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605032629-blondeBlonde Redhead – Melodie Citronique – Touch And Go, 2000

 

 

전위주의 글로벌리즘

‘금발의 빨강머리’라는 형용모순적인 뜻을 지닌 블론드 레드헤드는 뉴욕 시의 다소 혼돈스런 풍경을 두 가지 점에서 잘 드러낸다. 첫째로 창립 멤버 전원이 아메리카 출생이 아닌 다인종 이주민들이라는 점에서, 둘째로 이들의 음악이 정신산란한 노이즈로 특징지어지는 맨해튼 전위음악 공동체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블론드 레드헤드를 아시안 아메리칸 인디 록에 포함시키는 데는 ‘기술적인’ 문제가 없지 않다. 원래 밴드의 절반을 구성했던 아시아계 카즈 마키노(Kazu Makino)와 마키 타카하시(Maki Takahashi)는 일본에서 예술 공부를 하러 건너온 학생들인데, 이들이 시민권을 취득해서 정식으로 ‘미국인’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두 명의 멤버는 이탈리아 출신의 일란성 쌍둥이 시모네(Simone)와 아메데오 파체(Amedeo Pace) 형제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아시안 아메리칸 인디 록 특집에서 굳이 다루는 이유 또한 두 가지다. 첫째, 미국 땅에서 인디 음악을 하고 있는 이상, 이민 1세대가 됐든 2세대가 됐든 혹은 시민권이 있든 없든, 아시아계가 끼어 있는 다른 인디 록 밴드들과 이들을 굳이 차별 대우할 근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둘째, 백인 인디 록과 마찬가지로 아시아계 인디 록 또한 약간의 컨트리 향마저 머금은 시카(Chika)의 성인용 음악으로부터 블론드 레드헤드의 도회적 전위주의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미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대로, ‘블론드 레드헤드’라는 밴드 이름은 이른바 노 웨이브(No Wave)로 불리는 뉴욕 포스트 펑크 실험주의 음악 씬의 대표주자였던 DNA의 곡 제목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블론드 레드헤드의 동명 데뷔 앨범은 소닉 유쓰(Sonic Youth)의 드러머 스티브 셸리(Steve Shelley)에 의해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소유한 레이블 스멜스 라이크(Smells Like)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고, 당시 밴드 편성 면에서도 마키노의 기타와 여성 보컬, 아메데오의 기타와 남성 보컬, 타카하시의 베이스와 시모네의 드럼은 소닉 유스의 편성과 흡사하다. 이쯤 되면 이들의 초기 음악에 소닉 유스의 그림자가 얼마나 크게 드리워져 있을지는 듣지 않고도 능히 짐작이 간다.

데뷔 앨범 이후 밴드를 그만 둔 타카하시 대신 언와운드(Unwound) 출신 베이시스트 번 럼지(Vern Rumsey)를 임시로 기용하고 밴드 스스로 제작을 맡은 1997년의 [Fake Can Be Just As Good]는 터치 앤 고(Touch and Go) 레이블을 통해 발표된다. 앨범 제목을 소닉 유쓰와 자신들의 관계를 비꼰 것으로 해석한다면 무리일까? 하여간 이들은 이 앨범을 통해 명목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소닉 유쓰의 치맛자락을 떠나려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대의 기타가 주도하는 노이즈 록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소닉 유스의 바로 그 스타일이지만, 블론드 레드헤드의 곡들은 길어야 6분을 넘기는 것 없이 대개 꽉 채워진 3-4분 길이에 전형적으로 탄탄한 록 리듬 섹션이 뒤를 받쳐준다. 특히 마지막 두 곡에서는 언와운드의 육중한 기관차같은 스타일을 연상시킬 정도로 베이스와 드럼의 영향력이 돋보인다. 아메데오의 보컬이 써스턴 무어(Thurston Moore)에 이탈리아 액센트를 약간 덧칠한 정도라면, 마키노의 신경을 긁어대는 고음은 킴 고든(Kim Gordon)의 가라앉은 톤과는 다분히 대조적이다.

이후 베이스를 아예 빼버리고 푸가지(Fugazi)의 가이 피치오토(Guy Picciotto)를 프로듀서로 영입해서 만든 1998년의 [In An Expression of Inexpressible]는, 마키노의 보컬을 전면에 내세워서 종전의 기타 노이즈 위에 포개진 불협화음 멜로디라는 또 다른 층에서 청각을 괴롭히는 실험을 지속한다. 역시 피치오토가 제작한 2000년의 후속 앨범 [Melody of Certain Damaged Lemons]는 그전까지의 작업들에서 간헐적으로만 나타났던 이들의 유로팝(Europop)-혹은 관점에 따라서는 유로트래쉬(Eurotrash)라고도 일컬어지는-감수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리믹스 미니 앨범인 [Melodie Citronique]에서 완연해진다.

여기서 정규 앨범은 제쳐두고 리믹스 EP를 택한 이유는 이 음반이 블론드 레드헤드의 음악적 ‘정수’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다인종/민족적 출신 배경이 어떻게 전위주의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새로운 변종을 만들어내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이탈리아 출신인 파체 형제가 이탈리아어로 곡을 쓰고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평이한 멜로디를 노래하는 “Chi E E Non E”는 사실 뭐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일본계인 마키노가 프랑스어로 노래하는 “En Particular”는 아닌게 아니라 특별하다고 해야 하겠다. 원래의 앨범에서 “Hated Because of Great Qualities”였던 노래는 이탈리아어로 “Odiata Per Le Sue Virtu”가 되어 역시 마키노에 의해 불려진다.

이런 난데없는 라틴 유럽으로의 나들이는 프랑스 샹송계의 마왕(魔王) 세르쥬 갱스부르(Serge Gainsbourg)의 곡을 커버한 “Slogan”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마키노의 목소리는 마치 제인 버킨(Jane Birkin)을 신경쇠약 상태로 몰아넣은 것처럼 들리고, 곡 전반에 깔린 둔탁한 드럼 비트는 후반부로 진행하면서 사운드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해 끝내는 덥(dub) 트랙으로 변이한다. 써드 아이 파운데이션(Third Eye Foundation)의 매트 엘리엇(Matt Elliot)이 리믹스한 “Four Damaged Lemons”에서는 피아노와 종소리, 그리고 마치 뿌연 필터를 통해 여과된 이미지와 같은 질감의 백색 소음을 배경으로, 마키노가 노래하는 샹송 풍의 우울하고 스산한 멜로디와 더불어 짧은 여정은 끝을 맺는다.

일본에서 성장기를 보낸 한 친구로부터 일본인들에게 뿌리깊은 프랑스 및 라틴 유럽의 문화에 대한 동경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일급 전자음악가 겸 DJ 노부카즈 타케무라(Nobukazu Takemra)가 만든 [Milano]같은 음반을 보면 대중음악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문화적 친화성이 블론드 레드헤드를 결성하게끔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런 국적 묘연한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문화적 글로벌리즘이 그리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적어도 어떤 특정한 곳의 어떤 특별한 이들에겐 말이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문화를 가로지르며 부유할 수 있는 이들에게 ‘아시안-아메리칸’이란 말은 ‘유로피언-아메리칸’이라는 말만큼이나 의미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 20020527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7/10

수록곡
1. En Particulier
2. Odiata Per Le Sue Virtu
3. Chi E E Non E
4. Slogan
5. Four Damaged Le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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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Blonde Redhead 공식 사이트
http://www.southern.com/southern/band/BLOND
또 다른 Blonde Redhead 사이트
http://www.blonderedhead.org
Blonde Redhead 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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