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주: 이 시리즈는 1960-70년대 한국의 록 음악을 위시한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연구 노트입니다. 조사의 미비함으로 인해 사실에 대한 설명이나 사실의 경중을 가리는 작업은 아직 미진한 상태이므로, ‘연습용’ 글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69: 靈魂暴發

위 소제목은 1969년에 유행한 홍콩영화 제목이 아니다. 무엇일까. 한자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위 소제목을 영역하면 ‘Soul Explosion In South Korea’쯤 될 것이다. ‘한국에서 소울 음악의 폭발’을 말한다. 소울이라면 미국 흑인 음악인데 한국같은 황인종이 왠 소울인가. 하지만 한국도 박인수, 임희숙, 윤시내, 이은하, 인순이로 이어지는 ‘소울 가수’의 계보를 지닌 나라다. 그러니 소울이 폭발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는 1969년으로 가는 타임 머신을 타 보자. 1969년이라고 ‘우드스탁(Woodstock)’ 이런 걸 떠올리지는 말자. 여기는 샌프란시스코(‘헤이트 애시베리’ 어쩌구…)나 뉴욕(‘야즈거의 농장’ 저쩌구…)이 아니다. 무대는 서울의 구 중심지인 명동, 세종로, 종로… 등등이다. 즉, 지난 호 글의 주요 무대였던 ‘미 8군 무대가 있던 기지촌’도 아니다.

20020920122825-0418series_krock1소울로 가는 피크닉(!)으로 인도하는 펄 시스터즈

1969년 12월2일 서울 시민회관에서는 MBC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자, 패티 김, 최희준, 김상희, 펄 시스터즈, 김세레나, 배호, 조영남, 나훈아, 이상렬이 10대 가수에 선정된 가운데, 누가 1960년대의 마지막 가수왕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2연패를 노리는 이미자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전망되었고, 패티 김, 최희준이 가능성 높은 후보로 점쳐졌으며, 팝 계열인 김상희, 펄 시스터즈도 후보군에 오르내렸다. 마침내 집계가 끝나고 사회자가 1969년 가수왕을 호명했을 때, 객석은 놀라움과 환호성으로 어지러웠다. 이미자, 패티 김, 최희준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을 제치고, 뜻밖에도 신인 듀오 펄 시스터즈가 가수왕으로 선정된 것이다.

한편 그로부터 7개월 전, 같은 장소에서는 ‘5·16 기념 제1회 보컬그룹 경연대회’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플레이보이 프로덕션 주최, 선데이 서울 후원으로 마련된 이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는 5월 17일부터 4일간 열렸는데, 17팀의 출연진과 총 4만 여명의 청중들이 어우러진 사상 최대의 록 페스티벌이 되었다. 키 보이스, 히 화이브, 가이스 앤 돌스 등 미 8군 무대 출신 그룹 사운드들은 무대에 올라 뜨거운 연주 대결을 벌였고, 암표 소동을 벌일 만큼 몰려들었던 청중들은 열띤 호응과 갈채를 보냈다.

본래 연말 가수 청백전이란 ‘가족이 모두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아직 만 20살도 안 된 새파란 여자 두 명이 가수’왕’을 차지한 것은 프로그램의 ‘원만한 성격’과는 괴리되는 것이었다. 물론 한 방송사의 ‘가수왕’으로 펄 시스터즈가 뽑힌 일을 과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청중들의 현장투표 집계 방식이 아니었다면, 가수왕은 이미자나 패티 김에 돌아갔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렇지만 펄 시스터즈의 가수왕 수상과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의 성공적 개최가 가요계, 나아가 대중문화의 변화를 반영한 극적인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두 사건이 대변하는 변화의 중심에는 두 가지 새로운 음악 조류가 있었다. 하나는 ‘소울’이었고 다른 하나는 ‘싸이키’였다. 혹자는 ‘소울 & 싸이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소울과 싸이키는 새로운 대중음악의 트렌드로 떠올랐지만, 두 사건이 보여주듯 그 양태는 상이했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소울은 펄 시스터즈, 김추자 등 여성가수들을 중심으로 TV, 라디오 등의 매스 미디어를 통해 ‘폭발’했다. 반면 싸이키는 키 보이스, 덩키스, 히 화이브 등 그룹 사운드를 중심으로 생음악 살롱, 고고 클럽 등에서 라이브의 ‘장’을 형성하며 각광받았다. 그 장을 ‘씬(scene)’으로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씬을 (당시 이런 용어가 있지도 않았지만) ‘언더그라운드’로 부를 수 있을까.주)

주) 시기적으로는 소울이 싸이키보다 조금 먼저였고 그룹 사운드들도 미 8군 무대와 기지촌 그리고 ‘일반 무대’에서 소울을 연주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가이스 & 돌스의) 차도균은 플래터스의 “Only You”를, (키 보이스의) 윤항기는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와 “Take This Chain off My Heart”를, (바보스의) 김선은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Unchained Melody”를 ’18번’으로 연주했다. 여가수 중에도 장미화는 다이애너 로스를(Diana Ross), 임희숙은 샘 쿡(Sam Cook), 이승연은 낸시 윌슨(Nanct Wilson)을 각각 흠모했고 무대에서 즐겨 불렀다고 한다. 단, 이 글에서 말하는 ‘소울’은 커버곡이나 번안곡이 아닌 창작곡을 말하므로 이런 ‘언더그라운드’의 흐름과는 구분된다. 또한 ‘소울=주류, 싸이키=언더’라고 구분한 것은 두 장르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에 중점을 둔 편의적인 것이다.

‘소울 & 싸이키’로 명명된 음악은 트로트 일색이던 기성의 가요계를 균열시켰다. 그리고 청년들은 이 새로운 트렌드에 열광하며 세대간 음악 취향의 분열이 대세임을 보여주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앰프로 증폭된 전기음이 낯설었던 ‘그때 이곳’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이런 새로운 조류를 더듬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싸이키의 장은 다음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소울의 장을 먼저 들여다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1960년대 말 주류 가요계에서 전개된 변화에 대해 살펴봐야 할 듯하다.

트로트의 황혼, 소울의 폭발

1960년대 말 한국에서는 여전히 트로트가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거리의 여자들 중 절반 이상이 한복 차림이고, 청년영화들이 몇 개 있었어도 [미워도 다시 한번]이 여전히 인기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특히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시키는’ 슈퍼스타 이미자의 인기는 잇따른 금지곡 판정과 왜색 논란이 있었지만 견고해 보였다. 게다가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를 히트시킨 남진과 1969년 “님 그리워”를 히트시킨 나훈아라는 신인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라이벌 관계까지 형성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고, 따라서 196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도 트로트의 전망은 밝았다.

그렇지만 변화의 조짐도 있었는데, 우선 트로트의 독주 속에서도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 비(非)트로트 계열 가수들이 인기를 늘려 나간 것이었다. 1966년 ‘MBC 10대 인기가수’에 오른 수상자(이미자, 이금희, 문주란, 최양숙, 현미, 최희준(최고 인기상), 위키 리, 유주용, 남일해, 정원)의 면면은 좋은 예다.주) 다른 하나는 촉망받는 신인 가수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었다. 1967년에는 정훈희(“안개”), 차중락(“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1968년에는 조영남(“딜라일라”), 펄 씨스터즈(“님아”), 트윈 폴리오(“하얀 손수건”) 등이 얼굴을 내밀며 가요계의 새 바람을 몰고 왔다. 1969년 데뷔하여 톱 스타가 된 김추자(“늦기 전에”)와 나훈아(“님 그리워”)는 가요계의 신구(新舊) 세력을 각각 대표하는 유망주로 당시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 이금희, 현미, 최희준, 위키 리, 유주용, 정원 등은 팝 계열의 가수이다. 따라서 1966년 ‘MBC 10대 인기가수’ 명단은 1960년대 중반에 이미 팝 계열 가요가 주류 가요계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구성비를 비약하여 당시 (인기)가수의 5할 이상이 팝 계열이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팝 계열 가수가 트로트를 부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트로트와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아직 가요계의 지존이었다.

이미자는 1969년 “기러기 아빠”로 다시 한번 “동백 아가씨”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하며 굳건히 1위를 지켰지만, ‘그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는 가요 관계자들의 진단이 늘어갔다. 1960년대 말 2~3년 사이에 같은 트로트 계열에서 배호, 남진, 나훈아의 신진 트로이카가(물론 배호는 도회적인 트로트란 점에서 다소 상이하다), 비트로트 계열에서 펄 씨스터즈, 김추자, 조영남, 트윈 폴리오 등 이른바 ‘차세대 거물(next big thing)’이 등장하여 이미자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 잡지의 가요계 동향 기사들을 보면 트로트에 대해 표절, 왜색, 비탄조 등을 거론하며 비판적인 반면, 팝 계열의 신인가수 등장에 대해서는 가요계의 세대 교체와 변화를 기대하는 내용을 자주 볼 수 있다(그런 기사들이 여론을 선도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든 여론을 반영하여 쓰여졌든, 대세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1969년은 새로운 음악 경향이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해였다. 펄 시스터즈는 1968년 말에 내놓은 데뷔 앨범 [펄 씨스터 특선집](킹/유니버어살)에서 “님아”의 빅 히트를 시작으로 “커피 한잔”, “떠나야 할 그 사람”을 연달아 히트시켰고 연말에는 MBC 가수왕을 거머쥐며 1969년이 ‘펄 시스터즈의 해’임을 방증했다. 펄 시스터즈의 등장은 가히 돌풍이었다. DJ 김기덕은 “내가 관찰하기로, 우리 가요사에 사람들이 일제히 노래의 주요 부분을 길거리에서 소리 높여 따라 부르며 유행시킨 곡은 세 곡밖에 없다. 산울림의 “아니 벌써”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그랬으며, 그보다 앞선 곡이 펄 시스터즈의 “님아”였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방송 DJ의 주관적 견해겠지만, 당시 펄 시스터즈가 던진 충격파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약관의 자매 듀엣을 단숨에 톱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신선한 창법을 들 수 있다. 이전까지 여성 가수는 ‘다소곳한 모습에 아름답고 애절한 목소리’가 지배적이었고, 허스키 보이스와 율동은 ‘소수의 예외’였다. 그런데 펄 시스터즈는 전통적인 여성적 창법에서 탈피하여, 세련되진 않지만 당돌하고 힘찬 목소리, 때론 살살 녹이는 섹시한 가창을 선보였다. 거기에 실린 노래 가사 또한 은유가 아니라 직설법에 가까웠다. 하지만 펄 시스터즈의 엄청난 성공은 무엇보다 미모와 율동이 큰 역할을 했다. 빼어난 미모의 이 두 자매가 TV 쇼 프로그램에 나와 온몸을 흔들면서 노래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문화적 충격에 가까웠다. 가수가 갖춰야 할 요건에 가창력이 전부이던 시절, 이들은 거기에 처음으로 ‘비디오형’ 미모, 거기에 춤을 추가한 존재였다.

가창력, 미모, 춤을 겸비한 펄 시스터즈가 불러온 파장은 컸다. 가요계에 소울 열풍을 몰고 왔다. 여성 가수들은 보다 자유롭고 당돌한 창법과 율동을 선보였고, 작곡가들도 소울 풍의 노래들을 발표하며 유행에 동승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 가요 잡지는 작곡가들이 당시 유행에 따라 곡을 만들어 히트시킨 경우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리듬&블루스를 첫 시도한 정민섭씨의 경우 “당신의 뜻이라면”(양미란 노래)이 있고, “님아”, “커피 한잔”(펄 시스터즈)의 신중현이 소울을, 싸이키 “꽃잎 지는 밤”(남진 노래)의 홍현걸씨 등이 그렇다. 이 밖에도 전형적인 트로트 풍을 사용하던 백영호씨가 소울 리듬을 시도한 것으로서 펄 시스터즈의 “수탉 같은 여자”주)가 상당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1969년 가요계 총결산>, 월간 [가요생활], 1970년 1월호) 1969년 가요계에 분 새 바람은 트로트 작곡가와 가수조차 그 바람에 편승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주) 펄 시스터즈의 “수탉 같은 여자”는 이들이 “님아”로 ‘뜬’ 이후 지구레코드로 적을 옮겨서 낸 음반에 담긴 곡이다. 이 음반은 남진(!)과의 스플릿 음반이었다.

펄 시스터즈 외에도 여가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펄 시스터즈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정화는 [싫어/봄비](1969)를 내놓았고, 뒤이어 김추자는 [늦기 전에](1969)를 발표했다. 이정화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김추자는 ‘제2의 펄 시스터즈’로 불릴 만큼 크게 성공했다. 팝 계열의 기성 가수 김상희도 ‘소울 & 싸이키’ 음반 [어떻게 해/나만이 걸었네](1969)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이 음반들 모두가 당시 그룹 사운드 덩키스를 이끌며 작곡가 생활을 병행하던 신중현이 곡을 쓰고 연주하고 지휘한 ‘신중현 작편곡집’이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작곡가 정민섭을 파트너로 여러 장의 음반을 내놓은 양미란이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김희갑의 곡을 부른 임희숙같은 여가수들도 1970년을 전후해 떠오른 소울 풍의 노래를 하는 새 얼굴이었다.

신진 작곡가와 음반제작자의 대두 그리고 ‘킹 프로덕션’

매스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여가수들의 활약과 청년층의 환호로 ‘소울 가요’는 단숨에 주류 장르로 떠올랐다. 소울 가요가 도회적인 정서를 띄고 있었다는 점은 별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미자 류의 트로트가 농어촌과 고향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면, 소울 가요의 활기찬 리듬과 자신감에 찬 목소리는 ‘멋쟁이 언니 오빠들’이 활보하는 서울 명동거리를 연상하게 한다. 전자가 청각적 체험으로 그 감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면, 후자는 TV나 시내 중심가 공연장에서 시각적 체험을 병행했을 때 그 느낌이 제대로 전달된다.

20020920122825-0418series_krock2소울 열풍의 배후에는 신진 작곡가들이 있었다. 사진은 당시 한 잡지의 표지. ‘히트곡 제조기’ 신중현, 소울 돌풍의 주역 펄 시스터즈

그런데 소울 가요를 만든 주체는 누구였을까. 지난 회에, 1960년대는 트로트든, 팝 계열 음악이든 ‘직업적 작곡가가 배후 실력자이고 가수는 얼굴 마담인 시스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소울 가요는? 소울 가요 역시 외형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울 가요 작곡가들이 신진 작곡가였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미 8군 쇼단 출신인 신중현, 김희갑, 정민섭, 김인배, 홍현걸 등이 새로 등장하여 각광 받거나 이 시기 ‘전향’적인 곡들을 만든 작곡가였다. 이정화의 [싫어/봄비](신중현 작편곡집, 1969), 펄 시스터즈와 문주란의 [첫 사랑/하얀 사랑의 집](홍현걸·이봉조 작편곡집, 1969), 키 보이스와 임희숙의 [밤의 장미/왜 울어](김희갑 작편곡집, 1969), 펄 시스터즈와 트윈 폴리오의 [아이 러브 유](김인배 작편곡집, 1969), 양미란과 히 화이브의 [양미란과 히 화이브의 소울 사운드](정민섭 작편곡집, 1970) 등은 그런 결과물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신중현은 여가수들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최고의 히트 작곡가’이자 ‘소울 & 싸이키의 기수’로 인정받았다. 일상적이고 솔직한 가사를 담은 신중현의 곡들은 재래 가요적인 익숙함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소울과 싸이키델릭 풍의 새로움을 담아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청년들이 열광하던 것은 ‘소울 & 싸이키’의 새로움이었지만, 그것이 대중적인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한 전자의 측면과 관련이 있다.

여전히 작곡가 이름을 앞세운 ‘아무개 작편곡집’이란 명칭이 일반적이었고, 신인 가수의 노래를 한두 곡 끼워 넣는 관행도 계속되었지만, 그 이전 시기에 비하면 가수의 비중이 높아졌다. 가수의 얼굴과 이름이 음반 커버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되어 갔고, ‘작곡가 이름은 몰라도 가수 이름은 아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극장 쇼에서 활동하다 떠서 음반을 내는 게 아니라, 음반과 미디어를 통해 뜨고 난 후 극장 쇼로 흥행과 수입을 이어가는 경우도 생겨났다. 펄 시스터즈는 그 첫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대중 스타로서 가수의 위상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작곡가와 가수 외에는 다른 주체는 없었을까. 지난 시기 가요 음반들을 보면 킹 레코드라는 로고를 자주 만날 수 있다. 킹 레코드는 킹박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박성배가 만든 음반사인데, 킹박은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1966)을 히트시킨 것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수많은 히트 앨범들을 만든 제작자이다. 그는 단지 히트 음반이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음반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가요계의 새로운 물결을 낳은 많은 음반들을 제작했다. 펄 시스터즈, 김추자, 이정화, 김정미, 장현 등 신중현 사단 가수, 덩키스, 퀘션스, 더 맨 등 신중현의 그룹 사운드, 키 보이스, 키 브라더스, 영 사운드 등 숱한 그룹 사운드의 음반들을 만들었다. 조금 뒤의 이야기지만 양희은, 조용필, 이문세까지 킹박의 작품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의 업적의 규모에 대해 감탄하게 될 뿐이다.

‘킹박’은 트렌드를 잡아내는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으로 그는 레코딩 과정에서 자율성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뮤지션에게 계약금이나 수익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는 후문도 들린다. 후자의 경우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는 변명으로 무마될 수 없는 한국 음반제작자의 일반적인 ‘어두운 면’이었지만, 전자의 경우 음반제작자가 ‘음반도 히트시키고 능력도 인정받는’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킹박과 킹 레코드는 1970년대 중반을 풍미한 나현구와 오리엔트 프로덕션, 1980년대를 풍미한 김영과 동아기획(현 동아뮤직)의 선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기획으로 당대 음악의 새로운 조류(소울, 싸이키델릭, 포크)를 분만한 ‘킹 프로’의 공로는 평가받을 만하다.

다른 한편으로 킹박은 한국 음반제작의 오랜 관행인 대명제작(代名製作: 이른바 PD Maker) 시스템을 대표하는 제작자였다. 그는 청계천에 조그만 사무실을 차리고 유니버어살, 성음, 서라벌 등의 음반사의 상호를 이용하여 음반을 배급했다. 그런데 킹박이 자본의 영세성 외에 대명제작 시스템으로 음반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이를 포함해 당시 전반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은 다음 호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소울 사운드의 폭발과 그 여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리하면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소울 가요’, 그 빛과 그림자

20020920122825-0418series_krock3펄 시스터즈에 이어 김추자는 뛰어난 가창력과 육감적인 춤으로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1969년을 강타한 ‘소울 가요’란 어떤 음악이었을까. 미국의 소울과 동일한 스타일의 음악이었을까. 펄 시스터즈, 김추자, 김상희, 양미란 등 당시 ‘소울 가수’라고 불린 가수들을 보면 우선 정제되지 않은 듯한 열창 스타일의 창법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맑다기보다는 다소 거칠고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노래를 제외한 음악적인 면에서 보자면, 재래 가요에 비해 ‘팝’적이란 느낌을 물씬 풍기지만 미국 소울의 직수입품 같은 냄새가 그리 강하지는 않다.

이는 소울 가요의 작곡자, 가수, 연주인의 대부분이 미 8군 쇼단 출신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소울 가요를 만들고 연주하고 부른 주체는 미 8군 무대 출신 음악인들이었고, 그들은 컨트리, 로큰롤, 싸이키델릭 등과 함께 소울 음악 역시 카피하고 연주했다.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 윌슨 피켓, 벤 이 킹 등의 곡들은 1960년대 중후반 미 8군 쇼 무대에서 연주되던 주요 소울 레파토리였다. 이처럼 소울을 체화한 음악인들(작곡가, 가수, 그룹)이 1960년대 말 대거 일반 무대로 진출하고 라디오 등을 통해 소울이 일반인들에도 낯설지 않은 음악이 되면서 소울 가요가 유행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소울 음반들은 단지 장르의 차이를 넘어서 사운드의 변화도 담고 있었다. ‘비트가 강한 편이고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리듬(당시 ‘소울 리듬’이라고 매스컴에서 말하던)이 특징적인 일렉트릭 사운드’가 소울 가요의 사운드였다. 여가수의 열창과 그룹 사운드의 일렉트릭한 음향은 그 시절 소울 가요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 그런데 소울 가요가 새로웠지만 생경하게 다가오지 않고 익숙한 느낌을 가져왔다면 재래가요적 요소와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즉 소울 가요는 정통 소울을 지향하면서 우리말 가사를 얹은 게 아니라, 소울을 이전의 팝 계열 가요와 트로트 등 다양한 성분들과 섞은 것이었다. 현악기나 관악기 등 일렉트릭하지 않은 악기들의 편곡이 많이 들어간 것도 이런 절충성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예다. 이는 소울 가요 생산자들의 다양한 음악 편력과 제한적인 레코딩 여건과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 소울 가요를 정통적이지 않다고 느꼈다면 그 때문이다.

‘소울 사운드’는 1969년 폭발하여 1970년 상업적으로 정점을 맞이했다. 1970년 [소울풀 펄 시스터즈], [양미란과 히 화이브의 소울 사운드] 등 음반 표지에 소울을 내세운 음반들이 여러 종 나온 것은 당시 소울의 대중성과 상업성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신문 잡지에서도 가요계의 변화와 세대교체를 일굴 주역으로 소울을 평가하면서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1964년의 [주간한국]이 창간된 데 이어 1968년 연이어 창간된 [선데이 서울] 등의 ‘황색’ 주간지들도 소울을 대중문화 현상으로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소울의 인기는 ‘소울 춤’이라는 것이 정형화되어 청소년층에게 유행했다는 사실에서도 발견된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양현석이 ‘소울 춤의 대가’라고 소개된 일이 있다. 정작 본토에 소울 춤이라는 게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테크노=도리도리춤’이라는 최근의 관행의 선례라고 치부해 버릴까. 하지만 춤 문화의 역사라는 관점을 취해보면 이제 ‘트위스트의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자면 ‘소울’은 이제 흥행을 위한 음반/공연 선전 문구로, 트렌드에 편승하기 위해 작곡/레코딩해보는 일시 방편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는 데뷔 1년만에 5장이 넘는 음반을 발표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지만, 일단 스타의 자리에 오른 후 이들은 신중현을 떠나 전속사를 옮겨다니며 다른 스타 작곡가들에 의해 색깔을 잃어버리고 일관성 없는 행보를 걷게 되었다. 펄 시스터즈의 일본 진출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고, 김추자의 연이은 스캔들(혹시 1971년의 ‘소주병 난자사건’이라고 들어 봤는가. 엄마에게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도 터지면서 소울은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소울은 대중문화인가, 청년문화인가. 하나로 결론 내리기 모호한데, 그렇다면 청년 중심의 대중문화라고 ‘조건부’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혹시 제대로 된 꼴의 청년문화가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종종 소울과 한 묶음으로 얘기되던, 그러나 매스 미디어에 의한 폭발에는 이르지 못한 싸이키델릭은 어떨까. 이런 물음들을 가지고 ‘싸이키’로 요약되던 수면 아래의 그룹 사운드 붐의 흐름을 찾아가 보자. 2주 후에. 20020916 | 이용우 pink72@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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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자 [늦기 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리뷰 – vol.4/no.18 [20020916]
퀘션스 [여보세요_그대는 바보(신중현 작편곡집)] 리뷰 – vol.4/no.18 [20020916]
양미란/히 화이브 [양미란과 히 화이브의 Soul Sound(정민섭 작곡집)] 리뷰 – vol.4/no.18 [20020916]
히 화이브/쥰 시스터즈 [Hey Jude / Come Back(김인배 편곡집)] 리뷰 – vol.4/no.18 [20020916]
히 화이브/이승재 [그 언제일까/눈동자] 리뷰 – vol.4/no.18 [20020916]
키 보이스 [Key Boys’ Soul & Psychedelic Sound] 리뷰 – vol.4/no.16 [20020816]
키 보이스 [보칼 No.1 키 보이스 특선 2집] 리뷰 – vol.4/no.16 [20020816]

관련 사이트
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한국 록 음반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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