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016101742-00459401Breeders – Title TK – 4AD/Elektra, 2002

 

 

자매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브리더스(Breeders)의 [Title TK]는 9년 만에 발표된 정규 앨범이다. 길었던 휴지기 때문인지 포장을 뜯으면서 우선은 반갑고 설레었다. 하지만 초장부터 개인적 감상에 빠지게 될까봐 얼른 자료부터 뒤지기 시작한다. 먼저, 이곳 [weiv]에는 픽시스(Pixies)나 브리더스의 앨범 리뷰가 없었던 바, 혹시나 이들의 이름이 생소할 독자들을 위해 약간의 계보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물론 익숙한 독자들에겐 이런 장황한 얘기가 지루하겠지만 긴 세월 동안 잊혀졌을지 모를 밴드의 과거를 조금 들쳐보는 정도는 용인되리라 믿는다.

브리더스는 인디록 씬의 대표적인 여걸이자 픽시스의 베이시스트였던 킴 딜(Kim Deal)이 이끌고 있는데, 리즈 페어(Liz Phair), 홀(Hole), 베루카 솔트(Veruca Salt), 비키니 킬즈(Vikini Kills), 베이브스 인 토이랜드(Babes In Toyland) 등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계의 우먼 파워를 대표하는 밴드로 거론되어 왔다. 이들이 데뷔 앨범 [Pod]을 발표한 1990년은 킴 딜이 몸담고 있던 전설적인 밴드 픽시스가 앨범 [Doolittle](1989)을 발표하고 한창 전성기를 구가한 때이다. 킴은 블랙 프랜시스(Black Francis)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컬리지 록 밴드 쓰로잉 뮤지스(Throwing Muses)의 타냐 도넬리(Tanya Donelly)와 손잡고 당시엔 프로젝트 밴드의 성격이 짙었던 브리더스를 결성한다. [Pod]에는 스티브 앨비니(Steve Albini)의 손때가 묻은 순도 100퍼센트의 소박한 로파이 펑크 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킴은 픽시스 해체 후 본격적으로 브리더스 활동에 매진했고 쌍둥이 여동생 켈리 딜(Kelly Deal)과 함께 2집 [Last Splash](1993)를 발표한다(타냐는 브리더스를 떠나 자신의 밴드 벨리(Belly)를 결성한다). [Last Splash]에는 대학가에서 크게 히트하여 MTV에도 자주 등장했던 “Cannonball”이 담겨 있는데, 이 곡은 이전까지의 직선적인 거라지 펑크 스타일과 달리 업템포의 흥겨운 리듬 라인이 인상적인 1990년대 초반 얼터너티브씬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이다.

플래티넘을 기록한 [Last Splash]의 대중적 성공 이후 브리더스는 1995년에 라이브 앨범 [Live in Stockholm]을 발표하고는 7년 동안 침묵하게 된다. 2집 앨범이 크게 성공한 마당에 9년 동안 정규 앨범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외다. 9년이란 세월은 강산이 거의 바뀔 만큼 길고, 특히 인디 록 밴드에게 있어서는 두 세 번 정도 까맣게 잊혀질 수도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오랫동안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문 뮤지션으로서 나태하다고 볼 수도 있다. 내로라 하는 슬래커(slacker)들도 한두 해에 한 장씩은 신보를 내고자 노력하고 발에 땀나도록 라이브 투어를 다니는 게 록밴드가 생존하는 방식이니 말이다. 그간 록 씬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 킴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역시 절친했던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얼터너티브 씬의 영광은 오명으로 바뀌고 동료들은 하나 둘 지글거리는 분노의 기억을 부정하며 필드를 떠났다. 얼터너티브 씬의 쓸쓸한 퇴조에도 침묵하던 딜 자매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단 있어 보이던 두 자매도 마약과 술에 의지했던가 보다. 물론 딜 자매가 빈둥거리며 허송세월만 한 것 같지는 않다. 동생 켈리는 마약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료를 받았고, (자신 역시 마약과 알콜에 중독된 적이 있었지만) 킴은 동생의 재활을 도우면서 앰프스(The Amps)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하는 등 음악적 돌파구를 모색했다. 어쨌든 9년이란 세월 동안 딜 자매가 시련과 혼란을 겪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음악에 투영되었다.

9년만에 선보인 앨범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먼저 [Title TK](TK는 ‘to come’의 약어로서 ‘제목 미정’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불확실한 제목부터가 그간 밴드가 겪었을 방황과 지루한 모색의 과정을 암시한다. 킴은 새 멤버를 영입하기 위해 수많은 뮤지션들과 작업하면서 음악적 실험에 매진했고, 결국 딜 자매를 제외하고는 멤버 전부가 교체되었다. 앨범 작업이 이토록 늦어진 한 가지 이유가 마땅한 드러머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킴 스스로 드럼을 배웠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결국 호세 메델레스(Jose Medeles)가 드럼을 맡았다. 또 LA의 로컬 펑크밴드 피어(Fear)의 멤버 둘이 가세했는데, 엘비스의 친척으로 알려진 기타리스트 리차드 프레슬리(Richard Presley)와 베이스를 연주하는 만도 로페즈(Mando Lopez)가 그들이다. 한 가지 실소를 자아내는 얘기로, 인터뷰에서 “브리더스의 음악과 어떤 점이 맞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브리더스도 맥주에 대한 곡을 썼고 우리도 그런 곡이 몇 곡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쨌든 어렵사리 5인조의 라인업을 갖추어 드디어 킴 혼자서 해내는 방식이 아니라 밴드 활동에 필요한 협력과 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 앨범 크레딧에 등장하는 스티브 앨비니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그는 너바나의 [In Utero]와 Pixies의 [Surfer Rosa]를 프로듀스 한 얼터너티브 록계의 대부격인 인물인데 [Pod]에 이어 본 앨범의 제작을 맡은 것이다.

20021016102025-kimKim Deal과 Steve Albini의 최근 모습.

사실 파악은 이쯤 해두는 게 좋겠다. 흥분과 기대감으로 첫 곡 “Little Fury”를 트니 의외로 둔탁한 드럼 소리만이 들려온다. 잠시 후 픽시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미드 템포의 베이스 훅에 실려 거친 킴의 보컬이 들려올 때쯤에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인 “Off You”는 의외의 발라드 넘버인데, 루 리드가 기타를 연주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감성과 닮아 있다. 킴 딜은 이 곡에서 초기 곡들에서 느낄 수 있던 공격성과 냉소를 접고 세파에 상처받은 듯이 여린 감성을 드러낸다. 킴은 숙취가 남아 있는 아침에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짜내는 것 같은 게으르고 조금은 서글픈 목소리로 “나는 진홍빛의 가을이야(I am the autumn in the scarlet)”라고 알 듯 모를 듯 읊조린다. 그 밖에 “The She”는 소닉 유스를 연상케 하는 기타 노이즈의 향연을 들려주고 있으며, 엔딩 트랙인 “Huffer”는 전형적인 브리더스식 거라지 펑크 넘버로서 초창기에 그들이 들려준 담백한 사운드로 회귀하는 듯한 매력 넘치는 곡이다. 특히 이 곡에서 드러머 호세는 베이스 한 대, 라지탐 한 대, 심벌 두 대만을 갖춘 간소한 세팅으로 흥겨운 리듬라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킴이 원했던 게 이런 것인가 보다.

음악적인 면에서 브리더스의 변화는 절충적이라고 하겠다. 연주 스타일과 톤에 있어 전향적이고 일관된 변화라기보다는 예전 방식과 새로운 실험을 잡종교배하면서 다소 혼란스러운 사운드 스케이프를 펼쳐 보인다. “Off You”와 같은 음울한 발라드라든가 “The She”의 공간감 있게 휘감아 도는 기타 디스토션의 실험, “Put on a Side”와 같이 불길하게 진행되는 베이스 위주의 연주 등은 확실한 변화의 측면이다. 파삭파삭한 느낌이 들 정도로 드라이한 노이즈도 더욱 심화되었다. 반면 “Son of Three”나 “Huffer”는 이들의 전유물인 소박한 거라지 펑크록의 재현으로서, 특히 리차드와 딜 자매 3명이 기타를 연주하는데도 과도한 드라이브나 중첩된 사운드 층위는 발견되지 않는다(달리 말해 켈리의 존재감이 미약해 보이기도 한다). 또 하울링 소리처럼 들리는 굉음과 거친 질감을 정제하지 않고 디지털 리마스터링이나 오버더빙 등을 배제하는 방식도 여전하다. 스티브 앨비니 표 명품 로파이 아이템인 셈이다.

수록곡들을 질리도록 듣고 난 후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런 사운드를 들려주는 밴드는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아직도 이런 (촌스런) 음악을 듣나’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을 것이다. 단순하고 거친 질감을 날 것 그대로 고집하는 기타 록의 미래는 그만큼 어둡다. 브리더스는 인터뷰를 통해 지속적인 활동을 약속했지만 또 다시 몇 년간을 침묵할지 알 수 없다. 나의 예상이 틀리길 바라지만, 어쩌면 [Title TK]는 영원히 제목 미정으로 남을 마지막 울림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견고한 것들이 대기 속에 녹아버리듯이 브리더스가 고통스럽게 토해놓는 노이즈 덩어리들도 언젠가는 낄낄거리는 조소 속으로 쓸쓸히 사라져 갈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홍빛 가을에 찾아온 메마른 회백색 노이즈는 이상하게도 가슴 한 구석에 처연한 슬픔을 남긴다. 20021013 | 장육 evol62@hanmail.net

7/10

수록곡
1. Little Fury
2. London Song
3. Off You
4. The She
5. Too Alive
6. Son of Three
7. Put on a Side
8. Full on Idle
9. Sinister Foxx
10. Forced to Drive
11. T and T
12. Huffer

관련 영상

“Off You” Live

관련 사이트
Breeders 공식 사이트
http://www.noaloha.com/breeders
Elektra 레이블의 Breeders 페이지
http://www.elektra.com/elektra/thebreeders/index.jhtml
4AD 레이블의 Breeders 페이지
http://www.4ad.com/artists/breeders
Evo Breeders 사이트
http://www.evo.org/html/group/breeders.html
The Amps 공식 사이트
http://www.noaloha.com/amps
[Rolling Stone]의 “Huffer” video clip
“Huffer” video cl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