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취향을 솔직히 밝히자면, 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나의 십대를 지배했던 데비 깁슨(Debbie Gibson)과 티파니(Tiffany)를 비롯해서 가비지(Garbage)와 크렌베리스(The Cranberries), 가깝게는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와 멀게는 마돈나(Madonna)에 이르기까지 내 귀를 자극하며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여성 뮤지션들은 지금까지 숱하게 많았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때로는 천상의 목소리처럼, 때로는 엑조틱하게, 그러나 종종 에로틱하게 어린(!) 사내아이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취향은 취향이고, 여성 보컬 밴드(이른바 woman fronted band)를 비롯하여 여성의 목소리가 대중음악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까닭은 그녀들의 목소리가 대중문화의 필드에서 또 다른 그녀들과 공명하며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남성들이 잡아채기 어려운 지점에 있는 감수성이다. 최근 한국대중음악계에서 주목할만한 여성 보컬 밴드를 꼽자면, 단연 스웨터(Sweater)와 체리필터(Cherry Filter)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밴드는 다른 여성 보컬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프론트 우먼에게 제법 많은 비중을 싣고 있다. 사실 여성이 보컬인 밴드는 다른 밴드들보다 더 주목받기 쉬운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의 목소리에 보편적인 매력(친근함이라던가, 부드러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록음악이라는 무대에서 여성들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밴드라는 공동체 안에서 남성이 보컬인 경우와 여성이 보컬인 경우는 그 역할이나 이미지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여성 보컬 밴드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범위 안에서 기존의 성 역할을 재현하는 동시에 재생산하는데, 이것을 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한 전략의 한 축으로 볼 수도 있고, 그들의 음악을 누가 소비하느냐에 따라 밴드/혹은 리드 보컬의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윤도현이 백인 록 키드의 이미지, 즉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점과 더더(TheThe)시절의 박혜경이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의 이미지를 재현했던 것, 더불어 김윤아가 자신의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으로 여성/남성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른다). 스웨터의 보컬인 이아립과 체리필터의 보컬인 조유진은 이러한 전통(?)을 때로는 답습하거나 때로는 비껴나간다. 이쯤에서 굳이 분류하자면 스웨터는 말랑한 모던 록 밴드이고, 체리필터는 단단한 하드록 밴드이다. 조유진의 파워풀한 보컬은 서문탁의 그것과는 다른 지점에서 유효하게 작용한다. 서문탁이 한국대중음악계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 록 보컬리스트라고 인식되는 상황에서 조유진의 존재는 분명 반가운 일이다. 물론 조유진의 보컬은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riordan)이나 앨라니스 모리셋(Alanis Morissette)과 매우 비슷하지만, 이미 그들 특유의 ‘꺽기’ 창법은 1995년 이후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이른바 제 3세계 여성 보컬의 매뉴얼이 되다시피 했으니 이 점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체리필터가 기대고있는 멜로디마저 그들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지만. 스웨터와 체리필터는 사실 여성이 보컬리스트로 활동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를테면 두 밴드가 공유하고 있는 감수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옷으로 따지자면 체리필터는 빈티지 청바지에, 스웨터는 꽃무늬 가을 스웨터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란 얘기다. 이아립과 조유진의 목소리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이아립은 낮게 가라앉아 읊조리는 듯한 보컬로 편안함을 유지하는 반면에, 조유진은 약간 탁한 보컬로 내지르고, 긁어대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한철이 프로듀서한 스웨터의 음반은 이한철의 입김이 조금 과하다싶을 만큼 드러나기도 하는데, “별똥별”을 듣다보면 이한철의 노래를 이아립이 부른 느낌마저 준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바람”에서 보여주었던 스웨터의 신선한 감수성이 다른 곡들에서 발전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운 것이다. “분실을 위한 향연”에서의 훵키한 보컬과 “멍든 새”와 “인어는 없어”, “꿈에서는”등의 곡을 관통하는 비음 섞인 보컬, 앨범 요소요소에 전자음을 배치한 편곡도 무난하고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체리필터의 경우엔 적절한 샘플링과 심플하게 진행되는 곡이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을 주는데, 특히 “낭만 고양이”에서 표현되는 ‘로맨틱한 도시적 감수성’은 최근 발표된 가요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다. 8비트 리듬에 훅(hook)이 인상적인 이 곡을 필두로 슬라이드 기타와 드럼 시퀀싱이 적절히 조화된 “내게로 와”,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라인의 “내 안의 폐허에 닿아”등에 주목할 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앨범 중반을 지나 “하와이안 블루스”의 하드코어 사운드에 뜨악할지도 모르고, 수록곡 대부분의 멜로디 라인이 앨라니스 모리셋과 지나치게 닮았다는 점에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혹은 분노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여성 청자들과 만나는 지점에서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정한 계급/정체성의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의 교감이라는 것은 경험하지 않으면 쉽게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조유진이나 이아립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다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가수가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체험’에 대한, 혹은 그 경험에 의한 것이다. 밴드 마고, 혹은 곽주림과 안혜경 등이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아래 활동했거나 하고 있지만, 이 말을 대중음악의 장(場)에서 공개적으로(혹은 공식 배급을 통해) 사용한 사람은 아무래도 지현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현의 데뷔앨범 [후(逅)]는 얘기할 지점이 많은 앨범이다. 여성적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모든 노래들이 그렇고, 그 안에서 현악과 피아노, 샘플링과 시퀀싱이 어울리며 가벼운 듯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를 내는 편곡이 그렇다. 게다가 나른하지만 힘있게 진행되어 낮은 음에서도 곡의 분위기에 무게를 더하는 그녀의 보컬에서 어쩌면 초기 한영애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프로이드와 다윈이 정리한 정신분석학적, 생물학적 이론들이 이후 남성 학자들/권력자들에 의해 여성이 남성보다 얼마나 열등한가에 대한 상식으로 악용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오르가즘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노래 “Masturbation”은 한국에서 여성주의 ‘대중’음악의 시발점으로 기록될 만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밖에 수도권 전철에서의 불쾌한 경험을 어쿠스틱 기타의 리드아래 풀어놓는 “아저씨 싫어”나, 너무나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에 바치는 블루지한 송가 “좀 많이”등의 곡들은 재치 있는 말장난(‘난 네가 싫어, 좀 많이’)과 더불어 지현의 음악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곡들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반드시 여성주의적일 필요가 없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것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투사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한국의 여성 음악가들이 이 땅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 것 같다는 ‘의심’은 한번쯤 가져도 좋지 않을까? 이를테면, 바다 건너의 여성 ‘아티스트’들에 대한 것과 같은 입장을 이 땅의 여성 ‘가수’들에 대해서는 찾기 힘들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여성들의 음악은 오히려 음악적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여성 가수들의 목소리와 그 노래들을 소비하는 여성 청자들의 관계에 대해서 함께 짚어보아야 대중문화 안에서 그녀들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그녀들의 목소리에 대응하는 또 다른 그녀들의 행위를 함께 거론할 때에 여성 음악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는 음악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 창작자로서든 비평가로서든 팬으로서든 그녀들의 목소리가 그리운 까닭은 이런 것이다. 20020917 | 차우진 djcat@orgio.net * 월간 [베스트셀러] 2002년 10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 관련 글 에세이 [호미 언니의 가요만담: 프론트우먼들의 족보] – vol.4/no.19 [20021001] 스웨터 [Staccato Green] 리뷰 – vol.4/no.18 [20020916] 스웨터(Sweater)와의 인터뷰: 일상잡기(日常雜記)의 우울…그리고 화사한 나들이 지현 [후(逅)] 리뷰 – vol.4/no.19 [20021001] 체리필터 [Made In Korea?] 리뷰 – vol.4/no.19 [20021001] 관련 사이트 체리필터 공식 사이트 http://www.cherryfilter.com 스웨터 공식 사이트 http://www.sweaterhome.net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 공식 사이트 http://ziihi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