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대중음악은 있는가?

20020327060436-stones밀리언 셀러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고 멀티 밀리언 셀러나 되어야 겨우 히트곡으로 인정받는 이 시대에 대중음악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것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분명 대중음악 시장은 엄청나게 커졌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용이하게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과는 별도로 우리에게 과연 ‘대중’음악이 존재하는가의 여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대중음악은 문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음악이다. 이러한 특성을 통해 그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 ‘시대의 사운드트랙’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 왔다. 베트남전을 그린 영화들에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등의 음악이 빈번히 사용되는 것은 이들 음악이 전쟁과 특별한 관련을 가져서가 아니라 바로 그 시기의 일반적 기억을 압축적으로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는 우리 마음 속에 뿅뿅대는 신디사이저의 전자음으로 남아있고 1990년대는 그런지의 지글거리는 기타 노이즈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처럼 시대를 정신적으로 보존해 줄 만한 음악적 공통분모가 존재하는가는 의문이다. 200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10년 후쯤 만들어진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음악을 그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대중음악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는 공유된 경험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대중음악을 더욱 각별하고 흥분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월드컵 축구가 왜 월드컵 사격보다 재미있는가의 문제와도 같다. 축구라는 경기가 그 자체로 사격보다 재미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월드컵 축구는 확실히 월드컵 사격보다 재미있다. 그것은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경기를 주시하고 함께 흥분하고 함께 열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격장에 몇 십 명의 매니아가 모여 썰렁한 박수를 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다.

‘시대를 공유하는 경험’으로서의 대중음악을 죽인 것은 우리 삶의 점증하는 다양성과 속도다. 오늘날 음악은 점점 더 개인적인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음악만을 골라 들으며 자신의 관심권 밖에 있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음악 취향이 갈수록 다원화되고 세분화되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음악 공급의 다양화, 매체의 다양화, 라이프 스타일의 다양화 등의 직접적인 결과다. 역사의 발전은 다양성 증대의 과정인데, 다양성이 획일성보다 좋은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우리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도덕적으로는 이에 동조할 수 있다 해도 왠지 마음 한 구석에서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다양화와 개별화 추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듣고 같이 즐기는 것으로서의 음악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오늘날 음악 팬들이 기를 쓰고 집단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는 것도 이 ‘방구석에서 혼자 듣는 음악’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경험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이 일면적인 것으로 비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나라마다 꿋꿋한 건재를 유지하는 히트 차트의 존재는 일반적 취향과 공통의 선호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이 히트 차트의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 차트 1위 곡은 곧 ‘전국민의 애창곡’을 뜻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 차트 1위는 이제 단순히 ‘많이 팔린 음반’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음반이 많이 팔렸다는 것과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여기에는 속도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과거에는 1위 곡들이 몇 주에 걸쳐 서서히 상승해 정상에 올랐고 그 후 서서히 차트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요즘에는 차트 1위에 곧바로 데뷔했다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음반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중이 특정 곡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그것을 마음 깊이 간직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확보되기 어렵다.

20020327060104-spears다양성과 속도의 결합은 대중음악의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의 전쟁과도 같은 경쟁상황 속에서 대중음악 종사자들은 음악의 첫 30초에 사활을 거는 경향이 있다. 첫 30초 동안 청취자를 사로잡지 못하면 가망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의 “(Baby) One More Time”을 작곡한 맥스 마틴(Max Martin)은 피아노 코드에서 ‘Oh Baby Baby’에 이르는 도입 시퀀스를 완성한 순간 이 곡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대중음악은 점점 더 예술의 영역보다는 심리학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음악 유통의 가속화가 초래하는 또 하나의 결과는 대중음악이 점점 틀에 박힌 것으로 되어간다는 점이다. 음악산업은 대중에게 음악을 충분히 소화하고 음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짧은 시간 안에 대중의 구매의욕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포맷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테이크 댓(Take That) 이후 영국의 히트 차트를 주름잡고 있는 수많은 보이 밴드/걸 밴드들이 히트곡의 대부분을 커버버전에 의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는 좀 낯설었지만 들을수록 좋아지는 음악’은 주류 시장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분명 ‘대중음악’임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악은 손쉽게 ‘특수 취향’의 음악으로 분류되어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영국의 BBC가 설립한 문화예술 전문 채널 BBC4의 사례는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BBC4가 격조 높고 교양 있는 프로그램들을 방영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유료로 운영되는 디지털 채널이라는 점이고, 이 채널에서 방송되는 내용이 과거에는 공중파를 통해 일반에게 널리 공급되었다는 점이다. 다양화와 전문화를 표방한 BBC4 출범의 실체는 결국 일반 대중의 몫이었던 문화예술을 그들에게서 앗아가 특수층을 위한 것으로 포장만 바꿔 내놓는 것이다. 현재 음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 같으면 충분히 주류에 진입해 보다 폭넓은 대중에게 들려졌을 만한 음악도 이제는 사전에 ‘대중에게는 어려운 고차원적인 음악’으로 예단되어 주류에서 제거당하고 마는 것이다.

20020327060436-beatles현존하는 밴드 중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그룹은 유투(U2)와 라디오헤드(Radiohead)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유투가 데뷔한 지는 벌써 20년이 지났고 라디오헤드도 이미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이들에게 필적할 만한 밴드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실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훌륭한 밴드들은 컬리지 라디오와 인터넷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중은 보다 풍족한 문화생활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수백 수천만장의 음반 판매고라는 허상 속에서 오늘날의 대중은 듣고 나면 곧 잊혀지는 값싼 음악들에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런 추세가 계속되는 한 비틀스(The Beatles)가 천하를 평정하고 티렉스(T.Rex)를 모르는 이가 없던 그런 시대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한국에서도 산울림이 매주 TV에 등장하던 인기 그룹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양성’이나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예찬이 ‘사회는 없다. 오직 개인들의 집합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마가렛 댓처(Margaret Thatcher)의 말과 공명되는 것은 단순한 환청만은 아닐 것이다. 20020325 | 이기웅 keewle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