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0 Cigarettes](1999)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새해를 코앞에 둔 1981년 12월 31일 밤 뉴욕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를 배경으로, 백인 젊은이들의 우스꽝스럽게 뒤얽힌 관계를 익살맞지만 재치 있게 풀어냈던 영화다. MTV의 힘을 빌린 이 영화는, 다소 과장된 장면들이 간혹 거슬리긴 하지만, 뉴욕 펑크와 뉴 웨이브 음악과 패션으로 포장된 당시 뉴욕 청년 문화를 비교적 충실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혹시 벤 애플렉(Ben Affleck), 크리스티나 리치(Christina Ricci),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 등 초호화 출연진에 넋을 잃지 않았다면, 아마 극 중 본인 역으로 직접 까메오를 한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을 맡은 리사 브라몬 가르시아(Risa Bramon Garcia)는, 재닌 개로팔로(Janeane Garofalo)와 마사 플림튼(Martha Plimpton)이 엘비스 코스텔로에 광분하는 장면이나, 그의 “Pump It Up”이나 “(What’s So Funny ‘Bout) Peace, Love And Understanding” 같은 노래를 통해, 그가 당시 뉴욕 청년 문화에서 차지했던 막대한 비중을 은근슬쩍 암시한다. When Elvis Costello Was Cruel… 출신 배경과 무관하게, 엘비스 코스텔로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 뉴욕, 아니 보다 확장한다면 미국의 백인 청년문화를 선도하던 대표적인 ‘로큰롤 뮤지션’이었다. 물론 그가 1970년대 후반 영국 펑크 바람에 힘입어 자연스레 미국 팝 시장에 안착한 걸 시인하더라도, 분명 엘비스 코스텔로는 영국의 다른 펑크 로커들과는 변별되는 독특한 존재였다. 탁월한 멜로디 감각, 레게에서 블루스에 이르는 자유분방한 사운드 접목 실험, 풍자와 냉소, 천박하지 않은 유머와 익살로 점철된 가사 등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의 음악에는 직선적인 록의 박력과 유연한 팝의 매력이 공존했다. 당시 그가 미국 대학가의 펑크나 뉴 웨이브 팬들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고유의 검정 수트와 올빼미 안경, 톡톡 튀는 신랄한 입담으로 요약되는 외양과 태도는 그를 새로운 유형의 록 스타로 부각시키기에 충분했다. 닉 로우(Nick Lowe)나 어트랙션스(The Attractions) 같은 든든한 동지들과 함께 한 이 10여 년 동안, 청년 로커 엘비스 코스텔로는 [My Aim Is True](1977), [This Year’s Model](1978), [Get Happy!!](1980), [Imperial Bedroom](1982), [Blood And Chocolate](1986) 등 매년 탁월한 음반들을 세상에 내놓으며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1987년 대형 레이블인 워너(Warner)와 새로운 계약을 맺은 이후에도 작업을 멈춘 적이 없다. 하지만 삼십대로 접어들며 다소 기가 꺾였는지, 상당 기간 음악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듯했다. 다양한 음악적 실험은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고, 결국 어트랙션스와 재결합해 작업한 [Brutal Youth](1994)를 끝으로 더 이상 기타를 매고 무대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불혹을 넘어선 엘비스 코스텔로는 버트 바카락(Burt Bacharach)이나 안네 소피 본 오터(Anne Sofie von Otter) 등과 다소 낯설어 보이는 프로젝트를 통해 과거를 완전히 묻고 ‘나이에 걸맞은’ 여유를 찾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그는 지난 8년여 동안 제대로 된 솔로 앨범을 단 한 장도 발매하지 않았다. 결국 근년에 이르러 엘비스 코스텔로는 잊혀져 가는 왕년의 로커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의 골수 팬들 입장에선 이런 평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욱이 그의 과거 이력을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엘비스 코스텔로를 단지 [Painted From Memory](1998)나 영화 <노팅힐(Notting Hill)>(1999)에 삽입된 “She”를 부른 중후한 발라드 가수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 본인 스스로도 썩 유쾌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지난달에 엘비스 코스텔로의 새 앨범 발매 소식을 처음 접하곤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다. 워낙 오랜만의 개인 앨범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앨범 제목이 마치 질풍노도 같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 정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When I Was Cruel]이 근년의 프로젝트 활동들의 연장선상에서 발매된 음반일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 앨범에서 47살의 엘비스 코스텔로는 이십대 시절의 ‘거칠고 박력 있는 엘비스’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의 투박한 듯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기타 솜씨도 녹슬지 않았고, 유려한 멜로디와 떠들썩한 리듬을 직조하는 재주도 그대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때론 문맥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틀리고 냉소적이며 신랄한 내용의 가사를 써 내려가는 능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간혹 샘플이나 첨단 비트 작법을 응용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이 모두는 엘비스 코스텔로 특유의 로큰롤 사운드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 뿐이다. 결국 기타를 메고 무대를 휘젓고 다니던 모습을 올드 팬들이 그리워할 때쯤, 엘비스 코스텔로는 왕년의 명반들과 비슷한 성향의 적절한 신보를 세상에 내놓은 것 같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열혈 팬의 입장에서는 그가 [When I Was Cruel]을 통해 다시 록음악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흥분할 만한데, 더 반가운 소식은 신보 발매를 전후해 그의 초기 클래식들인 [My Aim Is True], [This Year’s Model], [Blood And Chocolate]가 각기 보너스 트랙들을 대거 보강하여 라이노(Rhino) 레이블에서 재발매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월부터 시작된 그의 전미 대륙 투어는 왕년의 엘비스 코스텔로와 그의 팬들이 다시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함께 노래하고 즐길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Live In Berkeley [When I Was Cruel] 발매에 따른 전미 대륙 투어의 일환으로 엘비스 코스텔로가 베이 에리어를 찾은 것은 지난 5월 22일이었다. 50불이 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미 공연 티켓은 한달 전에 매진되었는데, 공연장인 버클리 커뮤니티 씨어터(Berkeley Community Theater)는 대부분 백인 중장년층 관객들로 만석을 이루었다. 버클리 지역뿐 아니라 이웃의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새너제이 등 곳곳에서 그를 보기 위해 열성 팬들이 몰려온 듯했다. 저녁 8시 정각에 오프닝을 맡은 보스턴 출신 4인조 밴드 아메리칸 하이파이(American Hi-Fi)가 무대에 올라 40여분간 열띤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미 작년에 크게 뜬 밴드지만 관객들은 대부분 요즘의 록음악을 듣지 않아서인지 그들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고, 연주 간간이 객석에서는 “Who are you?”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빈틈없이 꽉 찬 연주와 프론트 맨 스테이시 존스(Stacy Jones)의 열정적인 무대 매너는 서서히 관객들을 압도해갔다. 특히 “Flavor of the Weak”, “Another Perfect Day” 같은 그들의 알려진 곡이 연주되자 공연장 분위기는 상당히 고조되었다. 30여분의 휴식 후 드디어 엘비스 코스텔로가 자신의 새로운 밴드 임포스터스(Imposters)와 함께 무대에 나왔다. 티켓을 다소 늦게 구입해 2층 좌석을 배정 받은 바람에 그의 모습을 분명히 보긴 어려웠지만, 전기 기타를 맨 엘비스 코스텔로가 무대 전면에 서고 건반, 베이스, 드럼 주자가 좌우후방에 각기 자리했다. [When I Was Cruel] 앨범 발매 전인 작년 뉴욕 공연에서 그가 건반 주자 한 명만 대동한 채 기타도 없이 공연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임포스터스는 사실 어트랙션스가 이름만 바꾼 밴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운드의 조율사라 할 수 있는 건반주자 스티브 나이브(Steve Nieve)와 드럼 주자 피트 토마스(Pete Thomas)는 어트랙션스 시절부터 뒤를 받쳐온 영원한 동반자들이다. 물론 과거에 엘비스 코스텔로와 사사건건 부딪혔던 어트랙션스의 리더 브루스 토마스(Bruce Thomas) 대신 크래커(Cracker) 출신 데이비 파라거(Davey Faragher)가 새로운 베이스 연주자로 임포스터스에 가담했지만, 그 또한 이미 [When I Was Cruel] 앨범 작업에 참여했던지라 팀웍은 별반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엘비스 코스텔로와 임포스터스는 본 공연에서 90여분간 총 17곡의 열정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When I Was Cruel]의 곡들과 데뷔 때부터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발표했던 곡들이 절반씩 고루 섞여 연주되었다. 전반부에는 직선적인 록 음악들을, 후반부에는 상대적으로 보다 부드러운 팝 성향의 곡들을 들려주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번 앨범의 사운드가 그의 초기 앨범의 연장선상에 있어서인지 곡과 곡 사이의 이음새가 매우 자연스러웠다. 특유의 검정 수트에 올빼미 안경 차림을 한 엘비스 코스텔로는 마치 20대 시절로 돌아간 듯 무대를 뛰어다니며 열창했다. 물론 그의 기타 실력도 여전했다. 여러 대의 기타를 바꿔가며 때론 디스토션 잔뜩 걸린 힘있는 연주를, 때론 감미로운 어쿠스틱 연주를 자유자재로 들려주었다. 신곡의 경우, 재치 있는 농담을 섞어가며 간략히 소개하고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아내에게 바친다는 “15 Petals”나 자신의 젊은 시절 분노에 대해 자성하는 내용의 앨범 타이틀곡 “When I Was Cruel, No. 2” 등은 관객들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 곡은 역시 “Watching The Detectives”, “(I Don’t Want To Go To) Chelsea”, “Man Out Of Time” 같은 그의 초기 명곡들이었다. 자유롭게 얘기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폐쇄적 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인 라디오 방송 진행자의 역설적 상황을 조용히 노래하는 “Radio Silence”를 끝으로 엘비스 코스텔로와 임포스터스의 본 공연은 끝이 났다. 일단 그들이 무대를 내려간 후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기립한 채 열렬히 앙코르 요청을 했다. 무대에 재차 올라온 엘비스 코스텔로는 “I Hope You’re Happy Now”의 연주를 끝으로 다시 한번 물러났지만, 이후 두 차례나 더 앙코르 요청을 받고 무대에 거듭 올라와야 했다. 본 공연 외에 무려 1시간 여 동안 11곡을 더 관객들에게 들려준 셈이었다. 무대 위의 엘비스 코스텔로와 객석의 관객 모두 마지막까지 자리를 뜨기 싫어했지만, 결국 떠나간 여인에 대한 광적이면서도 슬픈 집착을 드러내는 애절한 발라드 “I Want You”를 끝으로 공연은 완전히 끝이 났다. 사실 [Blood And Chocolate]에 수록된 이 곡은 워너로 옮기기 전 엘비스 코스텔로의 마지막 히트곡이라는 점에서 기분이 묘했다. 물론 엘비스 코스텔로가 [When I Was Cruel]을 발판으로 앞으로도 기타를 둘러매고 무대를 휘젓고 다닐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이도 나이지만, 만약 이번 앨범이 그다지 재미를 못 본다면 다시금 ‘오케스트레이션 팝’이나 ‘팝-클래식 퓨전’을 하기 위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는 자신의 새 음반과 공연 내용에 대해 크게 만족하는 것 같았다. 또한 그의 골수 팬들도 ‘돌아온 엘비스’에 열광하며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이날 공연에서 [This Year’s Model], [Imperial Bedroom] 등에 수록된 곡들을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기뻤지만, 아마 새 음반과 함께 젊은 시절의 음악과 태도로 되돌아가려는 엘비스 코스텔로 본인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더 큰 감동을 주었던 듯하다. 사실 엘비스 코스텔로는 영미권에서 오랜 기간 평자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막대한 열혈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수 뮤지션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25년 이상의 음악 활동을 제대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엘비스 코스텔로가 이곳에서 청년 세대의 우상으로 맹활약하던 당시의 열악한 국내 음반시장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최근까지 지속되는 철저한 외면은 참으로 안타깝다. 다행히 [When I Was Cruel]과 라이노 레이블에서 최근 재발매된 그의 초기 음반들이 국내에서도 정식 수입되었다고 하니, 비록 많이 늦긴 했지만 엘비스 코스텔로가 국내 록 팬들로부터 서둘러 재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20020602 | 양재영 cocto@hotmail.com Set List 2002년 5월 22일, Berkeley Community Theater 1. Dust 2… * 2. 45 * 3. Waiting For The End Of The World ** 4. Watching The Detectives ** 5. Spooky Girlfriend * 6. (I Don’t Want To Go To) Chelsea *** 7. 15 Petals * 8. You Little Fool ***** 9. When I Was Cruel No.2 * 10. Clowntime Is Over No.2 **** 11. Tart * 12. All The Rage ******* 13. Little Triggers *** 14. Man Out Of Time ***** 15. Beyond Belief ***** 16. …Dust * 17. Radio Silence * 첫 번째 앙코르 18. High Fidelity (2:37) **** 19. Possession (2:23) **** 20. I Hope You’re Happy Now (3:16) ****** 두 번째 앙코르 21. Alibi * 22. Take Off Your Own Head (It’s A Doll Revolution) * 23. You Belong To Me *** 24. Pump It Up *** 세 번째 앙코르 25. Episodes Of Blonde * 26. Lipstick Vogue *** 27. I Want You ****** * from [When I Was Cruel](2002) ** from [My Aim Is True] (1977) *** from [This Year’s Model](1978) **** from [Get Happy!!](1980) ***** from [Imperial Bedroom](1982) ****** from [Blood And Chocolate](1986) ******* from [Brutal Youth](1994) 관련 글 Elvis Costello [When I Was Cruel] 리뷰 – vol.4/no.12 [20020616] 관련 사이트 아일랜드 레이블의 엘비스 코스텔로 공식 사이트 http://www.islandrecords.com/elviscostello/home.las 엘비스 코스텔로에 관한 각종 사이트 링크 http://www.luckygoon.com 엘비스 코스텔로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자료 http://www.elviscostello.info 엘비스 코스텔로에 관한 광범위한 검색 http://www.ecostello.com [롤링 스톤] 엘비스 코스텔로 기획 기사 http://www.rollingstone.com/features/featuregen.html?pid=737&cf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