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29025624-kjm_1김정미 – 바람 – 유니버살 레코드 / Shin Jung Hyun MVD, 1973 / 2002

 

 

“한국 싸이키델릭 여제(女帝)”의 제대로 된 부활

김정미는 김추자와 함께 ‘신중현 사단’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다. 활동 당시에는 김추자의 명성에 가려 빛을 덜 본 감이 있지만(‘아류’로 매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전설’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김추자를 크게 능가한다. 우선 김추자는 1970년대 간판 스타 중 하나라 할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크게 누려 오늘날 다소 식상한 감이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김정미의 존재는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금지곡도 유난히 많아 제약이 많았고, 활동 기간도 6년 남짓으로 그리 긴 편은 아니었다. 또한 간간히 근황이 들려오는 김추자와는 달리 김정미는 가수 활동을 접은 이후 완전히 대중의 사야에서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이 김정미를 중고 LP 음반계의 ‘여제’로 등극시킨 주요 원인인 듯 싶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김정미를 영원히 잊기 힘든 존재로 각인시킨 것은 ‘음악적인 면’이 아닌가? 물론 ‘신중현의 싸이키델릭을 가장 뛰어나게 구현한 최고의 가수’라는 애호가들 사이의 찬사는 과장된 면이 있는 것은 확실하나(김추자는 물론이고 박인수나 이정화 등이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섭섭해 할 것인가?), 그럼에도 김정미는 대단히 뛰어난 보컬리스트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정미처럼 호소력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청순함과 관능미가 완벽한 결합을 이룬 경우는 실로 보기 드물다. 관능미에 있어서는 김추자의 보이스도 이에 못지 않으나, 김정미에 비해 풋풋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거기에다 김추자의 경우는 비슷하게 비음이 두드러지고 카랑카랑하긴 해도 좀더 대중 친화적인 면이 두드러졌음에 비해, 김정미는 ‘대중’보다는 ‘신중현’에 보다 충실했던 것 같다. 즉 인기보다는 신중현의 음악 세계를 제대로 구현해 내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던 듯 보인다는 말이다.

[바람](1973)은 [Now](1973)와 함께 김정미 명반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음반이다. 그런데 이 두 음반은 서로 겹치는 곡이 많다. “바람”, “비가 오네”, “아름다운 강산”, “불어라 봄바람”, “나도 몰래”, “당신의 꿈”, “고독한 마음”이 두 음반에 다같이 등장한다. 음원 또한 동일하다. 세션은 신중현과 더 맨, 또는 엽전들 초기 멤버들이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멤버는 신중현(기타), 이남이(베이스), 문영배(드럼), 김기표(키보드), 그리고 손학래(금관악기) 등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강산”에는 굳이 “THE MEN 노래”로 명기 되어있는 것이 이채롭다(사실 더 맨과 엽전들의 멤버 차이는 거의 없음).

연주 상에서 보면 내추럴 톤의 전기 기타 반주가 주도를 이루고 있다. 별다른 이펙트가 들어가지 않고 드라이빙감이 강한 기타 사운드는 오히려 ‘싸이키델릭’한 효과를 창출하는데, 제퍼슨 에어플레인으로 대표되는 샌프란시스코 싸이키델릭 록에 보다 가까운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바람”, “불어라 봄바람”, “어디서 어디까지” 등이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 “추억”, “나도 몰래”, “당신의 꿈”, “마음은 곱다오” 등은 이미 김추자가 완성시켜 놓은 ‘신중현식 가요’의 전형들이다. 즉, 한국적인 정서가 유난히 강한 노랫말, 때로는 비장감이 넘치거나 아니면 해학적인 분위기를 구현하는 멜로디와 보컬이 두드러진 노래들이다. 마지막 곡 “고독한 마음”은 많은 이들이 [바람] 음반의 백미로 꼽는 곡인데, 다른 트랙들에 비해 블루지한 느낌이 유난히 강하고 김정미의 곡 장악력 또한 두드러지기 때문인 듯 싶다. 다른 노래들에 비해, 감정이 고양되어도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특색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음반은 당시 신중현을 사로잡던 화두, 즉 서구의 음악 양식을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환골탈태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과도기적 고민이 엿보인다. 즉, 문제 제기의 소재는 나열되어 있지만 ‘융합’의 단계로까지는 아직 나가지 않은 듯 싶으며, 그 완성은 신중현과 엽전들의 음반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바람]은 보컬리스트로서 김정미의 출중한 재능과 더불어, 신중현 음악 세계의 당시 상황까지도 부족하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20020725 | 오공훈 aura508@unitel.co.kr

8/10

* 여담 & 독백1: 김정미나 김추자나 사실 ‘오버그라운드’ 지향의 가수가 아니었던가? 이들을 ‘싸이키’ 가수라 한다면, ‘고고 클럽’이나 밤무대에서 활동한 흔적을 보여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음. 주요 활동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함. 공연 활동도 시민회관 등 ‘주류 스테이지’에서의 리사이틀 형식이었음. 이 공연에서도 과연 신중현 사단(더 맨)이 ‘반주’를 맡아 주었는지는 의문. 김추자의 경우는 이미, 신중현과 거리를 두는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함. 김정미는 신중현을 떠나게 되면서 곧바로 하락. 그리고 이들은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이 과연 있었는지? [바람] 또한 그동안 수집가들의 ‘희귀판’으로서의 대접으로 인해 ‘과대평가’된 것 아닌지? ‘신중현 싸이키 사운드의 결정판’이라기라기보다는, 그냥 ‘잘 만든 가요 음반’이 본질이 아닐 것인지?? 여기서 ‘한국적 싸이키 사운드’의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봄.

* 여담 & 독백 2: 한국의 싸이키 – 영미 록 음악에서의 “Psychedelic Rock”이 아니라, 고고장 천장에 달린 ‘조명 기구’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만약 맞다면 한국적 싸이키 사운드는 ‘고고장’에서 춤추기에 좋도록 연주된 ‘댄스 음악’의 일종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며, 이러한 전제가 적용된다면, ‘고고 뮤직’과는 거리가 먼 ‘주류 가요’의 외양을 갖춘 김정미나 김추자는 ‘싸이키 음악’이 될 수 없음.

* 여담 & 독백3: 그렇다면 김정미의 음반에서 드러나는 ‘신중현 사운드’의 본질은 무엇인지? 여기서 신중현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구현했다기보다는, ‘기획 상품’으로서 김정미를 띄워주기 위한 ‘백그라운드’의 위치에 머무른 것으로 사료됨.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바람]이나 [Now]의 연주 스타일은 신중현이 자신의 밴드(들)와 함께 내놓은 음반의 사운드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즉, 가수의 노래를 효과적으로 받쳐주기 위한, ‘반주’인 것. 절제된 내추럴 톤의 기타 연주는 이러한 상황을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김추자의 뒤를 이어 ‘스타를 키워보자는’ 의도로 김정미를 내세운 것으로 사료됨. 오늘날 김정미가 ‘전설’의 위치에 등극한 것은 세월의 흐름으로 인한 신화의 생성. 특히 오늘날 신중현을 둘러싼 평가와 담론이 ‘신성불가침’한 절대 우위를 확보하고, 더구나 신중현 선생이 직접(‘친히’) 김정미를 높게 ‘평가’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는 신비화되었다고 봄. 관련 중고 LP가 희귀하고 가격도 엄청 높아진 ‘경제적’ 과열 효과 또한 이런 상황에 결정타를 이룸.

* 여담 & 독백의 결론 : 김정미는 갔지만 (신중현과) 더 맨(후에 엽전들로 계승)은 살아 남았다.

수록곡
1. 바람
2. 추억
3. 비가 오네
4. 아름다운 강산
5. 불어라 봄바람
6. 어디서 어디까지
7. 나도 몰래
8. 당신의 꿈
9. 마음은 곱다오
10. 고독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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