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e & Sebastian – Tigermilk – Jeepster, 1996 자폐아 지상만가(地上輓歌)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은 ‘쿨’한 음악을 하는 밴드가 아니다. 냉소와 환멸로 점철된 재치있는 가사와 고급스럽고 서정적인 포크 송 사이의 부조화가 ‘섬뜩’하거나 ‘세상에 대한 가벼운 테러’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분명 그렇다. 혹은 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쿨한 음악을 하는 밴드가 아니다. 최근 발매작 [Storytelling] (2002)은 [Fold Your Hands Child, You Walk Like A Peasant] (2000)에서 드러났던 이들의 답보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AMG의 평자가 이들을 평하면서 사용한 “1980년대 인디(정신)와 1990년대 식의 태도, 1960년대의 포크 팝이 한데 올라탄” 음악이라는 표현은, 이젠 칭찬이라기보다는 상업적 상투구가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이들의 음악이 ‘시간의 시련’에 약한 유형이라는 소리도 될 듯 한데,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벨 앤 세바스찬의 데뷔 음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과론에 기댄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과 ‘회고적’인 헌사를 바치는 것 중 하나를 택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 다 달가운 일은 아니다. 전자는 객관을 가장한 비난(‘내 이럴 줄 알았다니깐’)으로 빠지기 쉽고 후자는 지루한 ‘추억담’을 새삼스레 되풀이 할 공산이 크다. 그러니 솔직하게 그냥 말하자. 그 결과로 나온 글이 둘 다를 벗어나거나 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에게 솔직할 수는 있지 않을까. ‘재평가하기엔 약간 이르고 기대를 품기엔 매너리즘이 깊어 보인다’는 나름의 판단이 있다는 말도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많은 데뷔작들이 그렇듯 벨 앤 세바스찬의 데뷔 음반도 거기에 얽혀 있는 ‘전설’ – LP로 1,000장만 발매했던 것이 소리소문 없이 입소문이 퍼져 CD로 재발매되었다는 -에 신경쓰지만 않는다면, 전형적인 ‘전도 유망한 신인 밴드’의 음반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을 하면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자신들 만의 음악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자세와 좋게 보아 ‘풋풋함’이라 할 수도 있는 미성숙함이 동시에 감지되는, 또한 신인 특유의 ‘대담한 파격’ 혹은 ‘다양한 표현’도 엿보이는 양질의 음반이다. ‘나름의 확고한 자세’는 냉소적이고 혼란스런 가사와 나긋나긋한 음률이 절묘하게 결합된 챔버 팝의 전형인 “The State I Am In”이나 파헬벨(Johann Pachelbel)의 캐논을 대위법적 선율로 재치있게 갖다 쓴 “We Rule the School” 같은 곡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파격’은 촌스러운 키보드 소리와 뉴웨이브 스타일의 쿵짝거리는 리듬 위에 디스토션(!)을 건 보컬로 노래하는 “Electronic Renaissance”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플라멩꼬 리듬을 슬며시 깔면서 마리아치 풍 트럼펫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Expectations”같은 곡은 ‘앵글로의 라틴 음악’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설프다는 인상을 받지만, 작심하고 듣지 않는 이상에야 딱히 비난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런 말들과 ‘자폐아 지상만가’라는 제목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정성스럽게 번역된 속지의 가사들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이다. 벨 앤 세바스찬의 팬들에게 또한 중요한 것이 가사일 것이다. 일일이 짚어낼 것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그에 관련된 전체적인 인상을 얘기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들 노래의 화자에게 세상은 지겹고 따분한 것이지만, 화자 또한 자기가 별로 마음에 안 든다(“Expectation”). 남는 것은 그저 살아가(거나 살게 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냉소가 이들의 소통 수단이 되나 거기에는 발언하고자 하는 욕망만 있을 뿐, 듣고자 하는 의사는 없다. 그래서 소통을 거부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자기중심적 자세가 나온다.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 하지만 넌 안 듣고 있구나'(“I Don’t Love Anyone”)라고 말하는 자세 말이다. 그렇게 어긋난 자신을 또렷이 바라볼 의식이 있다는 점에서는 사실 진짜 ‘자폐’라 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승화’라 보기엔 그들이 애초에 들고 나온 가사와 음악 사이의 불일치가 종종 위악적으로 보이고, ‘은둔’이라 하려니 닉 드레이크(Nick Drake)가 떠올라 망설여진다. 결국 내가 찾은 말은 ‘도피’다. 그것이 험한 세상에 대한 나름의 대응방식임은 분명하지만 불충분한 방식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불충분하다 함은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런 태도가 ‘약발’이 먹힐 수 있는 기간이 거의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리다. 성장(누군가는 ‘타협’이라 부를)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지만 성장을 거부당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성장을 거부하는 찬란하고도 슬픈 (냉소적인 만가를 부르던) 순간이 지나고 성장을 거부당하는 싸늘한 순간이 올 때, 벨 앤 세바스찬은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 20020902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7/10 수록곡 1. The State I Am In 2. Expectations 3. She’s Losing It 4. You’re Just a Baby 5. Electronic Renaissance 6. I Could Be Creaming 7. We Rule the School 8. My Wandering Days Are Over 9. I Don’t Love Anyone 10. Mary Jo 관련 글 Belle & Sebastian [Storytelling] 리뷰 – vol.4/no.18 [20020916] Belle & Sebastian [Fold Your Hands Child, You Walk Like A Peasant] 리뷰 – vol.2/no.14 [20000716] Belle & Sebastian [The Boy With The Arab Strap] 리뷰 – vol.4/no.18 [20020916] Belle & Sebastian [If You’re Feeling Sinister] 리뷰 – vol.2/no.3 [20000201] 관련 사이트 벨 앤 세바스찬 공식 홈페이지 http://www.belleandsebastian.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