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Pop Consortium – Arrhythmia – Warp, 2002 힙합과 IDM의 결합을 통한 힙합의 미래 모색 지금 미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새로운 판 짜기가 한창이다.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산파임을 자처하던 ‘공룡’ 레이블 뤄커스(Rawkus)가 MCA에 병합되고 한편으로 베이 에리어의 쿼넘(Quannum) 패거리가 주류 시장의 유혹 앞에 스스로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사이, 진정한 비주류 혹은 로파이(lo-fi) 힙합을 주장하는 일군의 뮤지션들이 도처에서 급부상 중이다. 혹자는 그들의 음악을 대충 얼버무려 ‘아방가르드 힙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가령 인디 록의 로파이 미학과 프로그레시브 록 감성을 끌어들여 힙합 비트를 해체하고 사운드 혁신을 이뤄낸 뉴욕의 엘 피(El-P)와 데피니티브 죽스(Definitive Jux) 패거리는 지금 인디 힙합의 새로운 대명사로 거듭나고 있다. 베이 에리어의 안티콘(Anticon) 패거리나 미네소타의 애트머스피어(Atmosphere) 등 소위 ‘이모 랩(Emo Rap)’ 뮤지션들의 성장 또한 주목할 만하다. 중서부 교외에서 성장한 이 백인 청년들은 탁월한 엠씨잉(MCing)을 통해 기존 힙합의 집단주의적 최면을 파기하고 ‘내 안의 혁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하지만 당대 힙합의 진보 혹은 실험적 혁명의 최전선은 엘 피나 안티콘 패거리라기보다, 소위 ‘IDM 힙합’을 주도하는 안티 팝 컨소시엄(Anti-Pop Consortium)이다. 뉴욕 출신 안티 팝 컨소시엄은 명목상 세 명의 흑인 청년 하이 프리스트(High Priest), 볼 빈즈(Ball Beans), 엠 사이드(M. Sayyid)로 구성된 트리오지만, 프로듀서인 얼 블레이즈(Earl Blaze)가 실제 네 번째 멤버의 역할을 한다. 구성원들의 독특한 이력은 안티 팝 컨소시엄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서가 된다. 각기 아트 스쿨과 시 낭독 대회에서 처음 안면을 텄다는 사연도 그러하지만, 하이 프리스트가 뉴욕 맨해튼의 전설적인 인디 음반 가게 아더 뮤직(Other Music)에서 일했다는 경력은 특히 이채롭다. 자의든 타의든 온갖 희귀 인디 록 음반들을 들으며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했을 터이니, 남들 다 하는 힙합을 답습할 거라는 예측은 금물이다.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두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단서는 안티 팝 컨소시엄이 IDM 전문 레이블인 워프(Warp)와 손잡고 [Arrhythmia]를 발매했다는 점이다. 물론 첫 번째 정규 앨범 [Tragic Epilogue](2000)의 예사롭지 않은 사운드가 워프 레이블을 유혹한 결정적 미끼였다. 몽환적 분위기 속에 기계적 비트와 조각난 단어들의 래핑을 탈 규칙적으로 뒤섞은 이 음반은 [Arrhythmia]의 전범이 되었는데, 결국 워프 레이블은 ‘IDM 힙합’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주기를 바라며 과감히 이들 네 뉴욕 청년을 영입하였다. [Arrhythmia]의 첫 인상은 아마 ‘난해하다’ 혹은 ‘따분하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존의 힙합 사운드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말이다. 이는 소위 인디 힙합 골수 팬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힙합의 래핑과 비트는 ‘특유의 그루브’가 그 생명이라고 전제한다면, 이 음반은 분명 당혹스럽다. 일단 가사는 대부분 문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간혹 탈 맥락적으로 내뱉는 단어들은 때론 지나친 반복, 때론 파격적 생략을 통해 지극히 생경하게 다가온다. 힙합 공동체에 대한 집단적 동경은커녕 개인에 대한 집착도 부재한 이들의 추상적 내러티브는 오히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불분명한 현실과 어두운 미래를 자동 기술적으로 나열한 것에 가깝다. 하이 프리스트와 볼 빈즈가 이 난해한 가사들을 읊조리고 엠 사이드가 재빠르게 끊어 치는 딜리버리로 뒤를 받치면서 안티 팝 컨소시엄의 ‘라임 없는’ 라임은 환각의 세계를 넘나든다. 세 엠씨의 독특한 내러티브는 앨범 전체를 주도하는 기계적이고 불규칙적인 일렉트로닉 비트와 절대적 조화를 이룬다. 프로듀서 얼 블레이즈는 시종일관 삑삑거리고 뿅뿅거리고 콩당거리는 전자 음의 향연을 통해 기존 힙합의 리듬을 해체하고 파괴시킨다. 한편으로, 어처구니없을 수도 있지만, 비현실적인 메시지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간헐적인 효과음들은 안티 팝 컨소시엄의 장난 끼와 재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더욱이 일부 트랙은 난해함 속에서도 청자로 하여금 반복적으로 듣게 만드는 ‘훅’까지 교묘히 내장하고 있다.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듯한 불규칙하고 긴박한 비트가 반복되다가 중반부 이후 “mega”를 반복적으로 외쳐대는 오페라(?)로 비약하는 “Mega”는, 탈 규칙적인 전자 음과 코믹한 보컬을 절묘하게 결합하는 이들의 솜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깊은 베이스와 매끄러운 멜로디가 조화를 이루는 30초 짜리 연주곡 “EKG”에 이어지는 “Ghostlawns”는 또 다른 베스트 트랙이다. 잘게 분할한 훵크 비트 위로 다양한 음향 효과와 재빠른 플로우의 랩, 여성 코러스가 소용돌이친다. “Tron Man Speaks”에서는 이들의 독특한 유머 감각을 맛볼 수 있다. 헤스타일 앤 마이크 원(Hastyle & Mike One)의 “Software”를 샘플로 사용해 리버스시킨 이 트랙에서 세 멤버와 얼 블레이즈는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진행하는데, 사실은 뮤지션들의 ‘은밀한’ 샘플링을 냉소적으로 조롱하면서 동시에 정당화하고 있다. 지나친 전자 음이 여전히 낯선 힙하퍼들은 아마 “Bubblz”가 무난할 것이다. 충만한 그루브의 훵크 사운드에 콩가 연주를 곁들여 경쾌함을 더한 이 트랙은 난해한 라임만 아니라면 넵튠스(Neptunes)의 프로덕션에 견줄 만한 댄스 넘버다. 만약 IDM에 보다 익숙하다면, 세 엠씨의 재빠른 플로우와 찢겨나가는 건반연주의 조화 속에 인간을 미시적으로 해부하는 독특한 가사가 돋보이는 “Dead In Motion”이나, 제목이 암시하듯 마치 세탁기 속에서 랩을 하는 듯한 효과를 제공하는 “We Kill Soap Scum”이 흥미로울 듯 하다. 아마 안티 팝 컨소시엄의 음악은 힙합 팬들과 IDM 팬들을 모두 당황하게 할 지도 모른다. 기존의 힙합 비트를 탈 규칙적이면서 반복적인 기계음 속에 뭉개버리지만, 여전히 랩에도 비중을 두는 이들의 ‘IDM 힙합’은 양자간의 절충이라기보다, 양자로부터 일탈을 시도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힙합의 여러 가능성 중에 안티 팝 컨소시엄의 실험이 가장 단명하리라는 소문이 벌써부터 무성하다. 기왕 일렉트로니카와 힙합을 접목하려면, 킹 브릿(King Britt)이나 재자노바(Jazzanova)가 선도하는 소위 ‘누 재즈(Nu-Jazz)’가 훨씬 수월한 해결책이라는 섣부른 결론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트랙들 간의 다소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안티 팝 컨소시엄은 힙합과 IDM의 조우가 근사한 ‘안티 안티 팝(anti-anti-pop)’을 생산할 수도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일견 모순적이지만, 침실의 은밀함과 거리의 활기를 동시에 발현하는 이들의 비상한 능력은 [Arrhythmia]의 몇몇 트랙에서 검증되고 있다. 게다가 누 재즈 뮤지션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무겁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은 주류 힙합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언뜻 내비친다. 안티 팝 컨소시엄이 아방가르드 힙합의 선봉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진화하리라는 낙관적 전망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결국, 힙합의 파격적인 탈 장르화를 어차피 거역할 수 없다면, 근거 없는 소문에 휩쓸리기 보다 차라리 이들의 음악적 모험에 지지를 보내는 게 당장은 최선이 아닐까 싶다. 20020910 | 양재영 cocto@hotmail.com 8/10 수록곡 1. Contraption 2. Bubblz 3. Ping Pong 4. Dead In Motion 5. Mega 6. Silver Heat 7. EKG 8. Ghostlawns 9. 2 10. We Kill Soap Scum 11. Z St. 12. Traumm 13. Tron Man Speaks 14. Focused 15. Conspiracy Of Myth/Human Shield/Place The Face 관련 글 Welcome Back, DJ Shadow: 7개의 새로운 키워드 – vol.4/no.13 [20020701] 관련 사이트 Anti-Pop Consortium이 소속한 Warp 레이블의 공식 페이지 http://www.warprecords.com Anti-Pop Consortium의 미니 홈페이지 http://www.warprecords.com/antip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