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es – Highly Evolved – Heavenly, 2002 비틀즈와 너바나의 물리적 결합 “예예예스(Yeah Yeah Yeahs)가 2002년의 화이트 스트라이프스(The White Stripes)라면 바인스(The Vines)는 2002년의 스트록스(The Strokes)다.” 영국의 언론이 혹시라도 ‘2002년의 마스터플랜’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와 같은 내용이 담겨있을 것이다. 음모이론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스트록스와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를 통해 2001년 한 해를 짜릿하게 보낸 그들이 2002년에도 같은 것을 시도하리라는 것은 그리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굳이 예예예스와 바인스가 아니더라도 영국 미디어는 어떻게든 2002년의 집중육성대상 밴드를 만들어내고야 말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두 밴드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놀라운 성공은 사실 이러한 시기적 조건을 빼놓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EP 하나만을 발표한 예예예스의 경우는 아직 좀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최근에 데뷔 앨범을 출반한 바인스의 열기는 예상대로 가히 폭발적이다. 주요 저널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이들의 데뷔 앨범에 극찬을 쏟아내고 있고, 라디오에서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이들의 노래를 틀어대고 있다. 그 결과 앨범 [Highly Evolved]는 발매 첫 주에 영국 앨범차트 3위에 입성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영화 [I Am Sam]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I’m Only Sleeping”을 통해 이미 한국에도 소개되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바인스라는 밴드의 존재에 관심을 표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들이 올해의 가장 뜨거운 신인으로 혜성같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초에 발표한 싱글 “Highly Evolved”를 통해서였다. 신인 그룹으로서의 힘과 열정과 재능과 패기를 모두 끌어 모아 90초라는 시간 안에 밀도 있게 담아낸 이 곡은 새로운 ‘물건’을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영국의 음악계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이 곡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싱글이다. 단순 명쾌한 멜로디에 활기찬 사운드, 여기에 스트록스를 연상케 하는 자신감 넘치고 쿨한 태도까지 록 저널리즘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 한 곡에 농축되어 있었다. 이 곡을 통해 바인스는 여러 매체로부터 ‘비틀즈(The Beatles)와 너바나(Nirvana)의 결합’이라는 평판을 이끌어냈다. 너바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일부에서 ‘비틀즈와 섹스 피스톨즈(The Sex Pistols)의 결합’으로 평가했던 것을 상기하면, 10년 후쯤 ‘비틀즈와 바인스의 결합’으로 묘사되는 그룹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듯하다. 사실 너바나의 직접 후예인 포스트 그런지 밴드들이 아직도 차트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너바나에 영향받았음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전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너바나의 유산을 계승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계승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포스트 그런지 밴드들이 [Nevermind]와 [In Utero]의 음울하고 무거운 측면을 집중적으로 차용해 기교적이고 감상적인 하드 록으로 뒤바꿔 놓는데 비해 이들은 [Bleach]의 날카롭고 좌충우돌하는 너바나를 되살려 포스트 그런지의 도식성에서 크게 벗어난 개성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절규하고 때려부수고 마음껏 분노를 발산하면서도 감상주의가 철저히 배제된 이들의 음악은 너바나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밝고 낙관적인 정서마저 담고 있다. 이들 음악의 이러한 특성은 어쩌면 햇살 가득한 시드니에서 성장하여 LA로 활동무대를 옮긴 이들의 내력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그런지의 우울을 넘어 싸이키델릭의 환희에까지 폭 넓게 닿아있는 이들의 음악적 취향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비틀즈와 너바나가 바인스의 음악을 판단하는 가장 손쉬운 준거점이기는 하지만 이 앨범의 내용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앨범의 수록곡 중 절반에 해당하는 여섯 곡은 비틀즈나 너바나와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 곡들에 대해서는 보통 싸이키델릭이라는 범주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분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바인스의 싸이키델릭이 1960년대의 원초적이고 헝클어진 싸이키델릭이라기 보다 1970년대 초의 가지런히 정돈된 싸이키델릭이라는 점은 부연될 필요가 있다. 여러 논평에서 싸이키델릭 발라드로 언급되는 “Autumn Shade”, “Homesick”, “Country Yard”, “Mary Jane” 같은 곡들은 실제로 대니 커완(Danny Kirwan), 밥 웰치(Bob Welch), 크리스틴 맥비(Christine McVie) 등이 활약하던 1970년대 초의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 사운드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플리트우드 맥과 너바나라는 전혀 이질적인 두 음악을 어떻게 단일한 비전 속에서 녹여낼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아직까지 이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때문에 이 두 종류의 음악은 앨범 안에서 다소 불편한 동거관계를 노출한다. 이 앨범의 음악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비틀즈+너바나’ 공식이 유독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이 앨범의 음악적 성패가 바로 이 결합에 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된 “Highly Evolved” 외에도 스카 리듬이 가미된 “Factory”와 경쾌한 멜로디의 “Ain’t No Room”은 이러한 특성을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곡들로, 이 앨범의 근간을 형성하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여기서 추구하는 결합이 화학적 결합이라기보다는 물리적 결합에 가깝다는 점이다. 비틀즈와 너바나의 음악을 반반씩 붙여놓은 듯한 곡(“Factory”)이 있는가 하면 비틀즈적 음악에 너바나적 요소들이 장식으로 삽입된 곡(“Ain’t No Room”)도 있다. 언뜻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막상 완성된 음악을 들어보면 그 조합의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좀 다른 취향의 곡들, 즉 ‘너바나 리바이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너바나 사운드를 빼다 박은 트랙들(“Outtathaway”, “Get free”, “In The Jungle”)이나 앞서 언급된 플리트우드 맥 풍의 ‘싸이키델릭 발라드’는 상대적으로 좀 약하게 느껴진다. 전자의 경우 “Get Free”, 후자의 경우는 “Country Yard” 정도만이 성공적인 곡들로 꼽힐 수 있을 듯 하다. [Highly Evolved]가 훌륭한 앨범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영국 언론의 호들갑을 보고 있으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가 이 앨범에서 목도하는 것은 성장과정에 있는 한 재능 있는 록 밴드다. 이들의 뛰어난 잠재력과 활달한 기상은 경탄할 만하지만 아직 최고의 밴드로 불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 앨범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의도는 없지만 이 점에서 이 앨범을 마스터피스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좀 성급하다는 느낌이다. 바인스는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 할 그룹이다. 최근 일고 있는 분에 넘치는 띄워주기는 이들 자신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열기가 사그러들고 나면 이들은 당장 후속작에 대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들의 후속작이 혹시라도 현재의 비현실적으로 높아진 기대수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자신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매체들에 의해 순식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제 막 데뷔 앨범을 내놓은 밴드에게 무슨 초치는 소리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재능 있는 젊은 음악인들이 채 피기도 전에 무너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오늘의 현실에서 이는 안타깝지만 너무나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다. 20020715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6/10 * 업데이트: 이 리뷰를 쓴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바인스의 앨범은 한 주만에 차트 19위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오아시스의 [Heathen Chemistry]가 평단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한순간의 홍보공세만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수록곡 1. Highly Evolved 2. Autumn Shade 3. Outtathaway 4. Sunshinin’ 5. Homesick 6. Get Free 7. Country Yard 8. Factory 9. In The Jungle 10. Mary Jane 11. Ain’t No Room 12. 1969 관련 사이트 The Vines 공식 사이트 http://www.thevines.com The Vines 비공식 사이트 http://highlyevolved.tripod.com http://www.the-vin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