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 – 후(逅) – 지현&company/T-Entertainment, 2002 여성/몸/성, 혹은 그녀의 정치 ‘생물학적’ 남성임에도, 나는 여성의 목소리가 여성 청자들과 만나며 일으키는 일종의 화학변화를 보는 것이 즐겁다. 그것은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는 것, 어떤 계급/정체성의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의 교감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은 정치적 올바름과 관음증적 태도 사이에 위태하게 걸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시선은 그 사이 어디에 있을까라는 고민은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의 데뷔 앨범을 듣는 동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음반 얘기를 시작하자면, 이전에도 노래운동 진영의 곽주림이나 여성문화운동 진영의 안혜경, 인디 씬에서의 밴드 마고가 ‘페미니즘’을 헤드 카피로 내걸고 활동했거나 현재도 활동하고 있지만, 지현의 경우는 자기신념의 표상으로서, 배급사는 홍보전략으로서 ‘페미니스트’라는 기표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지현과 안혜경은 밴드 마고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런 맥락에서 지현의 데뷔앨범 [후(逅)]는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을 ‘대중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음반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수록된 모든 노래들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특수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점이나 그 곡들이 현악과 피아노, 샘플링의 조합에 기대어 재즈, 블루스, 하드 록의 외투를 입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곡에서 신비주의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지현의 보컬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한영애의 주술적인 음색과 닮았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음반에 실린 “아저씨 싫어”, “태엽인형”이나 “미인”과 같은 곡들은 2000년 즈음부터 대학가 여성문화제 등을 통해 제법 알려진 곡들이다. 그리고 지현의 노래들은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여성’적’ 경험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불편하게도 통쾌하게도 들린다. 이를테면, 성폭력에 대한 분노를 담은 “Cut It Out”이나 지하철에서의 남성들의 추태에 대한 일침인 “아저씨 싫어”, 여성의 주체적 삶에 대한 소망을 역설적으로 노래한 “태엽인형”, 가족(주의)에 대한 근원적 불안과 고민을 노래한 “배꼽”, 단순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바치는 재지(jazzy)한 송가인 “검지공주”, 한국 사회에서 여러 가지 금기들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그루브한 곡 “미인”이 그렇다. 특히 일상적으로 너무 쉽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남성들을 다룬 블루지한 곡 “좀 많이”는 훵키(funky)한 전기 기타 연주(롤러코스터 이상순)에 재치 있는 언어유희(“난 네가 싫어, 좀 많이”)가 돋보이는 곡이고, 정신분석학적/생물학적 이론들을 토대로 성의 영역에서 소외된 여성을 오르가즘의 주체로 정체화하는 “Masturbation”은 이 음반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이다. 성 정치가 성별(sex)이 아닌 성 역할(gender)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지현의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를 보다 직접적이고 대중적으로 부각시킨 첫 앨범일 것이다. 물론 바다 건너의, 혹은 한국의 최신곡을 즐겨듣는 청자라면 이 음반을 듣고는 ‘촌스럽다’고 일갈할 것도 분명하다. 그만큼 사용된 악기나 편곡이 세련되지 않은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떤 점에서 그녀의 음반을 대중음악 시장으로 진입시킨 ‘운동(권)가요’로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노래운동 진영의 전통(?)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아날로그 신서사이저의 ‘깨는’ 음색과 열악한(가난한) 녹음환경 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주로 집회나 행사장에서 부르고 불려지는 그녀의 직설적이고 선언적인 가사들과 그에 걸맞게 따라 부르고 연주하기 쉬운 멜로디라인을 통해 이런 생각은 조금 더 구체화된다. 어차피 이 음반을 구입할 사람의 수도 정해져 있고, 음반을 팔아서 돈을 벌 생각을 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이렇게 직설적인 음반을 기존 시장에 내놓는 시도도 필요한 것이다. 이쯤에서 지현의 존재를 21세기에 어울리는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대중적인 실험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자의식 있는 여성 대중음악가의 탄생으로 볼 것인지는 앞으로 이 음반을 듣고 말할 사람들의 몫이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정치란 일상적인 영역에서 매 순간 가장 은밀하고도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현의 음반은 바로 그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들)에서 비로소 의미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20917 | 차우진 djcat@orgio.net 8/10 수록곡 1. 겨울 숲, Ciel Gris(intro) 2. Masturbation(i) 3. Cut it out 4. 아저씨 싫어 5. 태엽인형 6. 배꼽 7. 좀 많이 8. 검지공주 9. 미인 10. Masturbation(ii) 11. 겨울 숲, Ciel Gris 관련 글 에세이 [그립다, 그녀들의 목소리] – vol.4/no.19 [20021001] 에세이 [호미 언니의 가요만담: 프론트우먼들의 족보] – vol.4/no.19 [20021001] 스웨터 [Staccato Green] 리뷰 – vol.4/no.18 [20020916] 스웨터(Sweater)와의 인터뷰: 일상잡기(日常雜記)의 우울…그리고 화사한 나들이 체리필터 [Made In Korea?] 리뷰 – vol.4/no.19 [20021001] 관련 사이트 지현 공식 사이트 http://ziihiion.com 여성주의 커뮤니티 [언니네]에 실린 지현 인터뷰 http://www.unninet.co.kr/spc/s_view.html?sort0=2&sort1=32&sort2=1 여성주의 커뮤니티 [언니네]에 실린 여성 라틴 밴드 아마손(안혜경) 인터뷰 http://www.unninet.co.kr/spc/s_view.html?sort0=2&sort1=25&sort2=1 안혜경 공식 사이트 http://femimusic.jinbo.net/html/m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