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발매된 앨범 [Night Walker]의 커버 속지에 있는 사진. 그가 운영하는 클럽 ‘Stonegate’의 간판이 보인다. 블루스 록 기타리스트 심형섭(1946년생)은 한국 록의 1세대 음악인에 속한다. 1960년대 중반 미 8군 무대에서 한국 최초의 ‘비트 그룹’이라고 할 만한 김치스(Kimchis), 그리고 1970년대 고고 클럽에서 ‘헤비 록의 전설’로 알려진 피닉스(Phoenix), 브래스 록의 인기 밴드 검은 나비 등이 그가 거쳤거나 이끌었던 주요 밴드들이다. 1970년대 중반 이성애와 이은하 같은 팝과 소울을 부른 여가수들의 음반에 작·편곡자 및 연주자로 레코딩에 참여한 일도 있는데, 이때는 심하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1976년 초 이른바 대마초 파동을 피해 ‘망명’을 떠난 뒤 지금까지 미국에 살고 있고 현재는 시애틀에서 스톤게이트(Stonegate)라는 바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토미 심(Tommy Shim)이라는 이름으로 블루스 록의 연주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mp3.com을 통해 두 장의 블루스 록 앨범을 발표하였다. 심형섭과 심하연과 토미 심은 동일 인물이지만 이 세 이름은 각기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심형섭이라는 이름은 그 가난했다는 시절에도 타고난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리도 좋아하는 음악을 직업으로 택한 음악인의 길로 접어든 인물의 이미지로, 심하연이라는 이름은 그의 음악적 열정이 주류 대중음악계에 어떻게 수용되고 또 훼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미지로, 마지막으로 토미 심이라는 이름은 그를 쫓아낸 조국을 미워하면서도 그 뿌리를 잊을 수 없는 ‘미국의 동양인 블루스맨’의 이미지로 각각 다가온다. 여기 그에 관한 첫 번째 인터뷰를 싣는다. 그의 증언은 이제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져가는 한국 록의 시생대(始生代)인 1960년대에 관한 기록이다. 이런 기록은 현재로서는 몇 사람만 추억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래에 적혀 있는 나의 질문들은 그걸 넘어서기 위해 ‘음악 듣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앞의 질문에 대답은 그의 증언에 나와 있지만, 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그래도 질문은 계속된다. 질의 및 정리 : 신현준 미 8군 무대 시절 Q: 몇 달 전 심형섭님의 팬 클럽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피닉스(Phoenix: 당시의 한글 표기는 ‘휘닉스’)의 음반이 CD로 재발매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지만, 일단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부터 물어보겠습니다. 1998년에 Tommy Shim이라는 이름으로 [Going Home]이라는 블루스 음반을 발매하신 뒤 새로운 작업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직접 운영하신다는 바(bar) 스톤 게이트(Stone Gate)는 영업의 어려움이 없나 조심스럽게 여쭤 봅니다. A: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는 두 번 다시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고 그래서 여지껏 한번도 한국에 가 본 일이 없으나 2000년을 맞으며 한국에 돌아갈 결심을 했고 그래서 이곳의 사업과 부동산 등을 정리하는 단계인데 지금은 귀국준비를 하며 지내고 있다고나 할까요? [Going Home] 앨범 이후 작년에 [Night Walker]가 나왔고 지금은 세 번째 [PHOENIX rise again] 앨범 작업을 절반 정도 마친 상태입니다. 나는 술 담배를 안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아서 이런 유흥업에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돈벌이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라 사업적인 능력은 없으나, 단지 내가 하고싶은 음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과 나하고 싶은 것에 마음대로 내 시간을 쓰면서 자유롭게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Q: 현재 함께 활동하시는 음악인들이 있으시면 어떤 분들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곳 시애틀의 블루스 혹은 블루스 록 씬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간단히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이곳에는 왕년에 한국서 음악 하다가 이민하여 이 지역의 한국 업소에서 음악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다들 음악이라기보다는 그저 호구지책으로 연명을 하는 정도입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살기는 했으나 한인 사회나 한국 사람들과는 전혀 접촉이 없어서 1980년대 중반에 스톤게이트(Stonegate)란 밴드를 조직하여 활동한 이후로는 함께 활동하는 한국 음악인들은 전혀 없고, 이 지역의 음악하는 미국인 친구들과만 왕래가 있습니다. 이곳 시애틀지역은 1960년대부터 지미 헨드릭스를 위시해서 1990년대 그런지 사운드의 시초인 너바나(Nirvana), 펄 잼(Pearl Jam)등 수많은 스타 그룹들이 미국의 음악계를 이끌어간 곳입니다만 미국의 중, 남부만큼 블루스가 강세를 보이는 곳은 아니며 특히 안타까운 것은 미국도1970-80년대와 같이 많은 로컬 밴드들이 라이브로 연주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점차 업소에서 라이브를 보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Q: 미국에서 음악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여쭤 보기로 하고 과거로 돌아가서 미 8군 무대 시기에 대해서 여쭤 보겠습니다. 심형섭님의 바이오그래피를 읽어보면 1960년대 중반 김치스라는 밴드의 베이스 연주자로서 미 8군 무대에서 직업적 음악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미 8군 무대는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서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그곳에 대한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미 8군 무대의 성격에 대해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 8군 무대의 클럽들은 장교클럽, 하사관클럽, 사병클럽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이들 클럽마다 연주되는 음악의 스타일이 상이했다고 합니다. A: 김치스는 내가 미 8군에서 음악을 시작한 첫 번째 팀이 아니고 두 번째 팀입니다. 한국전쟁 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의 숫자는 상당했고 그들이 있는 곳에는 군사시설 외에도 그들이 즐기고 쉴 수 있는 좋은 시설을 갖춘 클럽들이 우선적으로 세워졌는데, 사병들이 가는 EM club, 하사관들의 NCO 클럽(NCO club), 장교들의 오피서스 클럽(Officers club) 등으로 계급에 따라 구분이 되어있고, 인종적인 차별은 없었으나 사병클럽과 하사관클럽의 경우에는 자연히 흑백으로 갈라지더군요. 같은 부대 안의 사병클럽이라도 백인들이 주로 오는 곳은 비틀스(The Beatles)나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 같은 록 음악(rock music), 나이가 좀 든 백인 하사관들이 모이는 클럽에는 주로 컨트리 음악(country music), 그리고 흑인들이 모이는 사병클럽이나 하사관클럽은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나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같은 소울 음악(soul music), 장교클럽은 흑백에 관계없이 음악도 분위기있는 음악이 주로 연주되는 등 각각 특색이 있었지요. 이들은 클럽에서 동전을 넣고 음악을 듣는 쥬크 박스(jukebox)를 주로 애용하는데(지금 우리 클럽의 라운지에도 쥬크 박스가 있는데 미국 사람들은 잠시도 음악이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으로만은 만족을 할 수가 없어 라이브 쇼와 밴드를 원했지만 미국에서 연예인들이 세계의 미군 주둔 지역의 클럽까지 다 진출할 수가 없으니 유명인의 특별공연을 제외하고는 주둔국의 현주민 연예인들로 구성된 쇼와 밴드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미군이 주둔했던 일본이나 필리핀 등도 한국의 미 8군 쇼와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Q: 또한 미군 부대가 주둔했던 지역이나 부대의 성격(공군과 해군), 사병들의 인종(백인 혹은 흑인)에 따라서 클럽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다소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본인이 경험했던 경우는 어떠셨는지요? 또 자서전에서는 ‘쑈’라는 표현과 ‘하우스 밴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쑈’는 ‘쑈단’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하우스 밴드는 또 어떤 것이었는지요? A: 미 8군쇼는 미군클럽을 상대로 화양이나 공영같은 미 8군쇼 대행회사들이 자비를 들여 밴드와 가수, 무희 등의 연예인을 모아 한 시간 정도의 쇼를 구상, 연습시켜서 전국의 미군클럽 책임자들이 모인 곳에서 오디션을 본 후 실력에 따라 등급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클럽 매니저들이 자기가 원하는 쇼를 부킹을 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스케쥴이 정해지고 그 날짜에 해당 팀은 전국으로 공연을 떠나는데, 가까운 곳은 당일로, 먼 곳은 2, 3일 걸리기도 합니다. 쇼마다 흑인 음악이라든지 컨트리 음악이라든지 각기 특색이 있어서 그것에 따라 흑인클럽이냐, 백인클럽이냐, 사병클럽이냐, 하사관클럽 혹은 장교클럽이냐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는 서울 태생으로 지방에는 별로 가본 경험이 없었는데 2년간 미 8군 쇼를 하는동안 동두천, 문산, 장파리, DMZ, 평택, 오산, 부산 등 각지의 기지촌을 다니며 그들의 클럽과 시설들을 볼 수가 있었지요. 쇼는 이렇게 한 시간 정도의 구성으로 연주와 가수의 노래, 무희의 춤 등을 섞어 공연을 하는 것이고 하우스 밴드는 매번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간동안 일정한 미군클럽에 전속되어 미군들이 자기가 데리고 온 여자들과 놀 때 그들이 춤을 추도록 계속 댄스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로서, 예를 들면 화양에 소속한 A라는 밴드가 동두천에 있는 사병클럽에서 두 달간 연주를 하기로 계약이 되면 밴드가 동두천으로 가서 그곳에서 하숙을 하면서 계약기간 동안 매일 저녁 클럽으로 출근하여 연주를 하는 것이지요. Q: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이나 소득 수준에서 밴드를 꾸리기 위해서 악기와 장비를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추측컨대 당시는 국내에서 제조한 전기 기타도 없었을 것 같고 수입품은 가격이 비쌌을 것입니다. 혹시 미 8군 무대에 선다는 것은 그런 조건을 해결해주는 것이었나요? 덧붙여 사용하시던 악기나 장비의 모델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시면 좋은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A.: 그 당시 시중에서는 외제 악기를 구하기가 힘들었고 가격도 비쌌지만 그래도 미 8군 상대 연주인들은 그들을 통해 악기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미군 부대 내에는 어디나 근무 시간 후에 취미활동을 할 수 있는 서비스 클럽이라는 것이 있어서 연주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악기가 준비되어 있는데 이런 악기들을 어떤 경로로 구할 수도 있었고 나같이 미 8군 쇼를 하면서 용산이나 후암동 등 가까운 곳에 근무하는 같은 또래의 미군들을 친구로 사귀어 부대에도 놀러가고 우리집에도 놀러오고 같이 명동이나 시내의 다방, 음악감상실 등에 놀러 다니던 사람들은 미군 친구들을 통해서도 악기를 구했지요. 그러나 기타 앰프 같은 것은 외제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대부분 1960년대 중반부터 삼각지 등 몇곳의 전파상에서 젊은 기술자들이 수작업으로 몇 개씩 만드는 100W 정도 출력의 기타 앰프를 주문하여 썼는데 국산 스피커가 성능이 좋지 않아 청계천 등을 다니면서 12인치 외제 중고 스피커를 구해다가 썼으며 그 당시로는 다양한 앰프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나의 경우는 그당시도 깁슨 SG(Gibson SG), 깁슨 파이어버드(Gibson Firebird), 깁슨 멜로디 메이커(Gibson Melody maker) 등과 펜더 스트래토캐스터(Fender Stratocater), 펜더 무스탕(Fender Mustang) 같은 오리지날 기타들을 썼고, 앰프는 외제 중고 스피커를 정착한 국산 앰프, 그리고 이펙트는 역시 펜더의 와와 페달과 퍼즈(fuzz)를 썼습니다. 그 당시는 그것이 모든 기타리스트들이 사용하던 전부로 코러스(chorus), 딜레이(delay), 오버드라이브(overdrive), 디스토션(distortion) 같은 이펙트는 없었지요. Q: 미 8군에서 활동하던 그룹 사운드 멤버들의 출신 지역에서 특징적인 부분이 있었습니까. 특정 지역 출신 인물들이 많았다든지 하는.. 물론 주관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겠지만, 지역적인 출신 면에서 인상에 남는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혹시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비율은… A: 미 8군 그룹사운드 멤버들의 지역적 출신은 거의가 서울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전국의 미군지역 클럽의 음악을 맡아 미군 측과 계약하여 시행하는 회사가 서울에만 있었고 서울에서 연습과 오디션 등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졌으므로 지방 태생들도 서울로 이사를 오거나 상경하여 하숙을 하거나 했습니다. 나중에 1980년대 이후에는 지방에도 그룹 사운드들이 생기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출연하러 많이 내려가기도 했겠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1970년대의 그룹 사운드 붐은 오직 서울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젊은 음악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Q: 당시 미8군이나 일반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룹 사운드 뮤지션들의 경제적 배경(출신)은 어땠습니까. 지금처럼 중간층이 없었던 시대이니, 부유층 아니면 빈곤층 둘 중 하나였을 것 같은데요. ‘포크'(통기타) 뮤지션들은 부유층이 적지 않았던 것 같고, 그룹사운드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분들이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제로는 어땠는지 알고 싶습니다. A: 뮤지션들의 경제적인 배경은 포크 쪽보다 그룹 사운드의 경우가 더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물론 개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선 거의 전부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외국의 팝송 등에 미쳐서 음악감상실이나 음악다방 등을 드나들며 용돈도 쓰고 끼를 부리던 출신들이고 악기를 배우고 악기를 구입하고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연습을 하고 이런 것은 그 당시로서는 경제적 여유가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지요. Q: 미 8군 무대의 계약조건이나 근로조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한국처럼 ‘가수’가 아니면 음악인으로 생계를 꾸리기 힘든 상황에서 당시 미 8군 무대에 선다는 것은 생계를 해결한다는 차원도 무시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월급제’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 수준이 당시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에 해당 되는지도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이는 연주인에 따라 트리플 A, 더블 A 식으로 차등이 있었고 오디션도 3개월에 한번씩 했다고 들었는데 실례가 안 되면 김치스를 비롯해 심형섭 님이 계셨던 밴드는 어느 정도 급에 포함되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이건 심형섭 님의 음악적 실력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중반 미 8군 무대에서 ‘스스로 연주하고 노래부르는 형태의 그룹’의 지위를 어떻게 간주했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A: 미8군은 월급제로 개인의 실력과 쇼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례해서 개인차가 많았으며 보편적으로 일반 사회인들의 수입에 비해 좋은 편이였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활동하던 맥키쇼나 김치스쇼가 어떤 등급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단, 앞에 얘기한대로 각 쇼마다 특징이 있으므로 그 쇼의 분위기에 맞는 클럽에서 부킹을 주로 하게 되는데 김치스는 그 당시 최신 유행이던 비틀스의 음악을 주로 했으므로 젊은 백인사병들이 주로 모이는 클럽에서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컨트리 뮤직이 강세인 하사관클럽이나 장교클럽, 흑인들이 주로인 클럽에선 시끄러운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록의 태동 그리고 김치스 1960년대 중후반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김치스의 사진(제일 오른쪽이 심형섭) Q: 김치스의 경우 그룹을 결성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자서전에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젊은 또래끼리 모여”라고만 설명하셨는데, 당시 김치스를 포함해서 당시 그룹의 결성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비틀스의 결성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이 많으면서도 정작 한국 그룹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으니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종래의 재즈 밴드같이 전형적인 악단들은 밴드마스터를 중심으로 마스터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실력있는 연주자를 개인별로 접촉하여 팀을 구성하는 반면, 1960년대에 들어서 시작된 비틀스를 위시한 세계의 전기 기타 위주의 젊은 그룹들은 대개가 평소 주변에서 잘 알고 뜻이 맞는 친구 또래들끼리 의기투합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김치스 이전의 화양 소속의 많은 쇼들은 전부가 밴드마스터가 이끄는 10인조 이상의 풀 멤버 밴드(full member band)였고 연령대도 20대에서 40대 이상까지 각 연령층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김치스를 위시한 새로운 세대의 신인 그룹들은 대개가 당시 최신 유행이며 온 세계를 휩쓴 비틀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식의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 20대 초반의 비슷한 또래의 나이 어린 연주인들끼리 모여 팀을 만들게 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악기도 전기 기타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악단에서 베이스를 맡은 것은 첼로같이 생긴 덩치가 큰 콘트라베이스였는데 비틀스의 등장과 더불어 그룹 사운드에서는 부피가 작고 볼륨 조절이 가능한 전기 베이스 기타가 필수가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 들어간 미 8군쇼인 맥키쇼는 전부 나보다 연상인 선배들이었고, 이미 기타 연주자가 있어서(이 기타리스트가 나중 1960년대 후반에 미도파 살롱 등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바보스란 그룹의 리더가 된 이진입니다) 베이스 연주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부 악장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이미 팀을 만들어 대학 카니발 등에 불려 다니던 나를 눈여겨본 미 8군에서 활동하는 밴드부 출신 선배들이 나를 추천했고, 그래서 나는 레슨이나 연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 당시 이미 이름 있는 실력자들이 모인 팀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에 멤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한편 김치스는 리더인 유희백(그는 차중락 이전의 키 보이스의 오리지널 보컬이었습니다)이 비틀스 스타일의 새 팀을 구성하려고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던 같은 또래의 드럼 허정희와 기타 이성봉 등과 뜻을 같이 하고 베이스 연주자를 찾던 중 나의 소식을 듣고 같이 팀을 만들자고 나를 찾아옴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Q: 당시 소속하고 계셨던 화양 같은 곳에서 요즘의 매니지먼트와 비슷한 어떤 게 있었는지를 여쭤 보고 싶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이나 앤드류 올댐(Andrew Oldham)같이 ‘반항아들을 상품화시킨’ 인물들이 있었는가라는 이야기입니다. A: 화양에서도 회사 최초인 전기 기타 위주로 구성된 김치스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후원했지요. 그 당시 미 8군에는 각 쇼마다 매니저가 있었으나 역할은 팀을 인솔하고 공연을 다니는 정도의 역할뿐이었고 그후 1960년대말부터 그룹사운드가 미 8군이 아닌 서울시내의 업소에 진출하면서 팀 매니저들이 생겼지만 역시 대부분 업소와 연결을 해주는 역할 정도에 그쳤을 뿐입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비틀스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 같이 음악적인 안목과 수완으로 팀을 수퍼스타로 만든 매니저의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Q: 조금 구체적인 질문으로, 무대도 그렇지만 ‘연습실’같은 것은 어떻게 해결하셨는지요? 아울러 음악을 그저 듣는다면 모를까 실제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라디오 방송만 가지고는 힘들고 음반은 물론이고 악보같은 것이 필요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걸 구하기가 당시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는지요? 간략히 정리하면 음반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셨고, 그걸 그룹이 어떻게 듣고 합주를 연습했는가라는 질문입니다(덧붙여 당시 주로 연주했던 곡들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서전에서는 “I Want to Hold Your Hand”와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언급하셨는데 기억나는대로 더 언급해 주시면 중요한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A: 그 당시 화양 같은 여러 연예회사에는 각 팀마다 악기를 보관하는 창고와 여러 개의 연습실이 있었습니다. 특히 오디션 같은 것을 앞두고는 밤을 새워가며 연습을 했고, 회사에서도 각 팀들의 연습에 최대한 협조를 했기에 성의만 있으면 연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또 미 8군쇼는 철저하게 미군들이 좋아하는 곡들만을 위주로 선택되었기에 음반보다는 AFKN등의 방송 Top 10에 오르는 인기곡들을 녹음을 해서 그 중에서 쇼에 사용할 곡을 골라 편곡도 하고 가사도 미군들을 통해 정확히 따서 연습을 하곤 했는데, 회사에 여러 개의 녹음기가 있어 연습 때마다 한 팀당 녹음기를 하나씩 배당받아 그것을 들으면서 연습을 하던 생각이 납니다. 음반은 대부분 미군 친구를 통해 원반을 PX등에서 구하거나 청계천 등에 많이 나와있던 원반을 무단복제 한 소위 빽판이라고 불리는 것을 많이 사서 들었습니다. 한국의 그룹들이 외국의 음반을 듣고 카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일반무대로 진출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팝송이라든가 팀의 분위기에 맞는 곡들을 외국 음반들 중에서 고르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외국 유명 팀들과는 달리 한국은 대부분 음악적 기초가 있는 멤버가 많았고 팀의 리더라면 연주 실력과 더불어 곡을 듣고 악보로 옮길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 역시 음대를 가려고 공부를 했었고 중고등학교 때 밴드부를 하면서 40인조의 밴드곡을 편곡했던 경험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김치스는 노래부터 의상, 무대매너까지 철저하게 비틀스를 카피한 팀이었기에 우리가 하던 곡들은 모두 Top 10에 올랐던 비틀스의 히트곡뿐이었고 일반 무대에 나갈 경우엔 한국에서 유행한 애니멀스(The Animals)나 벤쳐스(The Ventures) 등의 곡들도 섞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그룹들이 미 8군과 일반무대에서 많이 연주하던 외국 곡들의 리스트가 필요하면 나중에 따로 정리를 해보지요. Q: 김치스의 경우 이른바 ‘캄보 밴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록 그룹’으로 시작한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즉, 재즈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록(혹은 로큰롤)으로 정식 경력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심형섭님의 경우 김대환 같은 분과 함께 연주했던 경력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캄보 밴드에서 그룹 사운드로’ 변화하는 구체적 계기는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비틀스의 영향’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1940-50년대 미국의 재즈밴드는 모두가 빅 밴드(풀 멤버 밴드), 즉, 대형악단이었으며 역할은 오직 악기 연주와 가수들의 반주였고, 여기서 발전하여 작은 장소에서도 연주할 수 있고 쉽게 움직일 수 있게 구성된 것이 4ㅡ5인조의 캄보 밴드로서 역할은 역시 연주에 국한되었습니다. 이렇게 ‘악단은 연주, 가수는 노래’라는 구분이 허물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 1960년대초 직접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함께 하는 비틀스를 위시한 새로운 록 밴드(rock band)의 출현이었습니다. 내가 음악을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러한 전환기로, 그 당시 한국의 대중은 이러한 음악을 아직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으나 그 당시 이러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필요로 하고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곳이 오직 미 8군 무대였기에 한국에서 록 밴드의 역사는 그 당시 미 8군에서 음악을 처음 시작하고 미군들 앞에서 연주하던 젊은이들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초창기 록 밴드는 캄보 밴드 등에서 연주를 하던 연주인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록 밴드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선배 연주인들은 록보다 수요가 더 많았던 종래의 재즈나 컨트리 뮤직을 계속 연주했으며 비틀스류의 록 밴드는 거의 새로이 음악을 시작하던 젊은이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캄보 밴드나 재즈를 거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바로 록 음악으로 시작한 것이지요. Q: 그렇다면 그 당시 미 8군 무대의 청중이나 거기서 활동하는 한국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취향의 차이나 세대간 갈등(?)이 있었나요? A: 미 8군 무대의 청중은 미군뿐이고 거기서 활동하는 한국 음악인들은 미군들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하는 동시에 그 음악 자체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이었기 때문에 재즈면 재즈, 록이면 록, 각자의 취향과 실력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므로 각자 자부심과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했고, 따라서 서로간에 차이나 갈등은 없었지요. 그 점이 미 8군 출신 연주인들이 한국인 상대 캬바레나 일반 극장쇼, 서커스 등에서 호구지책을 위하여 직업으로 연주하던 일반 악사들과 다른 점이며 따라서 나중에 미 8군 출신의 악단과 가수, 록 밴드 등이 일반 무대에 진출하여 한국음악계가 변화해 가는 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요인이라고 봅니다. Q: 이런 움직임이 ‘젊은이들의 음악’이나 ‘청년문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요? 즉, 한국의 록 음악은 미 8군을 무대로 시작되었는데 그곳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전파는 제한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A: 한국에 “젊은이들의 음악”이나 “청년문화”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며 그전까지 한국에서 외국의 팝송을 좋아하고 열심히 듣는 층은 미군방송을 듣고 음악감상실과 음악다방을 드나들던 대도시의 일부 젊은 층뿐이어서 한국 전체로 보면 그 숫자는 아주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이후 한국방송에서도 “한밤의 음악편지”같은 팝송 위주의 많은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팬들이 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젊은 층을 상대로 하는 업소가 생기면서 미군만을 상대하던 미8군 출신의 초창기 록 밴드들이 일반 무대로 진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후 젊은 층에 크게 유행하던 장발이라던가 히피 풍의 옷차림, 청바지 등도 일찌기 외국 팀의 모든 것을 모방하던 초창기의 한국 록 밴드들에 의해 당시의 젊은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김치스의 경우 영어로 ‘cover band’에 해당하는 밴드로 보입니다. 커버 밴드는 음악인의 저변을 이루는 것으로서 중요한 것이고 더구나 한국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최초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비틀스나 롤링 스톤스도 미국의 로큰롤과 리듬&블루스의 커버 밴드로 경력을 시작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창작곡을 연주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음악인으로서 한계 같은 것을 느끼시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당시 한국의 상황이 창작곡 같은 것을 연주할 공간조차 없었던 것인가요? A: 그때 우리는 아직 신인으로서 우리가 서는 무대는 오직 미군들 앞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좋아하고 우리 역시 좋아하는 비틀스 같은 음악들을 잘 연주하여 인정을 받기 위해 많이 듣고 연습하고 모방하던 시기였는데 한국의 대중음악은 이미자나 배호 등의 뽕짝 가요 아니면 미 8군 출신의 한명숙, 현미, 최희준 같은 새로운 스타일의 가요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록 스타일의 자작곡이란 아직 시도할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지요. 물론 그런 스타일의 창작곡이 있다 해도 연주할 공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Q: 저 같은 사람의 경우 1960년대에 그룹 사운드가 음반을 남긴 경우는 애드 훠(Add 4), 키 보이스, 화이브 휭거스 정도밖에 알지 못합니다. 애드 훠는 예외지만 다른 경우는 영미 록 음악의 번안곡이거나 록 음악과는 거리가 있는 직업적 작·편곡가가 만든 곡을 레코딩한 것이더군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움직임이 있었는지요? A: 장사꾼들이 좌지우지하는 음반산업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단 한가지 목표, 즉 얼마나 팔릴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므로, 음악성으로 이런 음반의 제작을 시도하는 장사꾼들은 없습니다. 문제는 한국의 대중인데 아무리 새로운 유행의 음악이 시작되고 새로운 시도가 있어도 그런 것을 좋아할 사람은 한국 전체로 볼 때 극히 소수이기 때문에, 한국 그룹 사운드가 자기 스타일의 음반을 내도 팔릴 가망은 없지요. 그런 이유로 그나마 음반을 냈다는 1960-70년대의 그룹 사운드의 음반을 들어보면, 피닉스의 음반을 위시해서 키 보이스, 히 식스, 데블스 등 여러 그룹들이 미 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자신들의 사운드가 아닌 한국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가요 스타일의 곡을 수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곡이 3분이 넘으면 방송에서도 길다고 틀어주지를 않았는데, 내가 피닉스의 앨범에 8분이 넘는 “밤길”이라는 곡을 넣은 것은 다른 곡은 음반업자들이 바라는 식의 곡을 했으니 단 한 곡만이라도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발악(?)같은 고집이었지요. 이런 현상은 내가 한국을 떠난 이후도 마찬가지인 듯한데 198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들국화나 백두산 같은 밴드들이 자신의 헤비 사운드로 자작곡들을 발표해서 인기를 얻었다고 들었으나, 그것 역시 한국 전체로 보면 소수의 호응에 지나지 않고,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의 록 밴드들은 대중과는 인연이 없는 채 춤 잘 추고 립 씽크 하는 어린애들에게 밀려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현상을 볼 때 록 밴드나 블루스 밴드가 한국 대중의 호응을 얻기는 아직 요원하게 보입니다. ‘한국’에서 ‘1960년대’를 보내기 Q: 김치스는 음반을 남기지 못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라이브를 레코딩 한 것이 있다든가, 스튜디오 레코딩이 있는데 발표는 하지 않았다든가… 그런 것도 없을까요? 그것도 없다면 당시 음반산업의 시스템이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그룹 사운드’가 레코딩을 하고 음반을 발매하기는 그토록 힘든 것이었나요? 즉, 심형섭 님이 몸으로 느끼셨던 한국 음반산업의 관행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A: 김치스는 1965년을 기점으로 1년 정도를 미 8군 화양 소속으로 활동한 후 해산이 되었습니다. 나는 1966년초 주월 군예대 창설멤버로 군에 입대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고 딴 멤버들도 한국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모두 한국을 떠나고 싶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마 같이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반무대로 진출했다면 음반을 남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김치스는 내가 가지고 있는 한 장의 오랜 흑백사진 외에는 남긴 것이 없습니다. 이때의 멤버 4명이 지금은 모두 외국에 사는데 유희백은 캐나다에, 그리고 기타 이성봉(바비), 허정희(드럼) 그리고 베이스 주자였던 나는 모두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녹음실은 매우 시설이 빈약했고 그나마 서울에도 불과 두서너 군데 밖에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부분 대중가요를 위주로 한 녹음 스케줄로 항상 바빴고 매우 사용하기가 힘들어서 미 8군에서 음악을 하는 초창기 그룹사운드가 그런 스타일의 창작곡으로 음반을 취입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한 시절이었지요. 물론 음반을 남긴 몇 그룹이 있지만 그 곡들 역시 모두가 한국대중에 알려진 팝송의 번안곡 내지 재래의 가요를 분위기와 사운드가 좀 색다른 그룹 사운드 식으로 반주하고 노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가 한국을 떠나 있던 1960년대 후반에 직업 작곡가들에 의존하지 않고 미 8군의 경험과 영향을 바탕으로 일반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들을 발표하여 성공한 사람이 신중현 씨인데 그로 인해 한국의 음반업계는 새로운 그룹 사운드의 음악도 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런 곡들 역시 재래의 뽕짝 가요와는 달라도 결국은 한국인의 정서와 입맛에 맞는 그러한 가요들이며 양희은 등의 1970년대 포크송 역시 한국 대중의 취향에 맞았기에 크게 알려질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한국의 그룹 사운드가 제대로 자신의 사운드를 음반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 사랑과 평화, 들국화, 백두산 이런 그룹들에 의해서가 아닌가 하는데 그들 역시 일부의 호응에만 그쳤고 상업적인 성공은 거둘 수가 없었기에 1960년대나 지금이나 철저하게 돈이 되는 장사만을 하려고 하는 한국의 음반업계는 이러한 그룹 사운드의 음악을 외면하는 것이고 따라서 록 음악은 계속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지금까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신세가 된 것이지요. Q:자료에 의하면 미 8군 무대 출신의 음악인들이 국내의 일반 무대로 진출한 것은 1962년경부터라고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한명숙, 현미, 최희준, 유주용 같은 ‘스탠더드’한 음악이 주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마침 그때는 박정희 정권이 본격적으로 출범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착수된 해로 기억됩니다. 한 문헌에 의하면 ‘한국연예협회’가 설립된 것이 저런 진출의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만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리하면 그 전까지 미군부대의 ‘군무원’이라서 국내 무대에 설 수 없었던 미 8군 무대 출신의 음악인들이 국내 일반 무대로 진출하게 된 동기나 원인이 있다면 어떤 것일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룹 사운드의 경우는 앞의 ‘팝 가수’와는 다른 동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A: 그룹 사운드가 출현하기 이전에 한국가요계는 미 8군 출신 밴드마스터들의 곡으로 일반에 진출한 가수들에 의해 이미 새바람이 불었는데 뽕짝 일색이었던 1960년대 초의 한국은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등 서양풍의 경쾌한 리듬의 곡들이 나타나고 이런 새로운 가요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때입니다. 즉 그룹 사운드가 일반 대중에게 나타나기 이전에 한국의 음악계는 미 8군 출신의 음악인들에 의해 이미 세로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또한 신성일, 최무룡 등으로 대변되는 이 당시의 한국영화도 유일한 서민의 오락으로 점점 수요가 커가고 있었기에 이런 시점에 맞추어 연예인들 스스로가 우리도 힘을 모아 우리의 권리를 행사하자는 취지로 한국의 연예협회가 창립되어 가수분과, 연주분과, 연기분과 등으로 나누어 체계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당시에도 일반 무대에는 많은 수의 악단과 가수들이 있었고, 따라서 각지의 나이트 클럽, 캬바레, 살롱, 요정 등에서, 또는 이미자, 남진, 서영춘, 백금녀 등 당시 대중에게 알려진 가수와 코메디언을 망라한 쇼를 구성해서 도시와 지방을 순회하는 극장쇼 등에서 활동하는 악단들과 가수들도 그 숫자가 미 8군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보다 오히려 훨씬 많았습니다. 우린 보통 일반과 미 8군으로 구분해서 불렀으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미군을 상대로 그들의 음악을 소화하는 실력 있고 진취적인 미 8군의 음악인들이 단지 음악을 생계를 위한 기술로 삼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음악을 하는 일반 악사들을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연예협회의 발족으로 이런 모든 음악인이 함께 모이게 되었으며 또한 그룹 사운드가 붐을 이루던 1960년대 후반에는 연예협회 내에 그룹사운드 분과까지 생겨서 김대환, 신중현, 김홍탁 이런 분들을 주축으로 매년 시민회관에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많은 활동들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 8군 출신의 음악인들은 군무원이 아니었고, 군무원이라서 국내 무대에 설 수 없었던 것도 아니며, 다만 1960년도 초중반에는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 음악을 연주할 대상이 주로 주한 미군뿐이었으나 차츰 한국 대중에게도 그런 세대의 변화가 먹히면서 즉, 수요가 생기면서 미 8군에서 경험을 쌓은 음악인이 국내 무대로 공급이 되어 한국의 음악계를 변화시키고 이끌어가게 되었던 것일 뿐입니다. 내가 한국을 떠난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의 한국 음악계의 변화는 잘 모르지만 1960-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계를 주도한 것은 1960년대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국내 무대로 진출한 미 8군 무대 출신의 밴드마스터들과 가수 연주인 그리고 그룹사운드라고 생각합니다. ‘크럽 닐바나’ 광고에 등장한 심형섭의 휘닉스(및 다른 그룹 사운드). 정확히 30년 전의 모습이다 Q: 1960년대 후반 심형섭 님은 한국에 있지 않고 베트남에 다녀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저희로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베트남에는 군예대로 한 차례, 그리고 제대 후 민간인으로 한 차례 더 갔다 왔습니다. 첫 번째(1966-68) 기간은 주월 군예대의 창설 멤버로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로서 나의 자서전에 이때의 상황을 대충 설명한 바 있습니다. 주월 군예대는 원로작곡가 손목인씨의 아들인 후랭키 손이라는 그 당시 미 8군 무대에서 인기가 있었던 가수를 주축으로 당시 군복무를 필하지 않은 미 8군의 실력 있는 젊은 음악인들을 엄선하여 구성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전쟁터의 한국장병을 정기적으로 위문한다는 것 외에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월남전의 특수성 때문에 월남 민간인을 상대로 총이 아닌 음악으로 펼쳐야 하는 민간 외교의 중요성, 그리고 미군을 비롯한 동맹군들에게도 우리의 위문공연을 통하여 한국의 입지와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전략적 차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외국인을 상대로 많은 연주생활을 한 경험이 있고 외국무대에서도 손색이 없다고 인정이 되는 미8군의 젊은 음악인들을 택한 것입니다. 그때 겪은 일들과 개인적인 경험은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라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민간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기에 자유로운 시간이 많았고 특히 미군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많았는데 이 기간 동안 나는 한국에서 하던 비틀스 풍의 음악과 연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eix),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등의 헤비한 기타사운드에 눈을 뜨게 되며, 그 당시 처음 소개된 시카고나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 같이 브래스 재즈가 록 음악과 혼합된 음악 등 새로운 여러 음악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그런 음악에 심취하고 영향을 받아 나의 음악 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가 되었습니다. 단, 입대 시 일년 간의 월남 복무로 군복무를 마치게 해준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기에 2년의 월남 복무 후 귀국하여 강원도 홍천에서 1년 더 복무를 하고서야 제대가 되었습니다. Q: 월남에 두 번째 가시게 된 동기와 그곳에서의 경험은 어떠셨는지요? A: 두 번째 월남에 간 것은 1970년부터 1971년 사이입니다.. 제대 후 나는 완전히 기타로 포지션을 바꾼 후 김포의 미 공군부대 하우스 밴드로 다시 음악을 시작했고 변변한 장비도 없는 채로 지미 헨드릭스의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최고의 인기곡이던 “Purple Haze”같은 곡을 하루 저녁에 몇 번씩 앙콜로 연주했습니다. 비틀스를 카피하던 1960년대 중반의 베이스 연주자에서 이제서야 겨우 바라던 대로 헤비한 록 기타리스트로 변신을 시작한 것이지요. 이때 월남전은 미국이 점점 깊숙이 개입하고 더욱 많은 수의 미군들이 파병되면서 그들을 상대로 한 연예시장의 규모 역시 날로 커졌는데 이미 미 8군 상대로 많은 노하우를 쌓은 한국의 연예회사들은 재빨리 미군들에게 인기를 끌만한 팀들을 거느리고 속속 월남에 진출하여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수많은 연예인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나는 이런 팀중의 하나로 다시 월남에 가게 됩니다. 이 시기에 나는 본격적으로 미국, 영국, 필리핀 등에서 온 여러 밴드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통해 그 당시의 분위기 즉 히피(hippie), 플라워 차일드(Flower Child), 러브 앤 피스 무브먼트(Love and Peace movement)등을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대마초나 LSD 등을 통해 마약과 록 음악 사이의 연관성을 체험하면서 비로소 나의 음악이 갈 방향을 확고히 정하게 됩니다. 이때의 자세하고 솔직한 이야기는 비록 21세기라하나 아직도 한국같은 나라의 체제와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을 터이므로 얘기할 수가 없고 더우기 피닉스 시절과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의 일들은 비록 몇십 년 전의 일이라고 하나 현재 한국의 정서로는 아직도 생존해서 활동하는 많은 음악인들에게 무슨 불이익이 될지몰라서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1980년대 전인권인가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나도 들은 바 있으나, 그들도 나름대로 자부심과 경력이 있겠지만 내가 음악을 하던 1960-70년대 박정희의 독재하에서 미리 앞서간 우리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어떠한 길을 갔는지는 그 당시 아직 어린 학생이었던 그들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천인공노할 살인마인 전두환 이하 장세동 같은 것들이 아직도 뻔뻔스럽게 활보하고 있고, 소위 명문대 출신의 관료라는 것들이 요직에 앉아 권력이 시키는대로 눈치나 보며 충견 노릇으로 일관하고 있고, 더욱이 힘있는 놈들이 끼리끼리 짜고 다 해 쳐먹으며 천인공노할 패륜적이고 극악무도한 범죄가 매일같이 터지는가하면 쾌락과 방탕을 위해 온갖 마약이 범람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온 몸을 던져 무언가 느끼고 깨닫고 표현해 보려는 일부 음악인들이 히로뽕이나 코케인 같은 마약도 아니고 그저 맥주 한잔 마신 것이나 별 다름없는 대마초를 한번 했다고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 양 매도하고 매장시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아무튼 한국이 그룹 사운드 붐을 이루어 수많은 그룹들이 생기고 우물 안의 개구리 처지에서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던 1960년대 후반 외국에서 몇 년간 새로운 세상을 보고 격은 나는 1971년 귀국과 동시에 나름대로 뚜렷한 음악적 방향을 가지고 피닉스를 시작하게 됩니다. Q: 십형섭님의 증언에 따르면 1970년대 전반기가 록 그룹의 전성기였다고 합니다. 한편 당시 자료를 뒤져보면 ‘엘레키 그룹’, ‘싸이키 그룹’의 단어가 나오고 그 전성기는 1968년-1969년경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기 심형섭님은 베트남에서 군예대를 하면서 서울에 계시지 않았지만 저런 흐름에 대해 느끼시는대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이는 다음 번에 1970년대 피닉스의 활동에 대해 여쭤 보면서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지만 저 시기가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나 우드스톡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이 열린 시기였고 그게 한국에도 어느 정도 파장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A: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그룹 사운드가 붐을 이룬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을 필요로 하는 업소들이 많이 생겨서 그들이 설 무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층이 주고객인 고고클럽과 살롱 등에는 음악 잘하고 용모가 준수한 그룹 사운드 팀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그때에도 오빠부대들이 있어서 팀을 따라 그들이 함께 움직이곤 했습니다. 히피와 싸이키델릭의 시대는 1960년 말로 끝나고 1970년부터는 본격적인 하드 록(hard rock)의 시대가 왔는데 지금의 댄스 그룹들이 매일 생기듯 그때는 그룹 사운드 팀이 매일 생기다시피 했고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 레드 제플린, 산타나(Santana), 블랙 사바쓰(Black Sabbath),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 딥 퍼플(Deep Purple) 등의 하드 록 밴드의 음악을 많이 카피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그 많은 그룹들도 거의가 업소에서 좋아하고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팝송 스타일을 주로 연주했으며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의 음악 방향을 고집하는 팀은 많지가 않았습니다. 한국 그룹 사운드의 몰락은 1975년 말의 대대적인 대마초 단속과 1970년대의 새로운 물결인 디스코의 출현으로 수많은 업소가 라이브 밴드 대신 화려한 조명과 DJ가 음반을 틀어주는 디스코텍 형태로 바뀌면서 무대를 잃은 것이 원인으로 생각되는데 나는 그시기에 한국을 떠났으나 아무튼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국의 그룹사운드는 다시는 일어설 기회를 찾지 못하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며 내려오고 있는 듯 합니다. Q: 사소한 질문으로 마치겠습니다. 1966년에 비틀스가 일본과 필리핀에 와서 공연을 가졌다고 합니다. 혹시 당시에 저 사실을 전해 듣고 음악 하시던 분들이 어떤 심정을 가졌는지도 조금 궁금합니다. 한국에는 1969년에야 ‘한물 간’ 클리프 리처드가 이대 강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래도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때의 기억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한국에도 1963년에 가짜 비틀스가 왔었습니다. 날짜는 기억이 안되나 내가 고3 때이던 추운 겨울이었고 공연장에 가보니 금발에 파란 눈을 한 청년들이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왠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결국 사람들이 별로 없어 공연은 취소가 되어 허탕을 쳤지요. 알고 보니 그들은 진짜 비틀스가 아니라 비틀스를 카피 연주하는 영국 그룹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아마 그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 등을 찾아보면 기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이나 필리핀과는 달리 머리만 길어도 잡아가던 박정희 시절에 비틀스같은 세계적인 그룹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니 그런 기대는 누구도 아예 못했던 일입니다. 한국에 왔었다는 가짜 비틀스도 한국 대중을 대상으로 공연을 온 것이 아니라 미 8군의 초청으로 미군을 위해 공연을 온 것인데, 누군가 비틀스의 세계적 명성을 이용하여 공연을 기획했으나 관중이 별로 모이지 않아 실패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클리프 리처드는 196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고 특히 그의 밴드 섀도우스(The Shadows)는 벤처스(The Ventures)와 같이 기타와 드럼만으로 이루어진 악단으로 초창기의 한국 그룹들이 좋아했고 많이 카피 연주했습니다만 그가 한국에 왔을 당시 나는 이미 더 이상 그들의 음악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관심이 없었지요. (계속됨). 20020902 관련 글 한국에서 록 음악은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가: ~1967 – vol.4/no.17 [20020901] 애드 훠 [비 속의 여인: The Add 4 First Album] 리뷰 – vol.4/no.17 [20020901] 쟈니 리/키 보이스 [오! 우짤꼬/정든 배는 떠난다 외] 리뷰 – vol.4/no.17 [20020901] 애드 훠 [한국의 벤쵸스 Add 4: 신중현 경음악 편곡집 Vol. 1] 리뷰 – vol.4/no.17 [20020901] 락 앤 키 (보이스) [그 밤과 같이] 리뷰 – vol.4/no.17 [20020901] 정원/샤우더스 [정원과 샤우더스 전집] 리뷰 – vol.4/no.17 [20020901] 화이브 휭거스 [Five Fingers & Top Song] 리뷰 – vol.4/no.17 [20020901] 애드 훠 [즐거운 기타 경음악 투위스트] 리뷰 – vol.4/no.17 [20020901] 에보니스/키 보이스 [에보니스 대 키보이스 골든 POP’S] 리뷰 – vol.4/no.17 [20020901] 관련 사이트 심형섭 홈페이지 http://www.tomshim.com 심형섭 팬페이지 http://www.freechal.com/stonegate 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한국 록 음반 연구회 http://cafe.daum.net/add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