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폭력/괴기/공포 영화 및 비디오 게임에 항상 목말라하는 미국 백인 교외 10대 청소년들의 우상이 매릴린 맨슨으로부터 에미넴으로 옮겨온 2000년대 초, 이제 얘네들 살갗에 소름이라도 약간 돋게 만들기란 웬만한 걸 가지고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즘 한국 상황도 ‘엽기적’이라는 말의 기상천외하리만치 극단적인 어의전성에 비추어 본다면 그렇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어느 정도의 공포/엽기를 즐기는 문화는 아마도 태곳적부터 있었을 거라고 추측될 만큼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정도를 둘러싸고는 어느 사회 내부에나 도덕적 전선이 그어져 있다.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건, 사회정치적 보수파들은 백이면 백이 도덕적 전선에서도 이른바 보수진영에 서지만(물론 거기 속한 각자가 얼마만큼 자기들의 도덕적 기준을 준수하는가는 전혀 별개 문제다), 정치적으로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태도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늘 기존의 허용치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려(영어식 표현으로는 ‘push the envelope’) 하는 이들은 종종 퇴폐주의자(decadent)로 낙인찍혀 보수/진보로부터 공히 배척 당하기도 한다. 그게 순전히 퇴폐인지, 아니면 좋게 말해 ‘예술적 표현영역의 확장’인지, 또 아니면 좀더 강도 높은 자극을 통해서만 대중으로부터 이윤을 울궈낼 수 있다는 상업적 호구지책인지는 경우에 따라 달리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당대에 쉽사리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에미넴의 작품들에 대한 이런 저런 미국 내 평자들의 반응은 그런 고심을 잘 드러내 주는데, 그에 비해 이젠 웃음거리로 전락한 매릴린 맨슨에 관해서는 이미 판결이 나도 한참 전에 난 듯하다. 허나 누가 알리요, 몇 년 뒤면 약발 다한 에미넴이 바로 지금 맨슨의 꼴을 재연하고 있을지. 바로 그런 게 대중음악계에서의 덧없는 인기라는 걸. 그러나 지금은 그런 얘기를 길게 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제목에서 언급했다시피 나를 섬칫하게 만든 노래들 중에는 방금 예로 들은 에미넴처럼 ‘엽기적인’ 소재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들도 물론 있다. 그런 상상적인 대리체험이야말로 공포를 유발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일 테니까. 하지만 다른 몇몇은 그 현실성 덕택에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는데, 부연하자면 실제적 경험이나 습득한 역사적 사실을 독특한 방식으로 환기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공포감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방식은 인간 심성의 밑바닥에 깔린 원초적인 두려움을 건드리는 건데, 그건 대개 종교나 초자연적인 믿음 따위와 관련이 있다. 신이라면 우선 콧방귀부터 뀌고 보는 나 같은 치에게도 이런 두려움은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게 마련, 그렇지 않다면 그 허구헌 귀신, 흡혈귀, 악마 따위의 이야기가 여전히 공포물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더 이상의 딱딱한 얘기로 여름을 더 덥게 만들기 전에, 이제 여기 다섯 곡의 노래를 그 섬칫함의 강도(强度) 순으로 소개할까 한다. 선곡 자체는 물론이요 이런 순위매김 또한 말 그대로 주관적일 뿐이므로, 생각보다 덜 오싹했더라도 크게 실망 마시길 바란다. 음악과 더불어 각 노래의 가사 일부를 발췌했는데, 전곡 가사가 궁금하면 맨 아래 적어놓은 관련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 이제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자.

5. Nick Cave & The Bad Seeds, “The Kindness Of Strangers” from [Murder Ballads](1996)

기대감과 외로움에 그녀는 방안을 가로질러
앞문에 걸린 빗장을 풀었다네
오 가엾은 메리 벨로즈
다음날 사람들은 침대에 손이 묶이고 입엔 재갈물린 채
머릿속에 총알 박힌 그녀를 보았네
오 가엾은 메리 벨로즈

In hope and loneliness she crossed the floor
And undid the latch on the front door
O poor Mary Bellows
They found her the next day cuffed to the bed
A rag in her mouth and a bullet in her head
O poor Mary Bellows

괴기가 온몸에서 뚝뚝 흘러 넘치는 닉 케이브를 빼놓는다면 납량특집은 왠지 허전해질 터이다. 어두컴컴한 배경에 붉은 빛을 띤 횃불식 조명을 군데군데 박아놓은 무대 위에서, 과장된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마치 신들린 설교자처럼 노래하는 그의 공연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 의식과도 같다. 게다가 앨범 자체가 살인을 주제로 다룬 거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여러 엽기적인 곡들 중 하필 이 노래를 고른 이유는, 느리고 어눌한 발라드가 가사의 살벌함과는 기묘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20020724050949-0415us_cave‘의식’을 집전 중인 닉 케이브

4. Laika, “Badtimes” from [Good Looking Blues] (2000)

“나쁜 시절”이란 제목의 이메일을 받는 즉시 읽지 말고 지워버릴 것. 여태껏 나타난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임. 하드 디스크를 날려버릴 뿐 아니라, 어떤 디스켓이든 컴퓨터 근처에 있기만 하면 다 망쳐놓음.
냉장고의 온도를 재조정해 아이스크림을 녹여버리고, 모든 신용카드의 전자기 정보를 파괴하며, 비디오 플레이어의 트랙들을 뒤섞어버림.
그리고 하부공간장 진동으로 어떤 CD든 재생하려 하기만 하면 해독불능으로 만들어 버림. 헤어진 남자/여자친구한테 당신의 새 전화번호를 자동으로 남겨줌.
If you receive an E-mail with a subject of “badtimes” delete it immediatly without
reading it. This is the most dangerous E-mail virus yet.
It will re-write your hard disk. Not only that, but it will scramble any disks that are even close to your computer. It will recalibrate your refrigerator’s coolness setting so all your ice cream melts. It will demagnetize the strips on all your credit cards, screw up the tracking on your VCR. And use subspace field harmonics to render any CDs you try to play unreadable.
It will give your ex-boy/girlfriend your new phone number.

이런 악성 컴퓨터 바이러스는 물론 가상의 것이지만, 그게 가져온다는 폐해는 하나씩 놓고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다. 일상 생활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따라서 살다가 한두 번쯤 겪어볼 만한 온갖 재수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온다는 건… 글쎄 과장인 건 틀림없지만, 최근 극성인 이메일 바이러스로 고생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만하리라 본다.

3. Crass, “Reality Asylum” (1978)

20020724051252-0415us_crass오른쪽은 “Reality Asylum” 싱글에 수록된 사진

나는 허약한 예수가 아냐, 천만에.
그는 경박한 기쁨으로 십자가에 매달렸지.
내 몸뚱이 위에 말이야, 천한 내게.
주님은 용서하신다. 용서한다고? 성스러우신 그분, 그분의 성스러움,
에이 썅 그는 용서해. 용서? 용서? 나? 나? 나를? 나는 널 위해 구토한다 예수.
I am no feeble Christ / Not Me / He hangs in glib delight upon his cross /
Above my body / Lowly me / Christ forgive / Forgive? /
Holy he / He holy / He holy /
Shit he forgives / Forgive? / Forgive? / Forgive? / I? / I? / ME? / I? /
I Vomit for you Jesu

1970년대 런던 펑크 씬의 극좌파 수장 크래스가 독기를 품고 내뱉는 신성모독의 극치. 섹스 피스톨스의 적(敵)그리스도 선언이 유쾌한 농담처럼 들리는 데 비해 이들은 뼛속까지 진지하다.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에 어느 정도 호의를 갖고 있는 분들이라면 듣기를 삼가는 편이 좋을 듯. 여기 실린 가사의 도입부는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하니까.

2. The Golden Palominos, “Victim” from [Dead Inside] (1996)
Spoken word by Nicole Blackman

손바닥엔 땀이 흘러, 여긴 어디?
트렁크가 삐걱하며 열리고 나는 햇빛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하지
그는 빛에 둘러싸여 마치 얼굴 없는 예수 같아
트렁크 밖으로 끌어내곤 내 머릴 문짝에 대고 두들기지
울음을 터뜨리려 했지만 잉잉 소리밖엔 나지 않아
My palms are sweating. Where am I?
The trunk squeaks as he lifts it up and the sun blinds me.
He almost looks like a faceless Jesus surrounded by light.
He pulls me out of the trunk and bangs my head against the door.
I try to cry out, but it comes like a hum.

안톤 피어(Anton Fier)가 이끌었던 1980-90년대 실험적 밴드 골든 팔로미노스의 대표작 중 하나. 시인 니콜 블랙맨이 낭독하는 가사는 납치 당한 피해자의 심리를 으스스할 정도로 생생하게 담아낸다.

1. Billie Holiday, “Strange Fruit” (1939)

이상한 열매

남부의 나무들엔 이상한 열매가
잎에도 뿌리에도 붉은 핏자국
검은 몸뚱이는 남쪽 산들바람에 흔들려
이상한 열매가 포플라 나무에 달리고
아름다운 남부의 목가적인 정경
튀어나온 눈과 뒤틀린 입에
목련의 향기는 달콤하고 신선한데
어디선가 갑작스레 살 타는 내음
여기 까마귀가 뜯어먹을 열매는
빗물에 모여들고 바람에 빨려들어
햇살에 썩어가고 나무에서 떨어져
여기 이 이상하고 쓰디쓴 곡식은

Strange Fruit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The bulging eyes and the twisted mouth,
Scent of magnolia sweet and fresh,
Then the sudden smell of burning flesh.
Here is the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For the sun to rot, for the trees to drop,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20020724045204-0415us_lynch이상한 열매 — 린치 당한 채 나무에 매달린 한 남부 흑인

미국의 노예 해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국가의 분열과 내전이 필요했지만, 그조차도 인종차별과 적대, 그리고 끔찍한 폭력을 종식시키는데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반세기도 훨씬 지난 후, 미 남부에 만연한 흑인에 대한 린치(lynch)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런 참상을 고발하려 했던 공립학교 교사이자 유태계 사회주의자 에이블 미로폴(Abel Meeropol)은, 루이스 앨런이란 필명으로 이 노래를 지어 빌리 할리데이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할리데이는 조금의 주저함 없이 클럽에 모인 대중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을 뿐 아니라, 소속 음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녹음하기까지 했다.
인종 청소, 대량 학살, 자폭 테러, 이런 무시무시한 용어들이 역사가 진행될수록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빈번히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현실, 그것보다 두려운 것이 또 어디 있을까. 1930-40년대 미국 사회에 할리데이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날로 살벌해 가는 오늘날의 이 상황에 섬뜩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노래를 기대하는 것은 단지 순간의 더위를 식히고자 하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20020717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관련 글
어느 개 같은 여름날의 기록 – vol.4/no.14 [20020716]
나의 여름 카세트테이프 만들기 – vol.4/no.14 [20020716]
납량특집: 나를 섬칫하게 한 다섯 개의 노래들 – vol.4/no.14 [20020716]
무난한 음악팬의 안전한 하룻밤 – vol.4/no.15 [20020801]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빙자하여 브라질 음악 20선으로 컴필레이션 CD 만들기 – vol.4/no.15 [20020801]
My Summer Cassette – vol.4/no.15 [20020801]

관련 사이트
Nick Cave, ‘낯선 이의 친절’
http://www.azlyrics.com/lyrics/nickcave/thekindnessofstrangers.html
Laika, ‘나쁜 시절’
http://www.alwaysontherun.net/laika.htm#g9
Crass, ‘현실 수용소’
http://audioseek.net/lyrics/C/Crass/Reality%20Asylum/285780/Reality%20Asylum.html
The Golden Palominos, ‘희생자’
http://www.nicole-blackman.com/di_lyric.htm
Billie Holiday의 ‘이상한 열매’에 얽힌 이야기들
http://www.wsws.org/articles/2002/feb2002/frut-f08.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