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h – Vapor Trails – Anthem/Atlantic, 2002 프로그레시브 메탈 거장의 뉴 메탈 탐험기 [Vapor Trails](2002)는 캐나다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트리오 러쉬(Rush)의 최신작이다. 이 음반은 두 가지 의미에서 러쉬의 팬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첫 번째는, [Vapor Trails]가 1996년 작 [Test For Echo] 이후 무려 6년 만에 나온 음반이라는 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밴드의 드러머이자 노랫말을 도맡고 있는 닐 퍼트(Neil Peart)에게 닥친 비극이 결정적이었다. 즉 [Test For Echo]가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아, 닐 퍼트는 아내와 딸을 연달아 잃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닐 퍼트는 자택에 칩거했고, 러쉬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1968년 토론토에서 결성된 이래 러쉬의 역사에 있어 멤버 교체는 딱 한 번이었다. 그것은 1974년 닐 퍼트의 가입이었고, 이후 러쉬의 라인업은 어느 누구도 대체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2001년 가을 [Vapor Trails] 제작을 위해 스튜디오에 다시 모일 때까지, 러쉬의 이름으로 된 행적이라곤 1998년 발매된 3CD 라이브 음반 [Different Stages]가 유일하다. 5년여의 공백기 동안 기타리스트인 알렉스 라이프슨(Alex Lifeson)과 보컬/베이스/건반악기를 맡고있는 게디 리(Geddy Lee)가 각각 솔로 음반을 냈지만, 팬들은 ‘러쉬’의 이름으로 한데 뭉칠 날만을 염원하고 있었다. [Vapor Trails]는 러쉬의 새 음반을 애타게 기다려온 이들을 충족시켜주는 단비와도 같은 선물이다. 이 음반의 두 번째 특별한 의미는, 바로 사운드의 획기적인 변화다. [Vapor Trails] 음반의 전반적인 화두는 ‘뉴 메탈’이다. 강렬하고도 묵직한 톤의 몰아붙이는 듯한 기타 연주가 중심이 된 어둡고 위협적인, 스테인드(Staind)나 툴(Tool)의 스타일에 가까운 메탈이 수록곡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이들 밴드가 하나같이 러쉬를 존경의 대상으로 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One Little Victory”, “Ceiling Unlimited”, “Nocturne”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기존 러쉬 사운드의 연장선에 있는 노래도 없지는 않다. “Ghost Rider”, “How It Is”, “Earthshine”, “Out Of The Cradle” 등이 그 예다(하지만 육중한 기타 톤은 여전하다). “Vapor Trails”와 “Secret Touch” 처럼 도입부에 러쉬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테크니컬한 전개가 진행되다가 뉴 메탈 풍의 어둡고 복잡한 폴리 리듬이 끼여드는 경우도 있다. “Peaceable Kingdom”은 펄 잼(Pearl Jam)이나 사운드가든(Soundgarden)을 연상시키는 그런지 스타일이 러쉬 특유의 테크니컬한 연주와 절묘하게 결합한 곡이다. “Sweet Miracle”은 음반 전체를 관통하는 격정적인 분위기 와중에 한숨 돌리려는 듯(또는 싱글 발매를 염두에 두는 듯), 다소 느슨하고 깔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쉬어 가는’ 노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디스토션이 잔뜩 걸린 ‘인더스트리얼’ 풍의 러쉬는 실로 뜻밖이다. 쉴 새 없이 요란한 메탈 사운드를 창출하는데 방해라도 된다는 듯, 늘 있어 왔던 키보드 연주가 이번 음반에선 제외된 것도 무척 특이하다. 혹자는 이러한 변신이 러쉬와 공동으로 프로듀스를 담당한 폴 노스필드(Paul Northfield)의 영향 때문이라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수어사이덜 텐던시스(Suicidal Tendencies)나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과의 작업으로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주로 메탈 쪽에 장기를 지닌 베테랑 엔지니어로서, 러쉬와는 [Permanent Waves](1980) 시절부터 함께 일해온 사이다. 그러므로 [Vapor Trails]의 새로운 사운드는 결론적으로 러쉬 본인들의 강한 의지의 결과물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뉴 메탈이나 인더스트리얼이라면 최근 유행하고 있는 ‘주류 록’ 장르들이고, 때문에 러쉬의 행보에 담긴 의미에 긍정적일 수만은 없는 시선을 보내게 된다. 러쉬는 시류에 영합하려는가? 30년을 훌쩍 넘긴 거물 밴드이자, ‘프로그레시브 메탈’이라는 장르의 완성자이자, 뮤지션의 뮤지션이라는 명예를 뒤로하고, ‘애들이나 하는’ 유행 사조를 따르는 둔중한 몸놀림을 목도하며, 어쩔 수 없이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저히 인간이 연주하는 것 같지 않던 게디 리의 베이스와 닐 퍼트의 드럼 연주에도, 그 날렵함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물론 이들의 신출귀몰한 리듬 섹션이 완전히 빛에 바랬다고는 없고, 유난히 두드러진 존재감을 발휘하는 알렉스 라이프슨의 맹렬한 기타 연주에 다소 가려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월의 누적된 피로감 탓인지, 아니면 너무 긴 공백 기간 때문인지 명백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러쉬의 지난 역정을 더듬어 보면, 이들에게 있어 ‘변화’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자 지상 과제가 아닐까. 이는 러쉬의 활동 고비고비마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초기엔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아류쯤으로 치부되던 이들은, [2112](1976)를 기점으로 웅장한 스케일의 철학적인 서사극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 거듭났다. 한동안 ‘대작’ 노선을 걷던 중, [Permanent Waves]에 이르러 다시 한번 커다란 변신을 시도한다. 예전에 비해 훨씬 간결해진 음악 세계를 지향하는 ‘뉴 웨이브 메탈’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후 20여 년 동안 러쉬의 뉴 웨이브 메탈은 사소한 차이는 있을망정 커다란 틀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이제, [Vapor Trails]를 통해 러쉬는 세 번째로 획기적인 변신을 이루려 한다. 각 시기의 주류 장르를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체화하는 러쉬의 면모를 약삭빠른 행동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러쉬는 자기들의 무기로 택하려는 장르(프로그레시브, 뉴 웨이브, 뉴 메탈)를 각각의 최전성기가 약간 시점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러쉬의 진정한 재능은 반짝 떴다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장르에, 신출귀몰한 연주와 심오한 메시지로 ‘무게’를 더한다는 점이다. 록 음악으로 돈을 버는데 있어 현재 독보적인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뉴 메탈이라는 ‘인기 장르’가, 과연 러쉬의 손길로 ‘환골탈태’할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20020630 | 오공훈 aura508@unitel.co.kr 7/10 * 여담 : 평자에 따라서는 [Vapor Trails]의 노랫말에서 나타나는 닐 퍼트의 정신 세계로부터, 자신이 겪은 불행과 9.11. 사태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심리적 외상’의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고 한다. “Peaceable Kingdom”이나 “Ghost Rider” 노랫말에 서려있는 ‘죽음의 기운’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예전에도 닐 퍼트의 가사에 담긴 정신적 풍경은 어둡고 회의적인 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러쉬의 내면적인 측면은 사운드의 경우와는 달리 커다란 변동 없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수록곡 1.One Little Victory 2.Ceiling Unlimited 3.Ghost Rider 4.Peaceable Kingdom 5.The Stars Look Down 6.How It Is 7.Vapor Trail 8.Secret Touch 9.Earthshine 10.Sweet Miracle 11.Nocturne 12.Freeze, Part IV Of “Fear” 13.Out Of The Cradle 관련 사이트 Rush 공식 사이트 http://www.rush.com Rush 팬 사이트 http://members.aol.com/djrant/rushpage.html http://www.geocities.com/SunsetStrip/Plaza/1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