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에게는 결례이겠지만, 내가 타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음악 작품보다는 정치 활동 때문이었다. MBC 파업 현장에 가서 “Puppy Love”를 비롯하여 깜찍 발랄한 모습으로 샤방하고 상큼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파업이라는 게 ‘진지하고 치열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리고 인디 뮤지션들이 현실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 장면은 무언가 ‘새로운 시대의 개막’처럼 보였다. 그러고 나서 들어본 그녀의 노래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창력’이었다. 그 가창력에는 “문자왔숑”도 포함된다. 트위터에 ‘死강반대’가 들어간 사진을 올려놓은 모습은 ‘원래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은 무언가 맺힌 게 있기 마련’이라는 나의 편견(?)을 굳혔고, 그래서 새 앨범이 나온 찬스를 놓칠 수 없었다. 아침 8시 라디오 프로그램인에 출연하여 노래를 세 곡이나 부르고 돌아온 타루는, 처음에는 피곤해 보였지만 이내 열정과 활기를 찾아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시: 2011. 7. 22 장소: 합정동 카페 질문: 신현준 정리: 김정윤 타루, 나는 가수다! [weiv]: 안녕하세요, 야생 타루! 2집 앨범 [100% Reality]는 전체적으로 템포가 느리고, 발라드풍의 곡이 많고, 슬픈 이야기네요. 굳이 말하자면 시부야 분위기에서 합정동 분위기로 바뀐 것 같네요. ‘사운드’보다는 ‘노래’가 강조되고 있고요. 어떤 곡은 ‘나가수’를 방불케 하는 열창도 있고. 타루: 의도했던 컨셉 중 일부가 작업하는 중에 확대되어 크게 부각되었어요. 말씀하신 슬프고 우울한 면이 부각된 거죠. 그리고 노래가 강조된 건, 곡을 만들다 보니까 제가 시원하게 부를 수 있는 음역대가 나왔고요. 가창력을 의식해서 하지는 않았어요. 그 전에도 가창력이라는 것이 꼭 ‘지르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원래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이번에 표현되었다고나 할까요? [weiv]: 편곡이나 사운드 면에서도 밴드 편곡은 많이 줄인 것 같고, 몇 곡은 아주 배제한 것도 있네요. 어쿠스틱 기타, 현, 피아노가 많이 들어가네요. 이런 점이 ‘100% 리얼리티’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다른 인터뷰 보니까 이번 앨범은 논픽션이라고 말하던데…. 타루: 사실은 악기를 더 빼려고 했었는데, 편곡 과정에서 추가됐어요. 원래는 더 미니멀하게 가려고 했었어요. 100% 리얼리티는 편곡보다는 작곡에 대한 것이에요. “여기서 끝내자”는 5분 안에 썼는데, 사실 나머지도 다 5분~10분 내에 쓴 거예요. 제가 원래 다작을 못해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한 번 만들면 되게 빨리 만들어버리는 스타일이에요. 쥬스를 금방 짜는 것 같은, 그런 것 있잖아요. ‘Fresh’하게. 그럴 때 ‘100% 오렌지’라고 그러잖아요? 이런 느낌의 리얼리티예요. 곡을 만들 때도 그런 상황이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 진 곡이라서 ‘Fresh’한 거죠. [weiv]: 본인은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전에는 유심히 듣지 않으면 인디 음악들이 가사가 잘 안 들렸어요. 근데 요즘은 가사가 잘 들리는 음악이 꽤 많네요.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가사를 더 잘 들리게 하고 싶었다는 의도나 지향이 있었나요? 타루: 제가 곡을 만들다 보니까 맞춤이 된 거죠. 그래서 더 잘 들린 것이고. 이미 만들어 놓은 곡에 가사를 붙이는 것과 다 맞춤으로 제작해서 가사랑 곡이랑 맞아서 떨어지는 것은 확실히 듣는 것 차이가 있죠. 잘 들리는 차이. 순간에 다 만들어 진거라 의도할 새가 없었어요. [weiv]: 그러면 앨범 수록곡들 각각을 언제 처음 만들었는지, 작업하다 추가 되었는지. 타루: “여기서 끝내자”가 3년 전에 만들었고, 다른 곡들은 앨범 작업 들어가서 6개월 사이에 만들었어요. “지금이 아니면”과 “Love me”가 같은 시기, “이슈”, “말해 줘요”, “내 사람”을 그 다음 같은 시기에 만들었어요. [weiv]: “Night Flying”이나 “쥐色 귀, 녹色 눈”처럼 록킹했던 곡은 없네요. 그러다 보니 여름에는 안 어울린다는 말은 안 나오던가요? 타루: 네, “여기서 끝내자”가 컨셉이라서 다른 곡들도 구색에 맞게 하다보니까 이렇게 부각이 된 것 같아요. 원래 앨범이 봄에 나올 예정이었어요. 통계학적으로 봄에 연인들이 많이 헤어진다고 해서, 봄에 내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졌어요. 하지만 조금 있으면 가을이 오니까요. [weiv]: “아이스크림가게, 팬시보이”나 “이슈”는 이제까지의 ‘파스텔풍’ 혹은 ‘타루풍’인데…. 타루: 원래는 앨범 컨셉을 더 이국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로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여기서 끝내자”가 주축이 되다보니 많이 대중친화적으로 된 건 맞아요. 오히려 “아이스크림가게, 팬시보이”같은 곡들이 많았었죠. 다음에 그런 곡들만 모아서, 그러니까 이번에 빠졌던 곡들을 작업할 생각이에요. 그런 곡들이 많이 있어요. [weiv]: “내 사람”은 1970년대 세시봉 느낌이네요. (웃음) “여기서 끝내자”의 비장한 느낌이 지배하다가 마지막에 “내 사람”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아, 통속적인 질문이에요! 타루: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기다리면서 만든 곡이에요. 뭔가를 많이 줄 수 있는 경제적 여유나 그런 게 안 되잖아요. 너무 고마운 마음을 전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 다른 사람이에요. (웃음) 같은 사람은 아니에요. 결국 “내 사람”을 불러놓고 그 사람과도 잘 안됐어요. 그냥 그런 상태예요. 노래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weiv]: “말해줘요”의 정치적 메시지도 “쥐色 귀, 녹色 눈”에서의 강력한 토로보다는 잔잔한 호소예요. 이번 앨범의 컨셉에 맞췄다고 봐도 될까요? 타루: 컨셉이라기보다는 제가 한 살 더 먹어서. (웃음) 지금도 성격이 센데, 대놓고 싸우기 보다는 오히려 반문을 하는 것이 효과가 더 크다는 지혜가 생기잖아요. 아시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왔어요. [weiv]: 앨범의 커버도 귀엽고 샤방한 이미지에서 성숙한 이미지로 바뀌었는데 이것도 이번의 컨셉? 타루: 아무래도 진지한 곡이다보니 그런 거죠.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미니 앨범 프로젝트였어요. 프로젝트 색깔에 맞게 활동을 하고 노래를 했던 것이고, 이번 프로젝트의 관건은 저의 자작곡과 제가 할 생산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이전과는 많이 다르죠. [weiv]: 미니 앨범이라면 정규 앨범에 비해서는 시간이나 예산이 적게 걸리나요? 타루: 세 달 전부터 시작했으니 막상 앨범 녹음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어요. 그 전에 이미 곡이 이미 나왔었고 악기도 녹음을 거의 마쳤었어요. 녹음 진행이 안 됐던 이유는, 제 후두가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3개월 동안 기침을 했어요. 기침과 몸을 다스리며 건강을 회복하는데 6개월 걸린 것 같아요. 3개월 동안 노래를 할 수 없었어요. 숨을 쉴 때마다 너무 심하게 기침을 했었어요. 지금은 계속 약 먹고 있어요. [weiv]: 편곡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어떤 경우는 세션들에게 말로만 한다는 경우도 있고, 일일이 다 샘플을 주는 경우도 있고…. 타루: 말로만 하는 정도면 굉장히 고차원이고(웃음), 선배들이 아마 그러실 거구요. 처음에 생각했던 2집 컨셉은 아까 말한 것처럼 기타 한 대로 굉장히 담백하게 갈 생각이었어요. 곡 작업이란 것도 그냥 순간으로 다 나와 버리니까, 저는 컴퓨터를 켜지도 않고 그냥 아이폰으로 녹음을 바로 해버려요. 그러고 나서 정리가 된다 싶으면 컴퓨터로 가져가서 큐베이스로 오디오 파일을 만들어요. 어차피 드럼이야 좋은 샘플 소스들도 많고, 합주하면서 드러머의 재량과 역량으로 맛을 가미할 수 있잖아요. 코드나 멜로디, 기본적인 편곡 아이디어 정도를 가지고 작업을 해서 합주를 시작하는 거죠. 합주를 시작해서 멤버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대본을 만들어서 1차 편곡이 이렇게 끝나고요. 2차 편곡은 뭔가 조금 더 완성도 있는 음악을 위해 같이 이야기를 해서 ‘다음에 어떤 악기가 들어가면 좋을까?’ 등의 의논을 하면서 계속 피드백 받으면서 합주도 해보는 식이었어요. [weiv]: 스튜디오는 어디를 사용했나요? “여기서 끝내자”는 세 버전이 있는데 작업을 다른 장소에서 한 건가요? 타루: 파스텔 녹음실에서는 드럼 녹음이 안 돼요. 현도 다른 곳에서 했어요. 밴드 버전은 저희가 녹음한 게 맞고, 앨범 버전, 그러니까 에피톤 프로젝트 버전의 경우는 처음부터 (차)세정 씨가 통으로 편곡을 다 하기로 해서 녹음실 여기저기서 했을 거예요. 방화동, 왕십리, 산본을 이동하던 야생소녀 [weiv]: 타루의 성장기는 어땠나요? 타루: 좋지 못한 아동 생활을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거의 매일 집안이 시끄러웠어요. 1남 3녀 중 둘째인데, 혼자 자란 것처럼 약간 외동처럼 자랐어요. 언니가 일급 장애인이에요. 본의 아니게 장녀이면서 둘째였는데,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 서울 방화동에서 자랐는데 ‘싸움을 제일 잘하는 동네’죠. 그런데 애들이 동네에서 안 놀고 다른 데서 노니까 동네문화랄 건 없었죠. [weiv]: 그런 과정에서 어떠한 음악을 듣고… 그런 것 있잖아요. 지금 들으면 우습고 창피한 음악을 좋아했을 수도 있고. 타루: 할머니가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저는 아홉 살 때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완창 했어요. 본의 아니게 했어요. 부모님께서 저에게 문화적으로 혜택을 많이 못주셨어요. 그때 저희가 전축을 새로 샀는데, 당시 갖고 있던 테이프가 김현식과 인켈 데모 테이프였어요. 문화라고 할 것은 TV와 전축, 그게 끝이었어요. 수영장 데려가는 것도 세 번 정도? 워낙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외할머니가 저희를 키우셨는데, 동네잔치에 가셔서 노래도 신나게 부르시고, 성격이 대범하시고 그런 분이셨어요. 같이 살지는 않았는데 거의 만날 오셔서 저희를 돌봐주셨어요. 엄마는 그때 뭐했는지 모르겠고. (웃음) 기억에 남는 게 TV 화면 조정시간에 음악이 나오잖아요. 그 음악에도 맞춰서 춤을 추셨어요. 손자들 데리고. 그리고 외삼촌은 통기타 가수셨어요. 외가 쪽이 좀 문제가 있는…. (웃음) 친가는 또 굉장히 감성적이에요. 성격 자체가 너무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들이라 이런 것들이 조화가 돼서 문화적으로 어떤 혜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DNA와 성장 과정의 암울했던 기억들이 음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어요. 가끔 제가 농담으로 ‘이게 다 엄마 아빠 때문이다’라고 말해요. (웃음) [weiv]: 타루를 처음 직접 봤을 때, 사진으로는 샤방샤방하기만 했는데, 실제 인상은 왠지 모를 우울이 있었어요. 타루: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가정통신문에는 ‘명랑하다’고 나왔어요. 그때 ‘나는 그렇게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20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았어요. 근데 뚜껑을 열어보니 아닌 거죠. 그런 것들이 음악적으로 양분화 되어서 표출이 된 것 같아요. [weiv]: 20대 초에 아마추어로 활동한 경력은? 타루: 언니가 장애인이다 보니 제가 본의 아니게 장녀가 되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음악 하겠다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저는 좋아하는 연예인이 없었어요. 사실 그때 저는 그 나이에도 H.O.T가 유치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애들이 H.O.T 죽자 살자 쫒아 다니고 그럴 때, 저는 여행스케치 듣고, 새벽 3시까지 라디오 듣고 그랬거든요. 제가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그런 것을 부모님들에게 보이기가 싫은 거예요. ‘잘 할 수 있다’, ‘책임감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어요. 20살 때도 음악은 취미로 하고 대학을 가겠다고 했어요. [weiv]: 문예창작과에 간 게 2000년대 초겠네요. 대학교 친구들과 음악적 교감 같은 건 없었나요? 타루: 한 번 재수해서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02학번으로 들어갔어요. 그 학교의 코드는 대중적인 곳이라서 음악적 교류는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인디가 강세는 아니었어요. 지금이야 드라마들도 비주류에 관심을 가지고 소재로 삼고 그러잖아요.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음악을 좋아해서 쫒아 다니다 보니 가이드도 하게 되면서 음악의 길로 접어든 거죠. [weiv]: 가이드가 뭔지 자세히 말해줄래요? 누가 의뢰를 했고 어디 가서 했고…. 타루: 가이드란, 곡을 만들어서 보컬에게 가기 전 단계, 즉 데모 버전에서 부르는 거예요.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김)민홍 오빠가 옛날에도 음악을 했는데, 가끔 시간 되면 가서 녹음 하고, 곡이 나한테 맞을 것 같으면 ‘와서 가이드 좀 해봐’라고 저를 불렀어요. 그때 민홍 오빠 작업실이 산본에 있었어요. 그때는 돌아다니는 게 일이었으니까 방화동과 왕십리와 산본을 오가며 살았던 거죠. 그러다가 더 멜로디(The Molody)의 정식 멤버로 들어갔고, 앨범이 나오니 ‘업’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weiv]: 더 멜로디에 들어간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 줄래요? 고운이나 관영은 어떤 음악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타루: 더 멜로디는 뮬(mule)이라는 음악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만나 보컬을 구한다고 하기에 가서 바로 테스트를 해봤어요. 녹음 테스트를 해봤는데 마음에 든다고 해서 바로 작업했어요. 더 멜로디의 리더는 홍대앞에서 조금 ‘굴렀던’ 경우고, 나머지는 그냥 다른 데서 음악 하다가 온 이들이었어요. [weiv]: 막상 타루는 홍대앞에서 ‘구른’ 경험이 있나요? 그냥 제가 정보가 부족해서…. 타루: 더 멜로디를 하기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홍대앞의 인디 레이블에서 오디션을 열었었어요. 지금은 없어졌는데 지향은 메이저 지향인 인디 레이블이고 이름도 자주 바뀌어서 기억이 안 나요. 철저히 자본으로 굴러가는 회사였어요. 그때 오디션에 제가 당당히 1등을 해서 거기서 연습생으로만 있었는데, 계약도 안 한 상태였으니까 그 뒤에 더 멜로디를 하게 된 거죠. 연(緣)과 업(業) [weiv]: 더 멜로디가 2003년에 결성했으니까, 홍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더 멜로디를 하면서부터였나요? ‘업’이 되었다는 말은 생활이 바뀌었다는 말이겠죠? 타루: 그렇죠. 앨범 나오기 전까지는 알바 했었어요. 음악 알바는 아니고 그냥 알바. 서빙알바. 쌀국수집에서도 일해보고. 초밥집에서도 일해보고. 앨범 나오기 전까지는 낮에 일하고 저녁에 녹음하고 그랬어요. 힘들었어요. [weiv]: 그러다가 파스텔로 들어간 계기는요? 한 자료를 보니까 더 멜로디 데뷔가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 CF 음악’이었다는데 그래요? 자기 음악이었어요? 아니면 의뢰받은 음악이었나요? 타루: 데모를 보냈는데 처음엔 연락이 없었어요. 그러다 제가 소규모아카시아밴드 공연에 놀러갔는데, 회사의 실장님이 저를 눈여겨보다가 ‘음악 하는 애냐?’고 물어보시면서 데모를 들어보고 싶다고 했어요. 데모를 드렸더니 회사에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계약을 하게 되었어요. 2004년에서 2005년 사이예요.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 CF 음악’은 그걸 위해서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더 멜로디 음악이었고, 데모로 만들어져 있는 상황에서 계약을 진행하면서 파스텔뮤직에서 먼저 광고로 알릴 수 있게 한 거예요. [weiv]: 더 멜로디는 유난히 피처링이나 OST가 많잖아요. 이건 밴드에서 푸쉬한 건가요? 아니면 파스텔에서 한 건가요? 그리고 아무래도 ‘터진’ 건 [커피 프린스]겠죠? 타루: 그건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적극적으로 파스텔에서 했어요. [커피 프린스]로 인기가 조금 올라간 건 사실이지만 생활은 이전과 비슷했어요. [weiv]: 그러면 이제 저의 핵심 질문인데요. 전업 뮤지션이 되면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함께 하고 지내는지’에 대한 거예요. 대충 어떤 패턴이 있는 건지라는 질문이에요. 타루: 저는 철저하게 프리랜서로 살고 있어요. 평일에 놀러가면서 ‘이런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런데 24시간 대기조이기 때문에 멀리는 못가요. 음악이란 게 나와야 나오는 것이고, 저는 책상에 열심히 앉아있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weiv]: 일상적인 작업은 어디서 하나요? 살고 있는 곳이 ‘홈 스튜디오’ 같은 곳인가요? 타루: 요 근처에서 독립해서 살아요. 그런데 저는 장비가 많지 않아서 녹음하는 공간은 아니에요. 작업은 독립해서 사는 집에서 할 때도 있고 밖에서 할 때도 있는데, 스마트폰으로 스케치를 하고 더 해야 할 부분은 집에 가서 다시 녹음해요. 스마트폰 녹음 음질이 보이스 레코더보다 좋아요. 그래서 작업 공간에는 크게 지장을 받지 않아요. 작업 하러 레이블 사무실에 마을 버스타고 자주 와요. [weiv]: 한 달에 스케줄은 몇 번이고, 어떤 스케쥴이 있나요? 이른바 ‘행사’도 많나요? 타루: 스케쥴은 주 6일도 있고 주 3일도 있고, 저는 능력이 안 되서 그런지 일주일에 3일만 일해도 열심히 일한 것 같아요. 그 이상은 힘든 것 같아요. 몸이 못 견뎌요. 행사로는 최근에 월드비전 단체에서 도네이션(기부)을 위해 개최한 공연에 참석했고, 얼마 전 김광석 트리뷰트 방송도 했어요. 중간에 일이 많이 생겨요. 공연은 곧 제주도에서 이틀 동안 해요. 단독 공연은 아니고 그쪽에서 기획해서 초청하는 페스티벌인데, 뮤지션마다 이틀씩 책임져서 하는 거예요. [weiv]: 제가 인터뷰한 뮤지션 중 한희정 님은 인터뷰에서 ‘자유 시간에 공연 구상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남들 보기엔 노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다’라고 주장했어요. 옆 레이블인 오지은 님은 ‘나는 회사원처럼 산다’고 하더군요. 타루의 삶은 어떤지. 그리고 그 삶을 좋아하는지. 타루: 맞아요. (한)희정 언니는 굉장히 열심히 살아요. 자기가 어떻게 산다고 이야기를 안 해서 그렇지, 공부도 열심히 하고요. 저도 그렇게 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저희들은 바쁠 때 확 바빠요. 농사랑 비슷한 것 같아요. (웃음) 바쁘다는 게, 저희는 음악인들끼리 자주 만나고, 순회공연 다니는 것도 일이에요. 너무 사람이 많으니까 다 시간 정해서 만나야 하니까. [weiv]: 제가 보기에 파스텔이나 해피로봇은 일이 많지만 나머지 레이블들은 ‘농한기’ 같더군요. (웃음) 이렇게 사는 거 어때요? 전업이 되어서 일이 많아지고, 빡센 것도 있나요? 타루: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체력이 안 따라줘요. 좋고 싫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각자의 일이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빡세지는 않아요. 저 같은 경우 예능 도는 건 아니잖아요. 단지, 체력이 왔다 갔다 하고 긴장을 몇 시간 동안 하다보면 몸이 굳어요. 그런 정도? 저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는 해야 일인거죠. 이것 이상으로 자유로운 건 너무 양심적으로 걸리네요. 무식한 행동파, 야생 타루 [weiv]: 큰 질문이 두 가지 남았어요. 하나는 정치이야기예요. 먼저 트위터에서 ‘우리 가게도 저렇게 헐렸는데….’라고 말한 문구가 기억납니다. 재개발이었나요? 타루: 네. 2000년대 초 재개발 때문이었어요. 을지로에 한화빌딩 있잖아요. 그 옆에 길 건너서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었어요. 가게랑 분식을 동시에 하는 집이었는데, 직장인들 아침과 점심을 책임지는 가게였죠. 조그맣고 다 무너져가는 가게였지만 나름 장사가 잘됐어요. 중요한 수입원이었는데 개발해서 건물 새로 올린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때 한참 농성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잘 안 돼서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가 하는 사업으로 들어가시고, 가게는 무너졌죠. 한 가정의 수입이 없어져버린 거죠. [weiv]: 타루의 액티비즘에 이른바 대학교 ‘운동권’의 배경이 있는 건가요? 대학교 학생운동? 타루: 그건 아니에요. 그때는 제가 운동권 학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잘 몰랐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겠지만, 운동이 필요해서 하는 사람들이 있고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저는 당시에는 후자 쪽이 많다고 생각을 했어요. 분명히 그때도 정도를 위해 희생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은 해요. 저는 제 개인적인 일만 하고 정치에는 관심 없었어요. 그러다가 광우병 파동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런데 저는 딱 20살이 되자마자 유권자로서 선거를 꾸준히 했어요. 내가 뭘 하라고 준 돈을 가지고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대한 감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세금을 내고, 내가 일을 시키는 입장에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관심을 가졌고, 단순히 ‘쇠고기는 한우지!’가 아니라, 국가 원수가 위험 가능성이 있는 것을, 여론을 무시하고 국민을 희생양 삼아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촛불을 들고 나가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 한두 개씩 보이기 시작 한 거예요. 다들 비슷한 것 같아요. 어른이 되면 그냥 보이던 세상이 아니라 음모도 보이고, 사람들 사이의 비즈니스도 보이고, 돌아가는 게 보이니까…. 많이 부조리해 보였죠. 20살까지는 부조리보다는 정의가 크게 보였는데, 지금은 반대예요. 변해가는 것 같아요. 그때보다 안 좋아진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들이 더 커졌다는 것이죠. [weiv]: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지역의 영향 같은 것도 있어요? 타루: 저는 서울 사람이라…. 서울 촌사람이에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부모님이 저를 어디에 데리고 다니신 적이 없어요. 제가 평생을 꼽아서 수영장 세 번 간 게 다예요. 한 맺혔어요! 사정이 있었겠죠. 어쨌든 정말 저는 그래서 서울 촌사람이었거든요…. [weiv]: MBC 파업 현장에는 어떤 계기로 가게 된 건가요? 자원한 건가요, 아니면 거기서 요청했나요? 타루: 그 전에 제가 OBS(경인방송)에서 토론하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있었는데, 미디어법에 대한 외국의 경우들을 상세히 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았어요. 그것과 맞물려서 그때 그분들과 같이 했었어요. 그때 한번 가서 제가 가서 우스갯소리로, 파업하면 안 되니까 ‘파업하시면 또 올게요’라고 말했어요. 근데 정말 다음에 또 파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또 갔어요. 가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저는 확실히 기업 쪽보다는 노동 편인 것 같아요. 좀 더 약한 사람을 더 돕고 싶은…. 그리고 파업하면 다들 너무 힘들고 지치잖아요. 그래서 쉬어가는 타이밍에 제가 가서, 너무 달리셨으니까 식혀드리는 컨셉으로 갔어요. ‘파업하는데 이런 곡 들려드려도 되요?’라고 물어봤는데 오히려 그런 것을 원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되게 즐거워하셨어요. [weiv]: 그런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나요? 이래저래 ‘찍힐’ 수도 있을 테고 심의를 통과 못할 수도 있고…. 타루: 저희 회사 자체가 다 그래요. 저희 회사는 촛불 시위 때 다 같이 갔어요. (웃음) 네.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다들 알고 보면 다…. 저는 그냥 행동파인 거죠. 다른 분들은 지적으로, 교묘하게 하는 것이고, 저는 무식하게 하는 것이고요. (웃음) 심의는 “쥐色 귀, 녹色 눈”은 통과 못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번에 “말해 줘요”도 그렇고, 제가 굳이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게 효율적이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사람들은 들이붓는 것 보다 살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해서 방법론을 바꾼 것 같아요. [weiv]: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데, 음악으로는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지 않아하는 경우도 있고, 모든 음악에 정치를 담으려는 경우도 있는데 타루는 어떤 쪽인가요? 타루: 저는 그냥 삶이라고 생각해요. 제 삶 안에 정치가 있는 거예요. 뉴스를 보고 내 주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일로 인해서 제가 느끼는 것이에요. 정치는 그냥 자연스럽게 제 옆에 있는 거죠. 우리나라는 그게 좀 엄격한 것 같아요. 정치적인 것과 아닌 것이 선이 확실하게 그어져 있는데, 저는 그런 것 자체가 기형적이라고 생각해요. 정치는 대단한 사람만 해야 하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게 기형적인 거죠. [weiv]: 옛날에는 정치적인 액티비즘은 주로 ‘일상을 전복하자’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일상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아요.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데 주변에서 ‘개발’을 해서 방해한다는 코드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타루: 그런 것도 약간 바뀐 것 같아요. 옛날에는 투쟁해서 무언가를 얻고 일상을 뒤집어야 한다는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것이었다면, 요즘에는 사람들이 많이 약아지기도 해서 ‘너 그렇게 살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네가 그렇게 삶으로써 방해가 되잖아’라고 따지는 것이 더 설득력 있나 봐요. ‘네가 침해한 거야’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로 하여금 뭔가를 부여한다는 거죠. 일종의 죄의식 같은 거? (웃음) [weiv]: 오지은은 몇 달 전 저와의 인터뷰에서 “커트 코베인이 죽은 후에 음악을 듣기 시작한 애들은 어쩔 수 없는 약간의 염세주의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어요. ‘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개인의 조그마한 행복이 굉장히 소중한 거다’로 변한 거죠.”라고 말했어요.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아 보이는데…. 타루: 저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씩 씨앗을 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묄세’라는 말이 있잖아요. 뿌리라는 것이 단순히 지지대라기보다는 하나하나의 역사잖아요. 과거의 것들이 있어서 현재 지켜지고 바람에 안 밀리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희 같은 경우는 청담동이나 신사동에 있는 것보다는 신수동이나 상수동에 있는 것을 찾아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니까. 근데 그런 것을 잘라내고 파내고 반듯하게 하는 것이 이분들은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꽃꽂이 같아요. 뿌리는 다 잘라버리는 거죠. 4대강사업도 강을 직강(直江)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사람의 장(臟)도 구불구불한데, 그걸 쫙쫙 피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렇게 하면 정화작용이 일어나는데 굉장히 안 좋아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도 자연이 파괴될 걸 아는데, 그걸 포장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돼요. [weiv]: 마지막 질문은… 이른바 ‘여성적인 것’을 표현하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나요? 과거의 여성 아티스트들의 경우 여성성을 거부하는 코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과는 또 달리 복잡한 것 같네요. 타루: 이 점도,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다 약아진 것 같아요. 옛날에는 순수하게 거부였다면, ‘노이즈 마케팅’ 같은 말들이 생기면서 그걸 역전시켜 힘으로 이용해버리는…. 전체적으로 다 그런 것 같아요. 똑똑해진 대중. 더 똑똑하게 낚시하는 사람들. 옛날에는 어떻게 보면 순수했던 거죠. 이제는 단순함이 통하지 않고, ‘어? 그래, 난 이걸 역으로 이용할래’라든지 ‘어떤 자존감이 창피한 게 아니야. 너에게는 없는 거고 나한테만 있는 거야’라고 본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걸 수도 있어요. 전 그렇게 보거든요. 어떻게든 좋게 자신의 것을 활용하는 세대가 된 것 같아요. [weiv]: 그래도 타루는 ‘야생 타루’잖아요. (웃음) 타루: 저는 덜 약은 거고(웃음), 그래서 고생을 하고 있는 편이에요. (오)지은 언니도 ‘제발 조금 현명하게 대처를 하라’고 말해주기도 해요. 근데 저는 성격이 있으니까 바로 이렇게 나가거든요. 보통 이렇게 처리하니까 언니들이 주위에서 걱정하세요. ‘조금 여우처럼 해라. 너는 그걸 왜 못 하냐?’라고…. 손해 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옛날처럼 직접적인 펀치가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다른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고. 그걸 서른이 돼서 알았다는 게…. (웃음) [weiv]: 진짜 마지막 단답형 질문. 타루가 바라는 타루의 꿈은? 타루: 욕심이 있어요. 음악 역사에 남고 싶은 삶.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잖아요. 저는 외로움이 좀 많거든요. 죽고 나서도 외롭고 싶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름. 그리고 곡들이 제가 낳은 자식들 같거든요. 곡들이 인격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개체로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제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걔네는 계속 활동을 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친구 같은 존재, 정겨운 존재, 항상 웃는 존재로 남고 싶어요. 아, 그리고 빌딩을 사고 싶습니다. (웃음) [weiv]: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롤 모델’은 그대로인가요? 타루: 해외 아티스트는 카디건스(Cardiagans)예요. 그리고 국내에서는 굉장히 오랫동안 음악을 하면서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은 산울림의 김창완 선배님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국내 여성 가수로는 이미자 선생님? 이미자 선생님은 너무 목청이 좋으셔서 나중에 돌아가실 때 ‘약속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정말 노래하면 한국의 에뛰드 삐아프 정도 되지 않나요? 장르를 떠나서 대가시니까. [weiv]: 아침방송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열정적으로’ 인터뷰해줘서 고맙습니다!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