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020022752-0420review_hahndaesoo1한대수 – 멀고 먼 길 – 신세계(SIS 81115), 1974

 

 

한국 포크의 작가주의, 그 뒷 이야기들

1969년 9월 19일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한 공연. 똑딱거리는 시침 소리, 진한 향 냄새가 칠흑 같은 적막을 깨뜨리더니, 자가 제작했다는 징 소리, 괴기스러운 톱 소리 등이 동원된 독특한 공감각적 공연을 벌인다. 아니, 그보다도 더 이색적인 존재는 이 공연의 주인공이었다. 한대수가 1968년 귀국 후 벌인 일련의 사건들, 세시봉에서의 첫 공연부터 이날 드라마센터에서의 ‘리사이틀’까지의 여정은 많은 이들에게 낯선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포크 가수들’에게 자기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당연하면서도 당연한 것이 아니던 진리를 새삼스럽게 일깨운 충격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초유의 ‘싱어송라이터’가 이곳을 견디지 못해 도미했다는 사실도…(이를 두고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가버렸다는 비아냥거림도 있지만).

그때 이미 “행복의 나라”, “과부 타령”, “마지막 꿈”, “고무신”, “여치의 죽음” 등(후일 2집 [고무신]에 실릴 곡까지) 마련되어 있었지만 이상한 외계인으로 취급받던 그의 노래들은 선뜻 음반화되지 못했다. “바람과 나”가 김민기의 음반에, “행복의 나라”가 양희은의 음반에 녹음되지 않았다면 1974년 5월 군에서 제대한 후 그의 음반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군대에 가면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모 방송국 PD의 주선으로 녹음해 둔 것이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첫 곡 “물 좀 주소”는 이 앨범의 백미이자, 나아가 당시 포크 음악 중에서도 탁월한 곡이 아닐까. 먼저 이례적으로 보이는 것은 포크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노래 형식에서 으레 나오는 전주가 이 곡에 없다는 것이다. 대신 불현듯 “물 좀 주소”라는 경상도 억양이 가미된 걸쭉한 목소리가 튀어나올 뿐. 게다가 거칠고 투박한 한대수의 목소리는 당시 많은 포크 음악이 지향했던 곱상하고 청아한 음색과는 딴판이지 않은가. 이 특이한 구성과 거친 목소리는 곧 드럼과 베이스, 전기 기타와 조우함으로써 ‘포크 록’의 형상을 갖춰 간다(드럼은 당시 신중현과 엽전들의 권용남이, 베이스는 정성조와 메신저스 출신의 조경수가 맡음으로 이 음반 배후의 ‘화려한 인맥’을 보여준다). 물론 단 하나뿐인 록 편성의 곡인지라 다른 곡들에 비해 큰 진통을 겪었는데 제일 공을 들인 곡이자 이 음반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곡이 되었다. 엇박으로 짱짱거리는 전기 기타 리듬이 곡에 리듬감을 돋구는데 세션 연주자가 한대수가 원하는 리듬을 표현하지 못해 기타 줄 근처에 수건을 덧대고 한대수 본인이 연주했다는 비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사실 이 곡 외에는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평범한 포크 음악의 형상과 비슷해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 평범한 포크일까? 전체적으로 처음에는 기타 반주만으로 노래하다가 대략 2절 등에 이르면 다른 악기들이 추가된다. 이때 심심할 수도 있는 사운드를 보다 맛깔스럽게 만들어준 숨은 조력자는 임용환일 것이다. “행복의 나라”에서처럼 그의 기타는 독특한 스케일로 음의 고저를 부단히 자유스럽게 움직이며 둥둥거리거나, “사랑인지”에서처럼 젓가락을 이용해 기타를 연주함으로써 스틸 기타 비슷한 감각을 발현한다(아기 장난감인 딸랑이 소리가 음반에 적힌 ‘특수효과’다). 더불어 단아하고 품격있는 사운드를 만든 또 한 명의 일등공신은, 경건한 어조의 피아노나 오르간, 그리고 천상으로 인도하는 듯한 플루트를 연주한 정성조이다. “바람과 나” 후반부에서 그의 피아노 연주가 (갑작스레) 등장하며(김민기의 버전에 비해 뿌옇게 녹음된 느낌을 준다), “잘 가세”와 “행복의 나라”에서도 다소 경건하고 사이키델릭한 느낌의 오르간 연주가 있다. 이 곡들에서 정성조의 연주는 선명한 기타, 하모니카 소리와 대비된다. “하룻밤”과 “바람과 나”처럼 블루스 하모니카는 쓸쓸함을 극대화하는 악기가 된다.

이처럼 이 음반의 사운드는 방황과 고독이 지배적인 정서와 조응한다. 그의 가사는 물, 하늘, 바람, 태양 등 자연으로부터 채취되는데 이로써 자유와 행복을 갈구하는 개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은유가 된다. “구름의 배를 타고서” “밀리는 파도의 끝이 없는 소리”에 있다가(“인상”), 추운 겨울 인적없는 가로등 불빛만 있는 골목길로(“사랑인지?”), 같이 놀 친구없이 홀로 있는 집 안으로(“옥의 슬픔”) 이동하면서 자신의 감정들을 노래한다. ‘옥’이라는 이름의 자아가 등장하는 “옥의 슬픔”은 다섯 번 절을 반복하며 자기의 일상을 (가사를 못 알아듣는 외국인이라면 정말 지겨워 할 정도로) 길게 늘어놓는데 그 사이사이에 플루트가 심심함을 덜어 준다. 그런 고난 속에 그가 찾는 대상은 이 음반 이후에도 곧잘 등장하는 여성(처녀 혹은 소녀)이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남성에게 구원의 대상은 언제나 베아뜨리체가 아니던가.

목탁과 퍼커시브한 기타 주법이 조화를 이루는 “하루아침”은 1974년의 초판에는 없다가 3집이 나올 즈음 1989년 재발매판(초판과 동일한 재킷)에만 A면 마지막 곡으로 수록되면서 처음으로 공개된다(복각 CD인 [Masterpiece]에는 1집의 마지막 곡으로 배치되었다). 이 비운의 곡은 원래 다른 곡들과 함께 녹음되었으나 음반사가 이 곡 때문에 음반이 판매 금지될까봐 자진삭제한 곡이다. 그 이유는 노래를 들으며 박정희 정권의 국민 사병화 정책을 떠올려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021020022752-0420review_hahndaesoo2[멀고 먼 길]이라는 앨범 제목은 한대수의 고독으로 가득 찬 정처 없는 길을 가리키는 듯하다. 지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뒷 모습이 실린 여행길 사진 역시 그와 같은 과거와 미래의 고난의 길을 상징적으로 웅변한다(이 커버 그림은 전 부인(김명신)과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다. 초판에는 이 그림이 뒷면에 있고 위악적인 얼굴 그림이 앞면에 있었지만 1977년 재발매되면서 앞면과 뒷면이 바뀌기도 했다). 약 30년 전에 한대수가 만든 음악들은 지금 들어도 여러 가지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각자 ‘멀고 먼 길’을 걸어야하기 때문이 아닐까. 또 자연의 사물을 빗댄 은유적인 표현들이 청자들에게 풍부한 상상의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20021025 | 송창훈 anarevol@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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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창훈이 쓰고 최지선이 정리함.

수록곡
Side A
1. 물 좀 주소
2. 하룻밤
3. 바람과 나
4. 잘가세
5. 하루 아침
Side B
1. 옥의 슬픔
2. 행복의 나라
3. 인상
4. 사랑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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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주간한국] 최규성 기자의 추억의 LP 여행: 한대수(上)
http://www.hankooki.com/whan/200103/w2001031510482861510.htm
[주간한국] 최규성 기자의 추억의 LP 여행: 한대수(下)
http://www.hankooki.com/whan/200103/w20010321205135615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