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726030630-rarumKeith Jarrett – :rarum I: Selected Recordings – ECM, 2002

 

 

ECM 간판 스타의 통사적 기획물

2002년 5월, ECM은 새로운 기획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라룸(:rarum)’이라 불리는 시리즈로, 레이블의 소속되어 있거나 아니면 예전에 있었던 뮤지션들의 주요곡 및 미발표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이다. 물론 ECM과 연을 맺은 아티스트 전부가 대상에 오른 건 아니고, 나름대로 국제적인 지명도와 인기를 갖춘 ‘스타’들에 한정되었다. 라룸 시리즈의 1차분으로 8명의 아티스트의 음반이 발매되었다. 음반은 ECM 특유의 품위있는 디지팩의 모양새로 나왔다. 낱개로도, 여덟 장의 음반을 한꺼번에 모은 한정판 박스 세트로도 발매가 되었다.

박스 세트의 디자인에서 이미 눈치챌 수 있듯, 라룸 시리즈의 첫 번째 영광을 안은 이는 키쓰 재릿(Keith Jarret)이다(박스 세트 패키지는 키쓰 재릿의 [At The Blue Note](1994)와 판박이다). 그에 대한 ECM 측의 예우가 얼마나 극진한지 명백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키쓰 재릿은 ECM 초기부터 지금까지 레이블과 동고동락해 온 인물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ECM 레이블의 명망을 드높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스타들인 칙 코리아(Chick Corea), 아트 앙상블 오브 시카고(Art Ensemble Of Chicago), 팻 메쓰니(Pat Metheny), 빌 프리셀(Bill Frisell) 등은 오래 전 다른 레이블로 떠나간 상태다. 칼라 블레이(Carla Bley)와 얀 가바렉(Jan Garbarek)은 현재 음반 활동이 중단된 상황이고, 존 애버크롬비(John Abercrombie)가 라룸 시리즈에 (아직까지는) 포함되지 않은 것은 뭔가 수상쩍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여러모로 보아 ECM의 과거/현재/미래를 대표하는 으뜸 간판 주자는 아무래도 키쓰 재릿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키쓰 재릿이 ECM에서 내놓은 방대한 음반들은, ECM이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고수해 오고 있는 모토, 즉 “다양한 실험을 바탕으로 한 품격있는 유러피언 스타일의 현대 음악(ECM이 ‘Edition(s) Of Contemporary Music’을 줄인 약자임에 유의)”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번에 나온 [:rarum I: Selected Recordings]를 들어보면 한 순간에 드러난다. 바로크 스타일의 정통 클래식부터, 뉴 에이지 풍의 명상을 불러 일으키는 독창적인 피아노 솔로와 현대 음악의 첨단을 달리는 난해한 실험 연주, 그리고 이지 리스닝 팝 재즈와, 개인기와 인터플레이의 완벽한 조화의 극한대를 이루는 정통 스탠더드 재즈 레퍼토리까지, 키쓰 재릿(과 그의 동료들)의 음악 여정은 쉽게 끝을 가늠하기 어렵게 종횡무진 한다. 물론 이러한 맹활약은 ‘연대기순’이라는 통사적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란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근 그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또한 그나마 있는 활동도 스탠더드 재즈 트리오 연주에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 상황’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비단 키쓰 재릿 뿐만 아니라 ECM에도 해당되는 사항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선 라룸 시리즈를 내놓은 배경부터가 다분히 ‘상업적’이다. 이 시리즈는 과연 ECM을 처음 접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ECM의 음반이라면 무조건 손을 뻗치고 보는 애호가들을 위한 팬 서비스일까? ECM 시절 키쓰 재릿의 음반을 거의 다 갖추고 있음에도 이 ‘베스트 음반’을 구입하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나의 경우로 보아, 아무래도 후자 쪽에 무게가 더 실린다. 물론 블루 노트(Blue Note)나 버브(Verve), 컬럼비아(Columbia), 또는 임펄스(Impulse!) 등 미국 중심의 재즈 명가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ECM의 독창적인 행보를, 대형 기획물의 형태로 스스로 기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이단’으로 취급받는 오명을 겪기도 했지만, ECM(또는 창립자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가 표방하는 북유럽 중심의 현대 음악적 어프로치는, 분명 어느 순간부터 한계에 다다랐다고 여겨졌던 재즈에 새로운 돌파구(비록 이것이 ‘주류’의 영역에 다다르지는 못하더라도)를 보여주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여기엔 함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ECM이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음악 세계는, 사실 북유럽 클래식 음악의 연장선상 위에 상정되었던 것이다. 비좁고 후끈한 지하 클럽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즉흥 연주에 몰입하는 흑인 중심의 (전통적인) 미국 재즈와는 달리, ECM의 재즈는 정장을 입은 유럽 거주 백인들이 오페라 하우스에서 단정한 자세로 앉아 심각하게 감상하는 ‘현대 음악’인 것이다. 실제로 ECM은 재즈 외에도 현대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음반을 지속적으로 내놓았으며, 소속 아티스트의 상당수는 북유럽 출신이다. 키쓰 재릿을 중심으로 한 ECM에 몸담은 ‘미국인’ 재즈 뮤지션의 경우, 이들 대부분이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사이드맨 출신(그것도 온갖 실험이 횡횡하던 [In A Silent Way](1969)와 [Bitches Brew](1969) 시절)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미국의 음악’인 재즈를 당당히 유럽의 클래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끔 ‘끌어올려야’ 한다는 어떤 소명 의식이 이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창기 키쓰 재릿과 칙 코리아가 유독 클래시컬한 피아노 솔로 연주(여기서 재즈와의 연계성은 ‘즉흥 연주’라는 점밖에 없다)에 곧잘 몰두했던 것도 이러한 의지의 발로가 아닐지? 여하튼 반항과 울분을 모태로 하여 자라난 재즈의 존재성을 벗어나 유럽 고전 음악에 젖줄을 대고 있는 ECM의 음악은, ‘실험’과 ‘보수’라는 극히 상반되는 두 요소를 동시에 품는 모순을 내재한 채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라룸 시리즈를 들으며 뮤지션 개개인의 찬란한 업적을 마음껏 즐기는 대신, ECM이라는 ‘돌출 집단’의 존재 의의와 위상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 보는 것은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물론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21세기 초 재즈 음악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데 빠뜨려서는 절대 안될 행위가 될 것이다. 20020721 | 오공훈 aura508@unitel.co.kr

7/10

수록곡
CD 1
1. Book Of Ways 18
2. Book Of Ways 12
3. Book Of Ways 14
4. Heartland
5. Spirits 16
6. Spirits 20
7. Spirits 2
8. Spirits 13
9. Spirits 25
10. Spheres (7th Movement)
11. The Windup
12. ‘Long As You Know You’re Living Yours
13. My Song
14. The Journey Home

CD 2
1. Recitative
2. Americana
3. Invocations (First, Solo Voice)
4. Invocations (Fifth, Recognition)
5. Munich Concert, Pt IV
6. Late Night Willie
7. The Cure
8. Bop-Be
9. No Lonely Nights
10. Hymn Of Remembrance

관련 글
Keith Jarrett, Gary Peacock, Jack DeJohnette [Inside Out] 리뷰 – vol.3/no.23 [20011201]

관련 사이트
Keith Jarrett 공식 사이트
http://www.keithjarrett.net
ECM 레이블의 Keith Jarrett 페이지
http://www.ecmrecords.com/ecm/artists/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