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명동 미도파 백화점 지하에 있는 음반 매장 파워 스테이션에 들렀다가, 퀸(Queen)의 [Greatest Hits] CD를 사게 되었습니다. 수록곡에 대해서는, 팝음악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다 아실 것들이니 생략하겠습니다. 대신 여기서는 이 음반(밴드 퀸이 아니라…)과의 20년에 걸친 질긴 인연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제가 퀸을 처음 안 때는 1982년 3월.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팝 음악에 심취해볼까 어쩔까 하여 용돈을 모아 잡지 [월간팝송] 3월호를 샀습니다. 잡지를 살 당시 성가를 드높이던 올리비아 뉴튼 존이나 크리스토퍼 크로스가 잡지의 대부분을 장식하지 않겠나 기대를 품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잡지 내용의 대부분은 록 관련 기사였습니다. 비록 표지 모델이 둘리스였음에도 불구하구요. 당시 편집장은 전영혁 씨였습니다. 어찌됐든, 저는 그 잡지를 통해 듣도 보도 못한 록 밴드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답니다. 특히나 잡지 앞부분엔 퀸 스페셜이 열 페이지 이상 차지하고 있었어요. 이 스페셜의 명분은 “결성 10주년과 새 앨범 [Greatest Hits] 발매 기념”이었습니다(그러나 그 해 중반에 이들의 새 음반 [Hot Space]가 발매됩니다. 시기적으로 약간 늦은 기획물이었죠).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이 일단 발동하면 소유욕으로 곧장 이동하는 게 저의 습성이라, 곧장 동네 음반점으로 달려가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Greatest Hits] 카세트를 사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소니에서 나온 워크맨이 대유행을 했던 때여서, 딱 그걸로 들었으면 좋으련만, 당시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저는 그냥 집에 뒹굴던 스피커 한 개 달린 AM/FM 겸용 카세트 라디오(금성사)로 듣는 데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오아시스 카세트는 음질 자체가 몹시 형편 없었구요. “야, 정말 퀸이 대단한 밴드인 모양이다. 이렇게 히트곡이 많다니!”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테이프 앞뒷면을 다 합하여 서른 곡에 육박했던 것 같네요. 그런데 이렇게 수록곡이 많았던 이유가(시간이 약간 지나 알게 되었는데) 두 가지가 있었더군요. 첫 번째는 퀸의 노래들이 거의 대부분 3분 내외로 상당히 짧다는 것. 최대 명곡이자 대곡으로 명성이 자자한 “Bohemian Rhapsody”도 따져보면 고작(?) 5분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적인 상황 탓인데, 당시 무지막지했던 ‘금지곡’때문이었습니다. 즉, 퀸의 주요 히트곡들인 “Bohemian Rhapsody”, “Killer Queen”, “Bicycle Race”, “Another One Bites The Dust” 등이 몽땅 금지곡이었습니다. 이 노래들이 전부 삭제되고 마니, 라이센스로 발매시 전면 재편집을 해야 할 수 밖에요. 이런 연유로, 미국에서 발매된 [Greatest Hits]와 국내 라이센스 버전의 수록곡들은 대단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카세트를 산 지 얼마되지 않아 동네 음반 가게에 구비되어 있던 ‘빽판’을 보고서 알게 되었답니다. 이런 통탄할 만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당연히 그 빽판을 사야 할 것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당시 제게는 레코드용 턴테이블이 없었습니다. 해서 차선책으로, 같은 음반점에 진열되어 있던 ‘빽카세트’를 사고 말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길보드’에서 파는 테입이랑 유사한 포맷이었지요. 음질은 어땠을까요? 오아시스에서 나온 정품 카세트보다는 좋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해적판은 해적판이라 테입의 재질이 워낙 열악해, 이 테입을 듣고 있노라면 뒷면의 사운드가 백워드(backward)로 선명히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퀸의 주요 장기는 오페라틱한 코러스인데, 이러한 웅장한 코러스가 거꾸로 들려오는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Bohemian Rhapsody”를 스무 번 이상 들었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르네요. 분명히 퀸에게는 듣는 이로 하여금 홀딱 반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당시엔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의 유려한 멜로디 창조 능력, 코러스를 중심으로 하는 치밀한 편곡 능력은 틀림없이 대중 음악에 있어서 탑 클래스로 자리매김되어야 합니다. 이들의 연주 실력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어렸을 땐 ‘4 옥타브에 달하는’ 강렬하면서도 품위 넘치는 음색의 프레디 머큐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색깔의 기타 연주를 구사하는 브라이언 메이만 주목했지만, 사실 나머지 멤버들인 존 디콘이나 로저 테일러의 기량도 결코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입니다. 로저 테일러의 경우는 그의 수려한 외모가 연주 실력을 가리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의 무척이나 독특한 라딕 드럼 사운드는, 브라이언 메이의 수제품 기타와 더불어 어느 록 음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컬러를 자랑합니다. 다만, 개별적으로 보면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요소로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문제점은 전반적으로 퀸의 음악이 ‘초급자용’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의 음악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강렬한 ‘록’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즉, 퀸의 사운드는 너무 쉽다는 것이지요. ‘록’이 ‘팝’과 구별되는 요소 중 하나로서, ‘사고(思考)의 여지’가 훨씬 풍부하다는 점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뭐, 이 말은 ‘팝은 골이 텅 빈 음악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팝은 멜로디가 쏙 들어오고, 싱어가 노래 잘 부르면 장땡입니다. 하지만 록의 경우는 다릅니다. 멜로디나 가창력은 물론이고 ‘연주’와 ‘편곡’의 중요성 또한 만만치 않게 강조됩니다. 이것 저것을 따지게 되니 자연스럽게 록을 둘러싼 요소들이 복잡다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른바 ‘장르’라는 개념이 록에서 가장 복잡한 지형도를 그리고 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퀸의 이러한 ‘한계’는 단점만 내재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다가(여기서 ‘성장’이란 반드시 ‘진보’나 ‘발전’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어떨 때는 그저 생물학적인 자라남을 의미할 뿐일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인간은 ‘퇴행’의 사이클로 전환하는 경우를 맞이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론 대략 서른 살을 넘기자마자 찾아드는 주기가 아닐까 싶은데, 이러한 사이클에 접어들면 갑자기 어린 시절 푹 빠졌던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이 유난히 짙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한창 성장할 때 “야, 이것 참 유치하고 싸구려틱 했구나”하고 통탄(?)했던 것일수록 더욱 강렬하게 타오릅니다. 삼십대 중반 이상의 아저씨들이 1970년대 B급 액션 영화에 열광하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지요. 제게 있어서는 어느 날 갑자기(물론 나이 서른을 넘겨서) 퀸의 음악이 생각날 때가 잦아졌고, 이러한 ‘생각’은 서서히 아련한 ‘그리움’으로 변질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보다 정확한 이유를 첨가시키자면, 퀸에 미쳐 돌아가던 1982년이 제게는, 인생에 있어 최고 절정기가 아니었나 싶은, 자조 섞인 회한의 감정이 개입되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간혹 시험을 봐야할 때 좀 곤혹스럽기는 했지만, 그 때가 저에게는 최고의 태평성대였던 것. 즉, 앞날에 대한 걱정,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절망감, 삶의 진정한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막막함 등등 제 주위를 둘러싼 부정적인 요소들은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지요. 정말 아무런 걱정 없이, 음악만 열심히 들으면 행복하기만 했던 그런 철없던 시절을 대표하는 배경 음악이 바로 퀸의 노래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절정기를 축복해주던 팡파레와도 같은 퀸의 음악은, 바꿔 생각해보면, 이듬해 제2차 성징기와 함께 찾아든 지옥 같은 시절의 포문을 열어주는 일종의 장송곡으로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여차 저차 한 마음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Greatest Hits] 씨디를 집어든 저는, 그 수록곡들을 보고는 상당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수록곡들 대부분이 1982년 라이센스 버전을 근간으로 하고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당시 금지곡이었던 노래들이 대거 복귀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발매반에 있었던 “Under Pressure”(이 노래는 과거 라이센스에도 수록되어 있었다)나 “Keep Yourself Alive” 등이 빠져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 제가 산 씨디는 유럽 발매 버전으로, 미국 본토에서는 발매 당시 상당한 인기를 모았던 [Classic Queen]이나 [Greatest Hits 1&2]만 현재 남아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이미 오래 전 ‘EMI-계몽사’ 시절에 국내 라이센스로도 발매된 바 있지요. 세월의 흐름 탓으로 모든 게 뒤죽박죽 되어버린 형국이 되었지만, 자그마하게 솟아나려는 불만을 애써 눌러버리고 씨디 플레이어를 작동시켰습니다. ‘Made In Italy’라서 그런가? 음향이 어떤 부분에서는 작아졌다 어느 부분에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확 커져 버렸는데, 본래 퀸 음반의 녹음 상태가 그런 것이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렸을 때 들었을 때와는 다소 이질적인 요소가 돌출되자 당혹감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이런 경우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상투구를 갖다 붙여도 슬쩍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실로 오랜만에 들어본 퀸은 긴 세월 동안 폄하했던 만큼 그렇게 유치하지도, ‘초보자용’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음악을 듣는 순간, 비록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내 인생의 황금기-1982년-로 회귀하는 듯한 달콤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연 음악의 영원불멸하고 위대한 힘일까요? 20020311 | 오공훈 aura508@unitel.co.kr