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2년 7월 26일
장소: 삼성 종합운동장 야외 무대
출연진: Red Hot Chilli Peppers, Jane’s Addiction, 크라잉 넛, 레이지 본, 윤도현

 

20020818015933-info퇴근하자 마자 부랴부랴 삼성동 종합 운동장으로 달려가니, 윤도현밴드의 “아리랑”이 멀리서 들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고, 형태가 뚜렷하고, 색깔이 촌스러운 무지개가 두 개 떠있었다. 비는 오지 않겠군, 생각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야외 공연장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펜스가 남북을 가르고 있었다. 선착한 사람들에게만 입장 확인 팔찌에 빨간 줄을 그어주고, 그들에게만 무대와 가까운 쪽 울타리 안에 입장시켜 주는 것이었다. 록 밴드의 공연을 꽤나 심심하게 보게 되었다는 실망감과 함께, 이럴 줄 알았으면 돗자리라도 가져올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무대 세팅을 기다리며 앉아 있다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 무대 위로 웬 살덩이가 보이더니, 사진으로만 봐왔던 웃통 벗은 데이브 나바로(Dave Navarro)와 깃털 모자와 흰 슈트로 멋을 부린 페리 페럴(Perry Farrell)이 등장함과 동시에 제인스 어딕션(Jane’s Addiction)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본 공연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수를 과장하지 않더라도 반수 정도는 푸른 눈의 외국인들이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그 중 주한 미군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제일 많았는데, 제인스 어딕션과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가 해외 파병 미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위문공연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20020819022552-0416oneday_janes두둥두둥하는 베이스 소리와 함께 [Nothing’s Shocking] 앨범의 수록곡 “Up The Beach”로 ‘One Hot Day’ 공연의 본편이 시작되었다. [Ritual de lo Habitual]과 [Nothing’s Shocking] 앨범을 중심으로 선곡되었는데, 실제 앨범에서보다 다이나믹한 감이 떨어지고, 싸이키델릭하기보다는 하드한 느낌을 많이 주었다. 그러나 데이브 나바로의 연주와 페리 페럴의 목소리는 결코 녹이 슬었다거나 노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쉽게도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흥겨운 공연만을 머리 속에 그리고 온 보이는 청중들은 흐느적거리는 음악에 적응을 하기 힘든지 썰렁한 반응을 보였다.

데이브 나바로는 무뚝뚝하게 기타만 쳤으나 페리 페럴은 그리 넓지 않은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며, 공연 내내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함을 보였다. 게이라는 성적 정체성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그의 몸놀림이나 무대 매너는 섹시한 여성 로커의 무대 매너와 비슷했다. 하지만 빈번하게 연출되는 느끼한 엉덩이 춤은 중년 아저씨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과 조합이 잘 되지 않아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 봐야 했다.

[Nothing’s Shocking] 앨범 수록곡 “Summertime Rolls”와 “Mountain Song”을 부르고 난 뒤 제인스 어딕션은 퇴장했다. 관중들이 앵콜을 부르거나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다시 등장하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공연이 끝난 것이었다. 약간 공연이 썰렁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페리 페럴이 웃통을 벗고 다시 나타났고, 통기타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명곡 “Jane Says”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긴 곡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데이브 나바로의 연주와 페리 페럴의 리드로 인해 이날 제인스 어딕션의 연주 중 가장 압권이었다. 우리 나라 중장년을 위한 공연의 엔딩송으로 “쾌지나 칭칭 나네”가 있다면 제인스 어딕션의 엔딩송은 단연코 “Jane Says”가 아닐까.

제인스 어딕션의 공연이 끝나고 밤 10시가 거의 다 되어, 전기톱으로 나무를 베는 듯한 다이나믹한 베이스 소리가 들리더니 새 앨범 [By The Way]의 “By The Way”와 함께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멤버들의 얼굴이 좀 더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 말고는 뮤직 비디오에서 보았던 똑 같은 외모로 나타났다. 역시나 뮤직 비디오에서 보던 대로 베이스의 플리(Flea)가 가장 요란하게 몸을 움직이며 연주를 하였고, 존 프루시안테(John Frusciante)는 별 미동도 않고 조용히 기타만 쳤다.

역시 밴드의 인지도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Scar Tissue”나 “Otherside”처럼 잘 알려진 곡이 연주되면 관중들은 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관중의 반 정도가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간중간에 “Show Me Your Dick!”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밴드가 공연 중간에 옷을 벗을 거라는 기대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관중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One Hot Day’라는 공연 제목이 무색할 만큼 날씨도 썰렁했다(그 다음날 신문을 보니 예상치 않게 레이지 본의 한 멤버가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대신 옷을 벗어 보이는 과잉 친절을 보였다고 한다).

공연의 믹싱이 안정되어 있어서 어느 한 악기나 보컬이 두드러지게 들리는 현상도 없었고, 밴드의 연주도 정교함과 라이브의 즉흥성 사이에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것은 역시 다이나믹하고 재치 있는 플리의 베이스 연주였다.

SS-01공연이 절반 가량 진행되었을 즈음, 보컬 앤써니 키디스(Anthony Kiedis)가 손을 앞으로 뻗더니 “대한민국~”을 외쳤다. 청중들이 즐거워하고 대한민국 박수를 치며 화답했는데, 아쉽게도 안써니 키디스와 청중들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아서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했다. 본인도 상당히 머쓱한 듯했다. 계속해서 밴드는 [By The Way]와 [Californication], [Blood, Sugar, Sex, Magik] 수록곡을 중심으로 신나는 곡과 느린 곡을 번갈아 가면서 연주하였다. 밴드와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라는 이유로, 다른 청중들과 부대끼거나 몸싸움을 하지 않아서 공연 자체에 집중을 할 수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타이트하기보다는 느슨한 느낌이 드는 공연이었다. 밴드의 연주는 결코 무성의하지 않았고 훌륭했으나 플리와 앤써니 키디스의 춤은 흥에 겨워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청중들을 위한 마지못한 배려처럼 보였다.

마지막 곡으로 사람들이 그토록 고대하였던 “Give It Away”가 드디어 연주되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얌전하게 있던 뒤쪽 사람들도 신나게 몸을 흔들어 댔다. 정신 없이 흔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니, 마치 이 곡을 위해서 티켓을 산 것만 같았다. 퇴장-앵콜-다시 입장이라는 다소 지겨운 순서를 거쳐 플리가 물구나무를 선 채 다시 무대로 나타났다. 이들의 대표곡인“Under The Bridge”와 접속곡 “Me And My Friends”를 끝으로 이날의 공연은 끝이 났다.

앞자리에서 공연을 보았던 동생 1은 매우 재미있게 공연을 즐겼다고 했고, 나와 같이 뒷자리에서 공연을 보았던 동생 2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연주가 너무 미니멀해서 앨범에서 느끼던 화려함이 살아나지 않았다고 했다. 롤라팔루자(Lollapalooza) 페스티벌을 기획했던 페리 페럴이기에 오늘 공연도 기획적으로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밴드의 연주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 심심했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데이브 나바로와 존 프루시안테가 같이 연주하는 “Coffee Shop”을 듣고 싶었는데, 이것 역시 부족한 상상력에서 나온 빈약한 기획인가?

물론 나 역시 레드 핫 칠리 페퍼의 공연을 위해서 온 것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기대하고 상상한 이상의 것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아 결론이 예상되는 헐리우드 영화 같았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보다는, 관중들에 대한 성실함과 열성이 돋보였고 연주자체를 즐기는 듯이 보였던 제인스 어딕션의 공연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라이브는 앞자리에서 봐야겠다는 생각과, 허리가 아파서 다시는 스탠딩 공연은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플리는 다음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관중석의 반도 차지 않은 공연장을 보고 차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30대 이상이 주요 타깃이 되는, 팻 메쓰니(Pat Metheny)나 스콜피언즈(Scorpions) 등의 공연은 쉽게 매진이 된다는 동생 2의 말을 들으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1999년, 인천의 수중 페스티벌 ‘트라이포트 99’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면 해외 록 밴드의 내한공연의 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불가능한 현실의 가정법 과거이지만… 20020812 | 이정남 yaaah@dreamwiz.com

 

* 사진제공: 쌈넷(http://www.ssam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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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Red Hot Chili Peppers 공식 사이트
http://www.redhotchilipeppers.com/
Red Hot Chili Peppers 팬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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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s Addiction 팬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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