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12014350-yoshimiFlaming Lips – Yoshimi Battles The Pink Robots – Warner Bros, 2002

 

 

모더니즘 아트 팝

우리의 희망 요시미. 도시를 파괴하도록 프로그램된, 다리가 열 개인 사악한 핑크 로봇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공수도 검은띠에 “핫! 핫!”하는 기합을 넣으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녀뿐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연정을 품게 된 로봇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요시미에게 결국 지고 만다. 가엾은 핑크 로봇. 가엾은 요시미. 첫사랑을 그렇게 만들어버리다니.

바보같다고 해도 좋지만 만약 플레이밍 립스, 그들을 인터뷰할 수 있다면 꼭 묻고 싶다. “One More Robot/Sympathy 3000-21″의 끝부분에 나오는 신서사이저의 구슬픈 웅웅거림과 오케스트라 선율은 혹 197, 80년대 TV용 저패니메이션의 배경음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부분은 예정된 패배를 향해 저녁 노을 쪽으로 뒤뚱거리며 나아가는 핑크 로봇의 뒷모습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지? 미야자와 겐지가 쓴 SF 같은 요시미와 핑크 로봇의 귀엽고 슬픈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플레이밍 립스의 신보는 전작 [The Soft Bulletin](1999)과 어쩔 수 없이 비교된다. 그 음반이 후퇴(복고적인 사운드 프로듀싱과 그만큼이나 복고적인 멜로디)를 통한 전진(기이하면서도 친숙한, 새로운 음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그것이 이 음반에서 좀 더 ‘쿨’하게 재현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페이스 록 풍의 아날로그 신서사이저, 프로그래밍된 퍽퍽한 드럼 비트, 어쿠스틱 기타, 각종 샘플링, 반짝거리는 퍼커션, 묘한 효과음들, 전처럼 두드러지진 않지만 내내 뒤를 받쳐주는 오케스트라는 전작처럼 사운드의 벽을 두텁게 쌓아올리는 대신 깔끔하게 얽히고 설키며, 그러다 때로는 살짝 어그러진다. 그리고 그 위에 웨인 코인(Wayne Coyne)이 흥얼거리는 순도 높은 팝 멜로디와 애어른 같은 가사가(이를테면 “사랑은 무엇이고 증오는 무엇이며 그게 문제될 건 또 뭐지?”나 “인생은 빨리 지나가고 좋은 것은 오래 남아있기 힘들어” 같은) 고전적인 구성을 따라 얹혀진다. 다시 말해 아날로그 일렉트로니카와 디지털 어쿠스틱이 아트 록과 함께 만화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전작들에서 종종 보여준 좌충우돌의 실험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명확한 자의식을 갖게 된 장인들의 숙련된 솜씨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고, 그래서 다다(Dada)라기보다는 모더니즘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이들이 밴드 생활 20년만에 드디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다’는 식의 평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음반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고 중간에서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내용을 따라 구분해 본 것이다. 라디오헤드의 “Airbag”을 연상시키는 “Flight Test”는 상큼하고 캐치(catchy)한 더할 나위 없는 출발이고, 여기서부터 “In The Morning of the Magicians”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트랙들은 음반 속의 작은 컨셉트 음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21세기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EP이며 그게 아니면 5부 구성을 갖춘 하나의 ‘대곡’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감정을 갖게 된 로봇에 대한 애가(哀歌) “One More Robot/Sympathy 3000-21”, 경쾌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와 보글거리는 신서사이저 효과음 위에서 단순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풀어내는 “Yoshimi Battles the Pink Robots Pt.1”, 마침내 나타난 핑크 로봇과 요시미의 사투를 일렉트로닉 노이즈의 해일 속에서 (‘실험적’이라 부르는 방식으로) 표현한 “Pt.2”, 가사에서 사운드까지 1970년대 아트 록의 정취를 가득 담은 “In The Morning of the Magicians”가 들어 있다. 과거와 과거가 만나 이루어낸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그들의 시도는 여기서 일단 마무리된다.

음반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아트 록 스타일의 접근법이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사운드는 조금씩 깊어지고 오케스트레이션의 활용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며 신서사이저는 점점 더 몽롱해진다. 가사는 인생과 자연, 자아 성찰에 대한 동화처럼 단순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리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건만 그러기 전에 곡들이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사멸한 줄만 알았던 스타일에 대한 추억을 지금 바로 여기서 넌지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특히 아련하고 장엄하게(하지만 때로 늘어진 테이프처럼 짓눌리며) 울려퍼지는 합창과 맞물린 힙합 비트가 성층권에 머물러 있는 스피리추얼라이즈드(Spiritualized)처럼 들리는 “Are You A Hypnotist??”에서부터, 영롱한 종소리와 맑은 기타 스트러밍을 배경으로 당연하지만 슬픈 진실을 노래하는(“당신이 아는 모든 이는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Do You Realize??”에 이르는 순간은 음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일 것이다. 그렇다. 동화란 실은 냉혹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지만 그는 잊지 않고 있다.

음반 커버에는 일본어로 “플레이밍 립스는 당신이 인생과 이 레코드를 ‘엔조이’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씌어 있다(속지에 있는 일본어는 “Do You Realize??”의 가사 일부이다). 이 말의 뜻을 알기 전에도 나는 이미 (인생은 모르겠지만) 이 음반만큼은 ‘엔조이’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것은 정말 행복한(때로는 슬플 만큼 행복한) 음반이다. [Yoshimi Battles The Pink Robots]는, 설사 전작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전작에 비견할 만큼 탄탄하게 조직되었으며, 또 그만큼이나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경험을 안겨준다. 청자는 이 음반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고, 그들이 들려주길 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다. 그건 여러분이 인생과 이 레코드를 얼마나 ‘엔조이’하는가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니 청하건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음을” 믿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 이 음반의 제목은 올해 최고의 제목이 될 공산이 크다. 요시미와 핑크 로봇이 대결하다니, 세상에. 20020802 | 최민우 eidos4@freechal.com

8/10

수록곡
1. Fight Test
2. One More Robot/Sympathy 3000-21
3. Yoshimi Battles the Pink Robots Pt.1
4. Yoshimi Battles the Pink Robots Pt.2
5. In The Morning of the Magicians
6. Ego Tripping at the Gates of Hell
7. Are You A Hypnotist??
8. It’s Summertime
9. Do You Realize??
10. All We Have Is Now
11. Approaching Pavonis Mons By Balloon (Utopia Plani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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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플레이밍 립스 공식 사이트
http://www.flaminglips.com
플레이밍 립스 팬 사이트
http://www.geocities.com/SoHo/Lofts/4533/flips/
http://janecek.com/flaminglips1.html
Mr Kite’s Lips Page
http://members.tripod.com/~Mrkite1967/
플레이밍 립스의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는 곳
http://launch.yahoo.com/artist/videos.html?artistID=1009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