도 좋더군요. Q: 최근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에서 연주하시는데, 나이트클럽에 비해 연주하시기에 어떠신가요? – 나이트클럽은 춤을 추게 하기 위해 맞추어 주는 것이고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는 콘서트랑 똑같아요. 그래서 라이브 카페쪽이 더 힘들어요. 특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많이 부담스럽죠. 통기타 가수들사이에 끼어서 하기도 힘들고. Q: 함께 활동했던 그룹 사운드들 가운데 1970년대 후반 트로트의 가수나 작곡가로 전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누군지 말씀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테고요. 사랑과 평화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때 어떤 심정이셨는지 궁금합니다. – 심정이고 뭐고 그런 거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우린 그런 거 하라고 그래도 못 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들어요. 미국도 가 보았고 일본도 가 보았고 거기서 훵키한 스타일의 공연을 했는데 그런 무대에서는 차라리 뽕짝이 났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 사람들은 워낙 연주를 잘 하니까 아예 우리 색깔을 확 가지고… 이 말은 앞으로 뽕짝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닌 음악을 앞으로 하고 싶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유라시아의 아침’은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니에요. 아직 발매는 안 되었는데 대금도 들어가고 그러는데 한 나라 스타일도 아니고… ‘동양음악’ 분위기가 나는 음악이에요.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하면 어디 가서 혹시 연주를 잘 못하더라도 이상하다는 반응은 듣지 않을 것 같아요. ‘동양 사람들이니까 동양 음악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겠죠. 최이철과 그의 동료들이 연습실로 사용하는 스튜디오 Q: 앞으로의 전반적인 음악적 방향을 그쪽으로 설정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 네. 제가 하다 보니까 그쪽에 빠졌어요. 그건 내가 먼저 나서서 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런 제의를 했는데 하다 보니까 우리가 빠지게 된 거에요. 인도, 네팔, 중국, 인도네시아 등 동양의 음악. 그렇다고 완전히 그쪽으로 진하게 간 것은 아니고 서서히 간 거에요. 그런데 동양 음악이 음이 꺾어지는 게 있잖아요. 그게 대개 비슷하더라구요. 그런데 그걸 표현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두 달만에 끝내기로 해놓고선 6개월이 걸렸어요. ‘유라시아의 아침’의 테이프를 전해받고 그 뒤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이후의 그의 작업에 대해서는 나중에 심층적으로 다룰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여기서 인터뷰 정리 작업은 마치고자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일’인 인터뷰를 마치고 연습실을 나설 때 최이철과 그의 동료들은 곧 ‘일’을 나가기 위해 연습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최장수 그룹’이라는 것이 영예로운 호칭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 그렇지만 그가 다른 것 아무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음악밖에 모르고 살았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런 사람의 현재가 재능과 업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화려하고 찬란하게 살고 있는 건 더욱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습은 천박한 연예인도 아니고, 으스대는 예술가도 아니고 예인(藝人)이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려 보였다. 20021026 | 신현준 homey@orgio.net 관련 글 사랑과 평화를 향한 구비구비 머나먼 길(The Long And Winding Road To Love And Peace) – vol.5/no.8 [20030416] 이철호와의 인터뷰 – vol.5/no.8 [20030416] 송홍섭과의 인터뷰 – vol.5/no.8 [20030416] 프론트맨보다 더 중요한 사이드맨, 이남이와 인터뷰 – vol.4/no.24 [20021216] 아이들 [아이들과 함께 춤을] 리뷰 – vol.4/no.19 [20021001] 서울 나그네 [고고 생음악 1집]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1집 [한동안 뜸했었지]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Disco]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2집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넋나래]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3집 [Vol.1(노래는 숲에 흐르고/울고 싶어라)]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4집 [바람불어/샴푸의 요정]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5집 [못생겨도 좋아/환상]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6집 [Acoustic Funky(얼굴보기 힘든 여자)]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 7집 [The Endless Legend] 리뷰 – vol.5/no.8 [20030416] 유라시아의 아침 [유라시아의 아침] 리뷰 – vol.5/no.8 [20030416] 철가방 프로젝트 [노래를 배달해드립니다] 리뷰 – vol.5/no.8 [20030416] 사랑과 평화의 ‘평화 콘서트’ 열린다 – vol.5/no.8 [20030416] 고고 클럽, 한밤의 혁명 혹은 하룻밤의 꿈: 1971-73- vol.4/no.21 [20021101] 소울을 환생시킨 ‘악마들’의 후일담: 김명길, 최성근, 홍필주와의 대담- vol.4/no.21 [20021101] 라스트 챤스 [폭발적인 사운드(화이트 크리스마스)] 리뷰 – vol.4/no.21 [20021101] 데블스 [추억의 길/연인의 속삭임] 리뷰 – vol.4/no.19 [20021001] 템페스트 [힛트곡 제1집] 리뷰 – vol.4/no.21 [20021101] 트리퍼스 [Trippers Go Go] 리뷰 – vol.4/no.21 [20021101] 드래곤스 [드래곤스] 리뷰 – vol.4/no.21 [20021101] 데블스 [그리운 건 너/사랑한다면] 리뷰 – vol.4/no.21 [20021101] 사계절 [사계절] 리뷰 – vol.4/no.21 [20021101] 정성조와 메신저스 [어제 내린 비](OST) 리뷰 – vol.4/no.21 [20021101] 관련 사이트 사랑과 평화 공식 사이트 http://www.grouploveandpeace.com/ 한국 록 음반 연구회 http://cafe.daum.net/add4 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윈드버드 http://www.windbird.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