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u Giran – Completo – BMG, 1999 끄리오요의 비틀스의 역사적 궤적 ‘비틀스’라는 용어는 ‘1960년대에 활동한 영국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라는 사실적 정의를 넘어서는 의미작용을 가지는 단어다. 게다가 그 의미작용이 한두 가지도 아니며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온전한 의미에서의 ‘비틀스’란 ‘대중문화의 스타’이자 ‘청년문화의 컬트’라는 다소 상반된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존재다. 부연하면 소녀들의 괴성을 받음과 동시에 진지한 팬들로부터도 존중받는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따라서 진짜 비틀스 이외에 상이한 시공간에 비틀스가 존재할 수 있는데, 물론 이때는 해당 시공간에 대한 한정사가 필요하다. ‘어디어디의 비틀스’라는 식으로. 주의할 점은 이런 ‘로컬 비틀스’라는 존재는 비틀스와 비슷한 복장을 입고 비슷한 사운드를 연주한다는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었다. 즉, 비틀스의 수많은 커버 밴드들을 ‘어디어디의 비틀스’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서론이 길었지만 세루 히란(Seru Giran)은 ‘끄리오요의 비틀스’라고 불리는 존재다. 아르헨티나에서 끄리오요라는 단어가 스페인계를 중심으로 한 백인계 주민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아르헨티나의 비틀스’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밴드의 리더 찰리 가르씨아(Charly Garcia)는 “세루 히란이 아르헨티나의 비틀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뇨 비틀스가 영국의 세루 히란입니다”라고 말했다지만, 이런 기지어린 답변마저도 ‘비틀스같은’ 것이다. 찰리 가르씨아(Charly Garcia: 키보드, 보컬), 다비드 레본(David Lebon: 기타, 보컬), 뻬드로 아스나르(Pedro Aznar: 베이스), 오스까르 모로(Oscar Moro: 드럼)로 구성된 4인조 밴드인 세루 히란은 1978년부터 약 4-5년 간 활동하면서 아르헨티나의 록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린 존재들이다. 이 앨범은 그들이 남긴 네 장의 정규 앨범과 한 장의 라이브 앨범으로부터 선곡된 것이고 거의 대부분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생각 같아서는 박스 세트 포맷으로 재발매되기를 바랬지만 그들의 정규 앨범이 국제적 배급망을 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이 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두 개의 디스크에 15곡씩 꾹꾹 눌러 담았으니 가격에 큰 불만은 없을 것이다. 세루 히란의 음악적 특징은 실험적이라기보다는 절충적이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록 밴드의 지성적(intelligent)이고 진보적(progressive)인 방향을 계승하되 현학적이고 난해한 방향으로 나가기보다는 노래 형식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의식’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가사를 담았다. 가장 익숙한 곡은 당대의 송가(anthem)이자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송가’로 빛을 발했다는 “Cuanto Tiempo Mas Llevara”와 “Seminare”같은 곡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곡들은 두 번째 디스크의 앞에 스튜디어 레코딩이 아닌 라이브 레코딩으로 수록되어 있다. 다비드 레본의 대중적 창법의 보컬이 탄탄한 연주력으로 뒷받침되어 있다. 특히 “Cuanto Tiempo Mas Llevara”의 말미에서 뻬드로 아스나르의 베이스 속주(!)는 팻 메쓰니가 왜 그를 스카웃해갔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다비드 레본은 “San Francisco y el Lobo”나 “Esperando Nacer”에서는 “Seminare”에서와 같은 애절한(그리고 지금 들으면 좀 ‘구린’) 록 발라드풍의 보컬을, “Encuentro con el Diablo”나 “Autos, Jets, Aviones y Barcos”같은 곡들에서는 재지하고 훵키한 그루브 위에서 리듬을 타는 보컬을 선보이는 등 멀티 플레이어이자 ‘가수’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과시한다. 그의 기타 솔로는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세루 히란의 진정한 리더는 찰리 가르씨아였다. 그 역시 많은 곡에서 보컬을 맡았고 이 음반만 보더라도 첫 번째 디스크는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Peperina”나 “Perro Andaluz” 등에서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형식 속에서도 팝의 감성이 번뜩이고, “Grasa De Las Capitales”, “Cancion De Hollywood”, “Salir de La Melancholia”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록/재즈 록의 전력이 만만치 않게 발휘되기도 한다. “Viernes 3 A.M.”이나 “Cinema Verite” 등은 이제 고전의 향기를 발하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아름다운 곡이고, “No Llores por Mi Argentina”은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라는 ‘그 메시지’를 빠르고 거친 록 사운드와 냉소적 보컬(이언 길런 풍의 보컬?)로 풍자하고 있다.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지만 다른 많은 트랙들에서도 찰리 가르씨아는 단지 키보드와 보컬을 맡은 멤버를 넘어 전체적인 조정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물론 작사·작곡에서 이미 그의 역할이 지대함을 알 수 있지만. 이상의 설명이 ‘세루 히란의 음악이 어떤 장르냐’라는 물음에 대한 만족한 답변은 되지 못할 것이다. ‘프로그레시브 록과 재즈 록의 영향이 있으면서도 그리 잘난 척 하지는 않고 나름의 애티튜드를 가지고 있으며, 라틴적 느낌이 슬쩍 묻어 있는 록 음악’이라는 설명도 긴 문장에 비해 핵심을 정확히 지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비틀스가 그랬듯 세루 히란 역시도 고도의 절충주의(eclecticism)를 자신의 색깔로 만들어낸 드문 경우일 것이다.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세루 히란제(制)이고, 따라서 밴드 자체가 하나의 장르인 그런 경우일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의 록 음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세루 히란의 영향력을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음악적인 요인 외에도 현재 아르헨티나의 중장년층(!)이라면 군부 독재의 탄압(1976-83)와 포클랜드 전쟁의 패전(1982)라는 어두운 시기에 그들과 함께 했던 록 밴드의 음악의 영원한 가치를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음반을 ‘지금 여기’에서 듣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도 이제 와서 뒤늦게 찾아 듣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런 걸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건 있다. 비틀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서양 사회의 1960년대’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 있듯 세루 히란을 들으면서 ‘남미 사회의 1970년대 말’에 대한 환상을 가져볼 수는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저 좋았던 시기’였던 서양의 1960년대와 달리 남미의 1970년대 말은 숨막히는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록 음악이, 그것도 자국의 록 음악이 어떤 의미에서든 탈출구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흥미롭다. 그 흥미 뒤에 아쉬움이 묻어 있다. 그 아쉬움에 대해서 밝히기에는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망해버린 나라의 록 음악의 역사’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마지막 트랙인 기악곡 “Lo Que Dice la Lluvia”의 연주가 긴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 3시간 동안의 역사 기행이자 환상 여행이었다. 20020717 | 신현준 homey@orgio.net 9/10 수록곡 1. Peperina 2. Salir De La Melancolia 3. Cancion De Alicia En El Pais 4. Llorando En El Espejo 5. Cinema Verite 6. Cara De Velocidad 7. Grasa De Las Capitales 8. Cancion De Hollywood 9. Jose Mercado 10. Desarma Y Sangra 11. Luna De Marzo 12. Perro Andaluz 13. Los Jovenes De Ayer 14. Viernes 3 Am 15. Frecuencia Modulada Disc 2 1. Seminare (En Vivo) 2. Cuanto Tiempo Mas Llevara (En Vivo) 3. En La Vereda Del Sol 4. Encuentro Con El Diablo 5. San Francisco Y El Lobo 6. Mientras Miro Las Nuevas Olas 7. Tema De Nayla 8. Autos, Jets, Aviones Y Barcos 9. Parado En El Meido De La Vida 10. No Llores Por Mi Argentina (En Vivo) 11. Esperando Nacer (En Vivo) 12. Popotitos (En Vivo) 13. Eiti Leda (En Vivo) 14. 20 Trajes Verdes (Instrumental) 15. Lo Que Dice La Lluvia (Instrumental) 관련 글 월드컵 스페셜 : 동아시아에서 눈물 지은 나라들 편(4) – 아르헨티나 – vol.4/no.14 [20020716] Sui Generis [Vida] 리뷰 [20020716] Fito Paez [El Amor Despues del Amor] 리뷰 – vol.4/no.14 [20020716] Andres Calamaro [Honestidad Brutal] 리뷰 – vol.4/no.14 [20020716] Los Enanotos Verdes [Nectar] 리뷰 – vol.4/no.14 [20020716] Los Fabulosos Cadillacs [Fabulosos Cavalera] 리뷰 – vol.4/no.14 [20020716] Bersuit Vergarabat [Don Leopardo] 리뷰 – vol.4/no.14 [20020716] El Otro Yo [Abrecaminos] 리뷰 – vol.4/no.14 [20020716] Illya Kuryaki & the Valderramas [Los Clasicos del Rock en Espanol] 리뷰 – vol.4/no.14 [20020716] 관련 사이트 Seru Giran 사이트들 http://www.fortunecity.com/tinpan/humperdinck/368/seru.htm http://www.geocities.com/broadway/8015/seru.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