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말없이 차창을 내다본다. 비가 그친 심야의 도로를 질주하는 택시. 차창 밖으로 한강의 불길한 어둠이 덮칠 듯 웅크리고 앉은 풍경. 왜 하필 이때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이라는 시집 제목이 생각난 것일까. 여름 피서용 댄스 음악이 난무하는 에프엠을 듣는 사내, 을씨년스러울 만큼 조용한 택시 안이 너무나 불편하게 생각된다.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은 세계사라는 (거창한 이름의) 출판사에서 1990년도에 찍어낸, 부산에서 지게 지던 김신용 시인의 첫 시집이다. 허나 그 사내, 고단한 노동과 허기진 삶을 개 같은 삶에 빗대어 노래했다지만 3만 원짜리 심야 택시에 앉아 있는 이 사내는 무엇을 개 같은 삶에 빗댈 것인가. 초라해진 사내는 자신의 젖은 양말을 구두 속에서 비비적거린다. 바람이 미적지근합니다, 지루한 침묵이 미안했던지 사내가 문득 택시 기사에게 말을 건네 보지만, 태풍이잖습니까, 라는 심드렁한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지하차도를 과속으로 달리는 심야 택시 안에서 초라한 사내가 오래 전 들었던 노래들을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장마철인 것이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30년만의 무더위라며 연일 섭씨 삼십 몇 도의 신기록을 발표하던 일기예보가 끊이지 않던 그 해 여름 내내 사내는 경기도 끝자락의 공업도시에서 다섯 평 남짓한 방에서 라면을 끓이고 담배를 피우고 소주를 마셨다.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던 열기를 못 이겨 변온동물처럼 늘어지기만 하던 여름날을 보양해준 것은 노래를찾는사람들의 “사랑노래”, 권진원의 목소리는 마르지 않던 빨래만큼이나 습하던 갓 스물 사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유치한 감상주의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야 유효했을 매끈한 진보적 취향이 결탁한 지점에서나 가능했을 위안이라 해도 말이다. 심야 에프엠의 디제이는 쉴새 없이 떠들어댄다.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대해서, 때론 가슴아픈 실연에 대해서, 혹은 늦은 시간까지 폐쇄된 사무실에 앉아 있는 소수의 직장인들에 대해서 위로와 격려의 멘트를 날리느라 입이 아플 디제이는 ‘열심히 일한 당신 (카드 갖고) 떠나라’는 무시무시한 유혹을 담보하는 광고가 흐를 때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30초 짜리 광고가 끝나자 불쑥 튀어나오는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의 “I’m Set Free”. 아득한 기타 리프를 따라 가다 보면 2년 2개월 동안 한번도 편한 적이 없던 전투화를 신고 사내가 서있다. 그 시절에 사내는 질퍽거리는 소각장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빗속에서 쓰레기를 태웠다. 잘 지워지지 않는 매캐한 냄새가 밴 몸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노래하던 앤(Ann)의 “오후의 냄새”를 그때 들었다면 그 냄새가 달리 느껴졌을까, 사내는 생각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희망이란 이뤄지지 않는 법이지’라고 태연히 ‘하루끼’스럽게 중얼거리는 인디 밴드의 음악을 그 곳에서 즐길 방법이란 사실 전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중얼거린다, 그 노래만은 언제나 지루한 더위와 습기를 기억하게 한다. 바야흐로 택시는 다리를 지난다. 그러고 보면 사내는 한강을 건너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언젠가 사내는 동작대교를 맨몸으로 건넌 적도 있는 것이다. 그 날은 천구백구십몇년의 어느 장마였고, 그 며칠 전 아는 사람에게 거저 얻어 시원찮은 씨디 플레이어에는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Tonight, tonight] EP가 들어있었다. “Medellia Of The Gray Skies”가 그때 마침 흘러나왔는지 어땠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사내는 왠지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바람 따라 날리던 가는 빗줄기와 헤드라이트 불빛들, 아득하게 멀고도 가지런히 서있던 동작대교 가로등이 떠올랐다. 빗 길을 질주하는 심야 택시는 물을 튀기며 신나게 달려간다. 사내는 생각한다, 한강은 이제 차츰 멀어질 것이다. 다시 비가 내린다. 택시는 속도를 올리지 못한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타다다닥,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 사내는 무심결에 가방 안에 들어있는 씨디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린다. 이런 밤이면, 오래 전 잊어버렸어야 마땅할 기억도 아무렇지 않게 떠오르는 법이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낡은 헤드폰을 목에 건 뒤 볼륨을 올린다. 사내가 다니던 학교는 수도권 끝자락 도시에서도 변두리에 있었다. 방학이면 언제나 휑하니 비어버리는 캠퍼스 근처, 비바람을 뚫고 만화가게로 향하던 장마에 그는 아무도 없는 동아리 방에서 옐로 키친(Yellow Kitchen)의 “Toves”를 최고 볼륨으로 틀어놓고는 빈둥거리며 빌려온 만화책을 읽곤 했다. 때때로 사내는 수원행 전철을 타기도 했다. 학교 앞 다섯 평 짜리 빈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낡고 닳은 카세트를 만지작거리며 스산하게 젖어 가는 낮은 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대도시의 비린내가 가시질 않는 수원행 마지막 전철, 늙은 사람들과 지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객차 자동문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경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다. 한참 뒤, 우스꽝스럽게 비틀린 어어부 프로젝트의 “종점 보관소”가 그 풍경과 닮았음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을까, 사내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한없이 치솟고 있는 택시 요금을 바라본다. 비는 쏟아져 내리고 그 노래, 서글펐다. 사내가 살던 곳은 서해에 인접한 대도시, 이른바 수도권 최대의 공업 도시였다. 무작정 버스에 오르면, 음악 씨디 한 장이 다 돌 때쯤에는 근처에 바다가 보이는 버스 종점에 도착하곤 했다. 사내는 학교에 갈 일도, 일할 날도 없는 여름날이면 종종 버스를 타고 부둣가로 나갔다. 인적이 없는 공업단지를 지나 출렁이는 바다가 엎어질 듯 보이는 방파제에 몰래 기어 들어가 탁한 바다와 갈매기들을 바라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나아질 것은 물론 전혀 없었지만, 사내는 마치 저예산 독립영화의 한 장면처럼 조악하고 거친 입자의 수면을 내려다보곤 했다.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을 한 관리인이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올 때까지 사내는 거기 우두커니 앉아 바다에 담배꽁초를 던지거나 대학노트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거나 작은 언덕 만한 화물선이 도크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휴양지 해변이 아닌 바닷가가 초라하고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육지를 향해 부는 동안 사내의 헤드폰에서는 모하비3(Mojave3)의 “Love Songs On The Radio”가 무심히 흐르기도 했고. 문득 사내는 절절한 절망과 절절한 신파가 지독하게 닮았다고 생각한다. 막 고속도로로 진입한 택시를 스치듯 화물 트럭이 고속으로 질주한다. 도로 옆으로 쳐진 방음벽을 바라보며 사내는 이 지루한 장마가 언제쯤 끝날 것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일년 내내 비가 내린다는 스코틀랜드 구석의 팔커크(Falkirk)라는 소도시의 삶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에이단(Aidan Moffet)의 중얼중얼 졸린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거기엔 도대체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감 비슷한 부끄러운 것이 있을까. 너무 구질구질하여 차마 꺼내놓을 수 없을 듯한 사연과 사건들은 누구나 하나쯤 가슴에 숨겨놓고 있는 법이라지만, “New Birds”같은 노래를 아무렇지 않게 불러 제끼는 밴드란 세상에 흔하지 않은 것이다. 문득 사내는 집으로 가는 길이 지겹고 대중없이 쏟아지기만 하는 장마가 지겹고 내일 아침 다시 빗속을 뚫고 이 길을 지나야 할 반복된 삶이 지겹고 혹은 두렵다. 기껏해야 실연 아니면 치기 어린 감상주의에 지배당하던 갓 스물의 삶, 아니면 몇 달째 나오지 않는 월급 따위에 연연해하는 삶을 지게꾼의 개 같은 삶에 빗대어 투덜거린 것부터가 초라하고 안일하지만, 사내는 기왕 주변머리 없어진 마당에, 라고 생각한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택시가 슬금슬금 톨게이트로 접어들 때쯤 사내는 차츰 약해지는 빗줄기와 만난다. 키 낮은 건물들이 어둠 속에 파묻힌 도시 변두리, 거기에서 여기로 오는 동안 사내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히고, 사내의 헤드폰에서는 로우골드(Lowgold)의 “In Amber”가 새어나온다. 어느 쪽으로 갑니까? 그때까지 말이 없던 기사가 입을 연다. 사내는 오른쪽이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헤드폰에 귀를 기울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는 낯익은 동네 입구로 들어선다. 깨진 전구가 한달 째 방치된 가로등 아래에 택시가 머뭇머뭇 멈추고 사내는 그제서야 허둥지둥 지갑을 찾느라 가방을 뒤적인다.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인지 기사는 오천 원을 더 요구한다. 낙담한 표정을 짓던 사내가 이내 순순히 돈을 꺼내 주자 택시는 짜증스러운 엔진 음을 남기고 도로로 빠져나간다. “안녕, 또 다른 길(Hello Another Way)”, 더 브릴리언트 그린(the brilliant green)의 노래를 토모코 카와세(Tomoko Kawase)의 음정에 훨씬 못미치는 높이로 흥얼거리는 사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마는 곧 잊혀질 것이고 사내는 내년 장마에 다시 다른 노래들을 흥얼거릴 것이다. 이 끈적한 새벽, 혼잣말은 솔직히 신파스럽다. 사내가 피식 웃어보지만, 그것도 워낙에 신파다. 사는 게 어디 신파 아닌 게 있느냐고 위안하면서 사내는 가방을 고쳐 멘다. 아스팔트 군데군데 움푹 패인 자리에 빗물이 고인 골목은 언제 장대비가 쏟아졌냐는 듯 후덥지근하다. 금새 숨이 턱까지 차 오른다, 집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 덥다, 지나치게 더운 밤이다. 세상에 나쁜 것 따위란 없다, 다만 덜 좋은 것이 있을 뿐.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말을 떠올리는 사내의 이마에 땀이 맺힌다. 골목길에서 휘청이는 그의 젖은 어깨 위로 뜨거운 김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20020716 | 차우진 djcat@orgio.net 선곡 리스트 1. 사랑노래 – 노래를찾는사람들 [노래를찾는사람들 3](서울음반, 1991) 2. I’m Set Free – The Velvet Underground [The Velvet Underground](Verve MGM, newly digitally remastered 1996) 3. 오후의 냄새 – Ann [Skinny Ann’s Skinny Funky](인디, 1998) 4. Medellia Of The Gray Skies – Smashing Pumpkins [tonight, tonight](EMI, 1996) 5. Toves – Yellow Kitchen [Mushroom, Echoway, Kleidose](n-viron, 1998) 6. 종점 보관소 –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21c New Hair](쌈지/Polimedia/크림, 2000) 7. Love Songs On The Radio – Mojave3 [Ask Me Tomorrow](4AD, 1995) 8. New Birds – Arab Strap [Mad For Sadness](Go!Beat, 1999) 9. In Amber – Lowgold [Just Backward Of Square](Nude, 2001) 10. Hello Another Way – the brilliant green [Losangeles](Sony Japan, 2000) 관련 사이트 ●민중가요 데이터 베이스 PLSong(Proletariat Liberation Song) http://www.plsong.com/index2.htm ●The Velvet Underground 공식 사이트 http://members.aol.com/olandem/vu.html ●Ann [Skinny Ann’s Skinny Funky] 소개 페이지 http://www.kpopdb.com/album.html?aid=1223328 ●Smashing Pumpkins 공식 사이트 http://www.smashingpumpkins.com ●레이블 n-viron 홈페이지 http://www.n-viron.net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21c New Hair] 소개 페이지 http://www.kpopdb.com/album.html?aid=1121189 ●Mojave3의 별거 없는 공식 사이트 http://www.lysator.liu.se/~chief/mojave3.html ●Arab Strap 공식 사이트 http://www.arabstrap.co.uk/en/ht/idx.html ●Lowgold 공식 사이트 http://www.lowgold.co.uk ●the brilliant green의 Sony Japan 사이트(이들은 항상 밴드명을 소문자로 적는다) http://www.sonymusic.co.jp/Music/Info/thebrilliantgreen 관련 글 어느 개 같은 여름날의 기록 – vol.4/no.14 [20020716] 나의 여름 카세트테이프 만들기 – vol.4/no.14 [20020716] 납량특집: 나를 섬칫하게 한 다섯 개의 노래들 – vol.4/no.14 [20020716] 무난한 음악팬의 안전한 하룻밤 – vol.4/no.15 [20020801]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빙자하여 브라질 음악 20선으로 컴필레이션 CD 만들기 – vol.4/no.15 [20020801] My Summer Cassette – vol.4/no.15 [200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