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년들의 자화상

20020408062749-beijingbastard1푸른색은 어스름한 새벽 미명의 색이다. 미혹과 혼돈이,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그런 빛이다. 1993년 영화 [북경 녀석들(베이징자쫑, 北京雜種, Beijing Bastards)]에는 바로 이 빛깔이 부각되어 있다. 중국의 6세대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장위엔(張元) 감독의 이 영화에서 베이징 록 뮤지션 추이잰(崔健)이 주연을 맡았다. 장위엔과 함께 영화를 공동제작한 그는, 중국 뮤지션 또우웨이(竇唯), 허용(何用)과 함께 영화음악도 담당했다. ‘정치적 탄압과 자금 압박 속에서 만들어진 진정한 인디 정신의 표본’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온건한 한국판 제목을 좀 거친 버전으로 고친다면 ‘북경의 후레아들’ 정도쯤 되지 않을까)은 중국 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지만 국제적으로는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특별상, 싱가폴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여 장위엔을 국제적 명사로 만들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톈안먼사건(天安門事件)’의 소용돌이 같은 중국의 불안한 흐름에 영향을 받은 덕분에 6세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사, 생존 공간과 신변잡기적 사건 및 그들의 감정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장위엔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의 현장인 천안문 광장의 일상을 담은 1994년 기록영화 [꾸왕창(廣場, The Square)], 알콜 중독에 빠진 아버지 때문에 패가하는 한 가족의 얘기를 다루면서 아버지와 다른 가족의 관계를 중국 정부와 인민의 관계에 비유한 1995년 작품 [얼즈(兒子, Sons)] 등, “모두 첸카이거나 장이모의 일부 영화에서 나타난 ‘화려한’ 중국 대신 ‘비천하고 음울한’ 중국의 모습”을 담았다. “1996년 서구 자본으로 만든 [동공시공(東宮西宮, East Palace, West Palace)]은 사실주의 성향을 접고 현란한 색채미학을 동원한 농밀한 스타일”로 논란을 일으켰지만…(그래서 ‘인디’적 태도를 통한 미학적 성취는 지아장커의 영화들 [소무], [플랫폼]에 의해 획득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당대적 현실과의 연관성 때문에 장위엔의 작품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6세대를 ‘중국의 현실’을 직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본다면 장위엔의 시도는 그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이 영화 역시 그의 초기 스타일에 걸맞게 중국 청년의 초상화를 생생하게(그래서 중국 영화계의 관행에 벗어난 위험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그려내었다.

이 영화에는 그저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며 술 퍼마시고 싸움질을 일삼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이 보인다. 그러나 목적 없이 방황하는 중국 젊은이의 군상으로부터 바로 암울한 현실이 투영되어있다. 사기 당해 돈 떼인 작가 따칭(大慶), 마오마오(毛毛)라는 여자친구에게 중절을 권했다가 이별하지만 그녀를 못 잊는, 작은 선술집의 주인 카즈( 子). 그리고 연습실을 빼라고 종용받고 공연을 허가받지 못하는 추이잰 록 밴드가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체다. 그들에 대한 묘사는 전통적, 관습적인 내러티브나 스토리라인을 거부한 듯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으며, 불투명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 묘사는 이상하게도 청년들의 허무와 비탄을 더 사실적이고 절실하게 다가오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영화에는 독일(동독인)과 소련에 관한 뉴스나 대화가 한두 번 삽입되긴 하지만 감독은 이 같은 직접적인 설명 방식을 통해서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항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인터뷰와 같은 느낌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독백하는 듯한 주인공들의 나레이션도 후반부에 잠시 등장할 뿐, 영화는 오히려 관광객이 절대 갈 것 같지 않은 누추한 뒷골목, 허름하고 어둑한 술집, 혹은 차와 자전거가 분주하게 오가는 거리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황량하고 쓸쓸한 거리 속에 추적추적 끝도 없이 내리는 비가 암울한 현실의 직접적인 메타포 같기도 하다. 깊은 절망감에 하염없이 거리를 방황하거나 진탕 술을 먹고 주먹질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비춰주거나, 혹은 타오르는 모닥불 가운데 광적인 몸부림과도 같은 춤을 추는 그들을 삽화처럼 삽입한다. 때로 마리화나에 취한 상태로 그들이 보는, 사실인지 환영인지 모를 장면들(카즈가 듣는 아기 울음소리 등)이 삽입되어 있다. 그들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클럽의 한 밴드에 대한 이야기들(‘머리 긴 녀석 못 봐주겠어’, ‘외국 나간 게 뭐 하러 다시 왔어’, ‘하나같이 패배자들이라구’)에서 잘 드러난다. 이처럼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는 절망감 가득한 젊은이들의 탈출구란 새벽에 술이 덜 깬 상태에서 길게 뻗어 있는 철길을 따라 질주하는, 혹은 머리를 깎는 행위로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20020408062749-beijingbastard2무엇보다 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추이잰 밴드의 음악일 것이다. 처음과 끝은 추이잰 밴드의 연주로 처리되어있다. 첫 장면은 추이잰이 “콴롱(寬容, Tolerate)”을 연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퍼붓는 비속에 마오마오와 카즈가 임신(중절) 문제로 싸우는 장면과 교차편집된다. “더이상 난 널 사랑하지 않아/미워도 하지 않아/넌 여전히 너이지만/난 힘이 없어” 같은 구슬픈 가사와 색소폰으로 대변되는 애절한 사운드는 파경으로 치달은 이들의 관계를 대변하는 듯하다. 때때로 음악 속에 투영되는 이러한 주인공들과 중국의 모습은 장위엔의 부업이었던 MTV 작업 스타일과도 상통하는 느낌을 준다. 물론 문득문득 삽입되는 추이잰 뮤직비디오 같은 연주 씬은 생뚱맞은 느낌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쭈이호우더빠오위엔(最后的抱怨, The Last Complaint)” 연주장면에는 공연장이 철거당할 때의 혹독한 현실이 오버랩되는데, 노래에서 어떤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묻어난다. “분노의 근원을 찾아야 해/…/미움과 상처의 근원을 찾아야 해/…/나는 바람을 맞고 앞으로 나아가네/앞으로.” 가야금 비슷한(농현을 내는), 혹은 중국식 지터(zither)라 불리는 구젱(古箏)과, 전원적인 피리 소리를 내뿜는 띠즈(笛子)도 보이는데, 이 장면에서 이러한 중국 전통악기들이 발현된 서양 록 사운드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베이징꾸스(北京故事, Beijing Story)”의 연주장면으로 끝나는데, “고통이 더 많을수록 우린 더 내일의 행복을 상상할 수 있어/…/갑자기 네게 새로운 움직임이 따라 오네/내 생활이 혁명처럼 변하네”라는 가사를 지닌 이 노래는, 희망적이지 않은 결말을 추상적으로나마 결연한 의지로 끝맺는다.

이런 노래들을 들으면서 보는 이 영화는, 추이잰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더욱 큰 애정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물론 [동공시공(東宮西宮)] 같은 장위엔의 탐미적인 영화가 더 매혹적인 이에게는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20020405 | 최지선 fust@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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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추이 잰 공식 사이트
http://www.cuijian.com
추이 잰에 관한 간명한 해설
http://www.smipp.com/cuijian.htm
중국 록의 역사에 대한 간명한 해설
http://www.sat.dundee.ac.uk/~arb/music/chinario.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