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갠후(Began…Who) – 록에 희망은 있다 – EMI, 2002 희망에 대한 ‘어떤’ 생각 비가 막 그친 듯 물방울이 묻어있는 유리창 위에 시원하게 뚫린 곧은 도로와 푸른 하늘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 한 장이 붙어있고, 한 여름 소나기가 쏟아진 직후의 풍경처럼 보이는 이 사진 아래에는 ‘비갠후…’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록에 희망은 있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앨범은 윤도현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유병렬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밴드 비갠후(Began… Who)의 데뷔 앨범이다. 윤도현밴드가 다섯 번 째 앨범인 [An Urbanite]를 발표하기 전, 불화설의 소문만 남기고 밴드를 떠난 유병렬이 정선연 밴드 출신의 김태일(베이스), 안치환과 자유 출신의 나성호(드럼), 피노키오의 보컬이었던 한호훈과 함께 절치부심으로 준비했다는 정보가 이들의 데뷔 앨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일차적인 이유였다면, ‘록에 희망은 있다’는 선언(적인 문구)에 의한 것은 이차적인 이유였다. 당신(들)이 말하는 희망이란 대체 무엇인가. 다소 직설적으로 되묻고 싶다면, 어쨌든 음반을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대답의 대부분은 아마도(혹은 분명히) 앨범 안에 있을 것이므로. 말 그대로 ‘포효’하는 듯 거친 기타 연주의 인트로를 지나면 장진 감독의 영화 [킬러들의 수다]에 삽입되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다시 사는 거야”가 흐른다. 무겁게 울리는 드럼과 고음의 보컬, 디스토션 걸린 전기 기타의 속주가 어우러진 이 곡은 마치 1980년대 팝 메탈(pop metal/hair metal)의 히트곡을 듣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마치 그 당시의 것처럼 보이는 다소 촌스러운 느낌의 북클릿과도 상관 있어 보인다(아니면 그냥 편집상의 문제일까?). 어쨌든 이 앨범의 이미지, 사운드 등은 밴드가 은근슬쩍 의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미드 템포의 “꿈이 있으면”, 슬로 템포의 “소망”, “하루동안”, “아름다운 날에”와 같은 (소위) 록 발라드 곡에서 친숙하고 익숙한 멜로디 라인과 비장한 느낌의 곡 구성, “내버려둬”, “섬”, “홀로 서기”, “희망은 있다” 등에서 감지할 수 있는 하드 록, 훵크 메탈(funk metal) 스타일을 통해서도 이러한 심증이 굳어진다. 여기에, 앨범에 세 곡이나 수록된 연주곡(“Began… Who?”, “천국에서”, “The End… And”)들이 모두 테크니컬한 기타 솔로 연주를 중심으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진행된다는 점까지 알아차린다면 이런 심증은 거의 확신으로 바뀐다. 비갠후의 음악적 지향점은 1980년대 중반/후반의 주류 대중 음악이었(으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소수 취향이었)던 헤비 메탈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다시 앨범의 표제로 돌아오면, ‘록에 희망은 있다’라는 문장이 감추고 있는 것은 ‘(한국) 록에 희망은 (여기에) 있다’라는 정도가 아닐까. 물론 이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국 록은 죽었(거나 죽을 지경이)다’라는 전제(혹은 동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말이다(한국에 과연 록 음악이 있기는 했었나, 라는 질문은 우선 묻어두고). 또한 이 말에서 유병렬이 나오기 전까지 윤도현밴드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던 ‘한국 록 다시 부르기 프로젝트’의 느낌이 전해진다는 점도 한편으로는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록 음악의 변방, 아시아에 존재하는 록 밴드로서의 자의식보다는 다분히 자기과시적인 느낌을 주는 전기 기타 연주와 높은 음역대에서 일관되게 쏟아져 나오는 파워 보컬, 소박한 여백보다는 꽉 짜여져 빈틈없는 느낌을 주는 베이스와 드럼 라인 등을 통해 비갠후가 제시하는 매끈한 희망에 대해서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비갠후의 데뷔 앨범이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시원깔끔한 ‘한국’ 록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성찰’이 ‘부재’하기 때문에, 마치 한국 주류 대중 음악에서 받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에서 직업적으로 록 음악을 한다는 것’과 ‘세션 뮤지션으로 벌이를 해야 한다’는 말이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는 점(유병렬 역시 윤도현밴드의 성공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부쩍 늘어난 세션 섭외를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므로 딱 잘라 가타부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루어지는 세션 활동이 정작 본인의 창작력과 진지한 고민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만은 짚어 보고싶다. 한편으로는, 한국(적) 록 음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음악인으로서의 사명감 혹은, 록 음악의 한국적 수용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들이 일간지나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좋은 징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고민을 발전시키고 해결하려는 방향에 따라 시나위, 3호선 버터플라이, 윤도현밴드, 블랙홀과 비갠후의 역할과 위치가 모두 달라질 것이고.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이른바 ‘희망’ 역시 더 다양하고 더 흥미로운 모습으로 제시/발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기, ‘록에 희망은 있다’라는 말은, 과거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이른바 답습)과 현재 상황에 대한 고민의 부재(혹은 부정)에 관한 예리한 질문이 되어 우리(혹은 당신)에게 다시 되돌려져야 할 것이다. 20020411 | 차우진 djcat@orgio.net 5/10 수록곡 1. Began… Who?(Intro) 2 다시 사는 거야(킬러들의 수다 OST) 3. 꿈이었으면 4. 소망 5. 내버려둬 6. 섬 7. 하루동안 8. 천국에서 9. 있는 그대로가 좋다 10. 홀로서기 11. 아름다운 날에 12. 까마귀 13. 희망은 있다 14. The End…And(Outro) 관련 글 윤도현밴드 [한국록 다시 부르기] 리뷰 – vol.2/no.2 [20000116] 윤도현밴드 [An Urbanite] 리뷰 – vol.3/no.14 [20010716] 관련 사이트 밴드 비갠후 공식 사이트 http://www.beganwh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