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26081111-xinlisupremeXinlisupreme – Tomorrow Never Comes – Fat Cat, 2002

 

 

IDM에 대한 록의 테러

흔히 사용되는 말들이기는 하지만 ‘본토’니 ‘정통’이니 하는 것은 사실 음악적인 것과는 무관한 ‘정치적인’ 용어들이다. ‘본토’라는 말은 우리가 즐기는 팝이나 록이나 힙합이나 R&B 같은 음악이 (아무리 한국인들이 한다고 해도) 결국은 ‘남의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이 남의 것인 한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흉내낼 수 있을 뿐 변경하거나 재창조할 수는 없다. 남의 것을 마음대로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정통’이라는 말은 이러한 ‘본토’의 소유관념에 도덕적 우월성을 덧붙인다. 즉 ‘본토’의 음악은 단순히 ‘남의 것’일 뿐만 아니라 본받아야할 모범이며 능가할 수 없는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본토’와 ‘정통’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좋은 음악’은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이 아닌 ‘본토의 것에 근접한 음악’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 신문에 실린 한 음반 리뷰에서 “OOO의 음악은 R&B의 거장 베이비페이스(BabyFace)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매우 뛰어난 것이다”라고 한 ‘칭찬’은 바로 이런 관념의 한 자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가 일본음악의 저력을 세계에 알린 지는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사실 일본이 세계적인 음악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카모토 큐(坂本九)나 핑크 레이디(Pink Lady) 등의 간헐적 성공사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국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음악계는 근래 들어 탁월한 뮤지션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면서 영미권 음악에 식상한 지구촌 음악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일본 음악의 힘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접할 수 없는 독특한 음악과 사운드를 들려준다는 점에 있다. 코넬리우스(Cornelius)의 아방가르드 팝이든 매드 캡슐 마케츠(Mad Capsule Markets)의 테크노 메탈이든 멜트 바나나(Melt Banana)의 노이즈 펑크든 이제 일본의 음악인들은 서구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는 수준을 넘어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형성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이들은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를 넘어 세계적인 뮤지션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본 음악인들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본토’나 ‘정통’ 따위의 권위에 순응하기보다는 서구 음악을 자신의 음악세계 형성을 위한 소재 정도로 취급하는 당돌함과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정통’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탈선’이나 ‘결핍’이 아닌 ‘창조’와 ‘도전’을 뜻하는 것이라는 확신은, 적지 않은 음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다. 아직 신인에 불과하지만 일본 큐슈 지방 오이타 현 출신의 밴드 진리슈프림(Xinlisupreme)에게서도 이런 자신감은 어김없이 발견된다. 1995년의 옴 진리교 사린가스 테러사건에서 착안한 밴드 명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종말론적 음향 테러리스트’를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테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몽매한 지하철 승객들이 아니라 세계 음악계의 첨단 사조로 부각되고 있는 IDM(Intelligent Dance Music)이며 이들이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사린가스보다 더 강한 독성의 기타 노이즈다.

이들이 IDM을 바라보는 시각은 1970년대에 펑크가 프로그레시브 록을 바라보던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IDM의 이론적이고 건조한 사운드를 격파함으로써 록 음악의 힘과 기타의 효력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IDM에 접근하는 방식은 펑크가 프로그레시브 록에 접근한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펑크가 프로그레시브 록의 모든 것에 반발하여 철저히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만 나아가려 했던 반면 이들은 IDM의 골간을 이루는 DMX 비트와 다층적인 사운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이 위에서 귀를 찢는 듯한 무정형의 기타 노이즈를 전개함으로써 IDM의 계산된 완결성에 즉흥성의 균열을 가하고 그것의 극단적인 세련미를 야수적인 굉음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음악은 IDM을 전면 부정하는 혁명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부분적 테러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펑크’라기보다는 ‘IRM(Intelligent Rock Music)’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더욱 걸맞은 것이다.

이들의 음악을 지저스 & 메리 체인(Jesus & Mary Chain)과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에 연결짓는 팻 캣(Fat Cat)의 선전문구는 이들 음악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드러내 준다. “All You Need Is Love Was Not True”나 “Fatal Sisters Opened Umbrella” 같은 선율미 넘치는 곡들은 분명 이 두 그룹의 음악과 맥이 닿아 있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앨범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들 음악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그다지 대표성 있는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단조로운 특성을 보이는 여타의 노이즈 록 음반들과 달리 이 앨범은 놀라울 만큼의 음악적 다채로움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극단주의 노이즈 록 전통에 가까운 “Kyoro”와 “I Drew A Picture Of Myself”도 있고 “Symmetry” 같은 이들 나름의 앰비언트(?) 트랙도 있으며 “Suzu”나 “Untitled”처럼 IDM으로 분류해도 별 무리가 없는 작품들도 있다. 이 외에도 종말론적 공포와 혼란을 노이즈의 소용돌이로 묘사한 “Goodbye For All”, 물결소리처럼 들리는 기타 드론이 인상적인 장송곡 “You Died In The Sea” 그리고 코토와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Nameless Song” 등, 이 앨범은 극단적인 사운드 속에서도 음악적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멋진 트랙들을 즐비하게 갖추고 있다.

물론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을 한다고 해도 이들의 음악이 ‘극단음악’이라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이들의 음악은 결코 ‘모두를 위한’ 음악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결코 유투(U2)나 림프 비즈킷(Limp Bizkit)처럼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저지른 테러의 공과를 평가하는데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테러는 성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IDM의 아성은 일본에서 온 무명의 노이즈 밴드가 타격을 입히기에는 너무나 크고 견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앨범을 통한 이들의 시도가 전혀 무익했던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들의 시도는 대단히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은 비록 소수나마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에 주눅들지 않고 새로운 음악에 당차게 도전하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흐뭇한 일이다. 록 음악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이러한 도전에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앨범의 사운드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마치 주파수가 잘못 맞춰진 라디오처럼 불투명하고 멀게 들린다. 따라서 이 앨범의 진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앰프의 볼륨을 한껏 높이고 들을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볼륨 수준에서는 음악에 삽입된 작은 소리들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높은 데시벨 부분에서 직면하게 되는 고통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옴 진리교의 사린가스 테러를 당한 사람들은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고 한다. 진리슈프림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귀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갈지도 모를 일이다. 20020325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8/10

수록곡
1. Kyoro
2. Goodbye For All
3. Symmetry
4. All You Need Is Love Was Not True
5. Suzu
6. I Drew A Picture Of Myself
7. Under A Clown
8. Amaryllis
9. You Died In The Sea
10. Untitled
11. Fatal Sisters Opened Umbrella
12. Nameless Song

관련 사이트
Xinlisupreme 공식 사이트
http://www.dion.ne.jp/~xin
Fat Cat Record의 Xinlisupreme 사이트
http://www.fat-cat.co.uk/xinliC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